제목 : 길갈로 돌아가자!(1)
본문 : 여호수아 10:15, 43; 5:2-9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바로 옆에 위치한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이 길갈은 정복기간 내내 이스라엘군의 베이스캠프, 주둔기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먼저 가나안 중부를 점령하고,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을 차례로 공격하여 가나안 전체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각 지역별로 전쟁을 치루고 난 후엔 반드시 다시 길갈로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가령 여리고는 단번에 점령했지만 아간의 범죄로 아이성 첫 공격은 실패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길갈진에 돌아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아골 골짜기에서 범죄한 아간과 모든 권속들을 죽이고 재산들을 불태웠습니다. 이같이 실패했을 경우만 아니라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에도 먼 길임에도 불구하고 길갈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본문 10:15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 중부의 다섯 왕을 정복하고 길갈 진으로 돌아 왔다는 기록입니다. 또한 가사와 라기스, 헤브론, 가데스 바네아까지 남방을 정복하고 길갈로 돌아 왔다는 똑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본문 10:43). 메롬 전투에서 북방의 모든 나라들을 대파시키고 정복한 후에도, 정황을 살펴 볼 때 당연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로 돌아 왔습니다.
그들은 전투를 마치면 왜 길갈로 돌아 왔을까요? 첫째 이유는 길갈은 광야에서 태어나 할례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출애굽 이후 유월절을 38년 후에 다시 처음으로 지켰던 곳이었습니다.
셋째 이유는 요단강이 갈라지며 강 바닥으로 걸어 도하한 놀라운 사건을 기념키 위해 열두 돌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길갈은 그들에게 있어 영육심 간에 고향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그들에게 있어 할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왜 길갈로 돌아 가야 되는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첫째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새롭게 하고자 우리 신앙인들은 길갈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7절).
1)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거룩한 외적 표시이며, 언약의 표 (창 17:9-14)로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남아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의식을 행했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미 할례받았었던 20세 이상의 광야1세 성인남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물론 대제사장 엘르아살도 살았습니다)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이동하는 동안 할례를 시행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광야생활 40년 동안 태어났던 약 70만명의 이스라엘 2세 남자들은 할례를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즉 “할례없는 자들”(8절)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된 증거를 갖고 가나안 정복의 성전에 임하게 하기 위해, 당시 약 30만의 40세부터 60세까지의 광야 1.5세들로부터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도착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2)가나안 정복이란 숙명의 과제를 앞두고,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재정립하고 그의 권속이 되는 의식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립하기 위해 육체의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본문 9절 말씀처럼 그들은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길갈 Gilgal).
3)물론 구약에서는 이러한 육체의 할례뿐만 아니라 마음의 할례도 함께 강조했습니다 (신 10:16; 30:6).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서서는 과거 의문인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 심령의 할례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롬 2:28-29; 골 2:11).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운데 살지만 이제는 세상임금 마귀로부터 벗어나 하늘을 사는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천국을 향해 나아가기가 귀찮고, 회의적이기도, 힘들기도 하지요? 이는 과거 가나안땅을 정복하려 싸우던 이스라엘과 흡사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첫 은혜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치 전쟁을 치루고는 길갈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받아 새 힘을 얻는 것처럼요.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한 기회들을 만들어 첫 은혜의 현장으로 돌아가 심령을 새롭게 하시길 축원합니다.
2.두번째 이유는 우리의 여전히 남아 있는 육적 수단과 방법을 버리게 하고자 함입니다 (본문 8절).
가나안 적진임에도 할례를 행케 하신 두번째 이유는, 육신적 생각과 수단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토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실로 할례는 죄로 더럽혀진 육신을 모두 벗어버리며, 또한 육신적 소욕을 완전히 제어한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사실 할례받은 사람은 며칠간 아파서 꼼짝도 못하여 전투력을 상실케 됩니다. 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사례) 창 34:24-27 세겜족속 남자들이 할례로 인한 아픔으로 꼼짝못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쳐들어가 그들을 모두 죽이고, 누이 디나를 데려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간혹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육의 옷을 겹겹이 걸칩니다. 욕망과 위선과 술수 등 갖가지 인간적 수단과 방법,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이라면 중대하고 시급한 일일수록 먼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무력해진 자, 자기를 부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더욱 더 크게 역사하는 법입니다. 더디 갈지라도, 또는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할 지라도 우리는 잘못된 세상의 편법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길갈로 돌아감으로, 어느덧 다시 예전과 같이 육적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죄악을 더 이상 짓지 않도록 버리시길 축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우리가 길갈로 돌아가는 이유는, 신앙공동체 의식을 다시금 고취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5절).
할례를 행함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은 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신앙공동체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한 민족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동시에 할례를 받은 것은 출애굽 때의 할례와 길갈에서의 할례 두 차례 뿐이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십보라와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 가는 길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에 던졌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놓았습니다. 바로 이 피남편이라 함이 할례를 말함이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4:24-26). 할례를 통해 그들은 다시금 하나의 가족공동체임을 천명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한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육적으로는 A, B, AB, O형으로 다를 지라도, 영적으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한 피를 나눈 JC혈액형입니다.
혹시 우리가 교회 공동체 식구란 의식이 많이 흐려졌습니까? 우리 모두 첫 은혜를 받아 감격을 주체 못했던 길갈로 돌아가십시다. 우리가 첫 은혜를 회복하러 기도의 자리로 나서거나 수양관에 가거나 함은 보다 근원적인 안식과 축복, 생명을 얻는 길임을 다시금 인식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길갈은 언제 생겼고 어디인가요?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나요? 우리 모두 각자의 길갈로 돌아가십시다. 늘상 무엇을 하던 수시로 첫 은혜의 현장으로 돌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은혜의 감격 가운데 새롭게 자신들을 재무장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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