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 51-60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본문말씀 : 행7:51-60
제 목 : 성령을 거스리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하는도다.(행7:51) Ye stiff necked and uncircumcised in heart and ears, ye do always resist the Holy Ghost : as your fathers did so do ye. (Act7:51)
우리의 삶은 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도 따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영적(영계)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 생명의 법도와 마귀사단의 유혹속에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자주 갈등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주 죄의 법으로 기울어집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합니다.(롬8: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말씀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성도들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롬8:1)
요15:10에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은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갈5:19-21)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롬8:7)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은 결정적인 때에 내 생각을 선택합니다.
나도 모르게 비 신앙인들 같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비겁하고, 옹졸한 행동입니다.
미국의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았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신임 대통령에게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결단입니다“. 라고 건넸다고 합니다.
우유부단하거나 우왕좌왕하는 지도자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명확하게 판단하고, 분명한 결단을 내리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지도자가 우유부단하면 백성들은 방황하게 됩니다.
정확한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말씀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결단력이 분명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평범한 집사였지만 성경에 능했습니다.
오직 진리를 전하다가 순교한 초대교회 영적지도자였습니다.
초대교회 처음으로 순교의 제물 피를 드렸습니다.
세속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성령에 이끌려 불의와 맞서 진리를 전한, 스데반 집사를 볼 때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통해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입니다.
사도행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항상 거룩한 충돌을 일으킵니다.
육체의 소욕과 또는 진리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충돌입니다.
청중을 향한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의 내용은 자기민족 속에 이루어 주신 주님의 역사(歷史)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도 주님을 배신(背信)하고 반역(叛逆)하는 조상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의 의도하는 바를 분별(分別)하고 이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의 거스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항상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은혜와 변화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절)
‘찔림’ 이란 기존 가치관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룩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말씀을 들을 때, 거룩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요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대상이 우리들이 아닌 내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임하니라’. 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욘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느헤미야에게 임하니라.(렘1:11)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사38:4)
‘임하니라’ 는 말씀은 마음속에 말씀이 부딪혀 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레마’ (Rhema) 라고 합니다.
레마는 성령의 역사로 내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일어나고, 깨달음이 오고,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격으로 부딪혀 오고, 때로는 헌신할 마음으로, 때로는 회개로 부딪혀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거룩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 마음에 '찔렸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영적 충돌입니다.
언제 영적 충돌이 일어납니까?
1. 죄를 책망할 때 거룩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은 회중을 향해서 세 가지 죄를 책망했습니다.(51-53절)
1)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51절 상)
‘목이 곧다’ 는 말은 교만하다. 라는 표현입니다.
남에게 굽이지 않고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거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 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33:3)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세입니다.
모세는 당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할 때, 목이 곧고 패역한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몹시 안타까워했습니다.
여러분! 교만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웃시야가 그러했고, 아합이 그러했고,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곡식은 익어 갈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신앙은 성숙해 갈수록 겸손해 집니다.
말씀으로 거듭나서 성화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고 패역하다고 스데반은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2) 또한, 성령을 거스린다고 책망했습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 하)
성령을 거스린다. 는 말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내 방법, 내 뜻,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영적 방향을 잃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길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롬8:26)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은 생명의 역사,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찬양, 기도, 예배할 때 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한 길이요. 평안한 길이요. 보호받는 길입니다.
3) 또한, 선지자를 죽이고 의인을 핍박했다고 책망했습니다.(52절)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한 책망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죄를 무섭게 책망하는 설교였습니다.
요즘 설교는 죄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는 단어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회개를 해야 성령께서 내 속에서 역사를 합니다.
더러운 그릇을 먼저 비워야 내용물을 담듯 내속이 비워야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요즘 설교는 사람들의 이성과 정신세계를 움직이려고 합니다.
공감하고 이해되는 것까지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정신세계를 넘어 영혼을 살리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하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비웃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고, 부활을 증거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거침없이 전하는 설교는 선지자적 설교요, 영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설교였습니다.
목사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 더 깊은 은혜를 드끼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거룩한 충돌이 일어나는 영적설교가 필요한 때입니다.
2. 마음의 거룩한 충돌이 일어날 때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1) 어찌 할꼬 회개하였습니다.(행2: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행2:37절)
말씀을 듣고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은혜는 ‘어찌 할꼬’ 하는 마음에 거룩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부딪혀 오기를 사모하세요.
하나님말씀이, 부딪쳐 올 때, 육적인 소욕이 깨지고 영이 살아납니다.
깨달아 질 떼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날마다 내 육은 깨지고, 영이 새롭게 살아나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입니다.
2) 또 하나의 반응은, 마음에 찔려올 때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4절)
스데반이 전할 때나, 베드로가 설교할 때 똑같이 마음에 찔려왔습니다.
똑같이 마음에 영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다릅니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고 거부하며 마음을 닫았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느냐? 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찔리니,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이를 갈면서 귀를 막았습니다.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감정으로 들었습니다.
두고 보자 (요씨) 가만 안 둔다. 모두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사단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들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받는 마음의 자세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 하느니라.(살전2:13)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믿는 사람속에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어떻게 받습니까?
머리입니까? 가슴입니까?
행17:11에 베레아 사람들처럼 그런가 하여 말씀을 상고하니, 믿는 사람중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아서 영육이 강건하시길 축복합니다.
3, 주님과 함께한 스데반의 영성을 보세요.
1)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55-60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
우리는 늘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 것으로 복잡한가요?
염려 근심이 많은가요? 갈등이 많은가요?
성령이 내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기도하세요.
성령이 마음을 지배할 때, 육적인 소욕을 이기게 되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2) 스데반은 주님이 보좌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열리는 역사가 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영안이 열립니다.(육안, 지안, 영안)
하늘만 열린 게 아닙니다.
열린 하늘을 보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던 주님이 스데반이 순교에 이를 때, 일어나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계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스데반이 순교를 당 하면서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다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 어떻게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편보좌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고 순교하면서 드린 마지막 기도를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돌을 던지고 죽이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마지막 드렸던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눅23:34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런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릴 때 가능한 용서입니다.
우리 의지로만 용서하려고 하면 병이 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전재선이를 양자로 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내 힘만 가지고 안 됩니다.
주님이 용서의 마음을 주시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누군가와 풀지 못하고 매인 것이 있습니까?
용서의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3) 스데반은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11:2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니라.
(마11:2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명까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스데반도 이를 갈며 귀를 막고 돌로 칠 때,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주님 손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했고,
잠16: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벧전5:7에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무거운 짐도, 행사도, 염려하는 일들도 주님 손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맡긴 것만큼 책임져 주십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날마다 이기고 승리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