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행5:1-11.
제 목: 성령을 속일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3) But Peter said, Ananias, why hath Satan filled heart to the Holy Ghost, and to keep back part of the price of the land? (Act5:3)
성경에는 세 가지 영적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의 영혼입니다.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 존재하며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은 많이 아시는 사건일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나니아의 뜻은 ‘하나님은 자비롭다’(God is merciful), 아람어로 삽비라의 이름 뜻은 ‘아름답다’(beautiful)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자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 본문에 충격적인 사건은, 은혜를 받고 집을 팔아 드리기로 해놓고 일부분을 숨겼다가 그저 벌 받고, 매 몇 대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부가 죽어버린 사건입니다.
이 사람들이 헌금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내려다가 인간인지라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떼어 놓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세 시간 간격으로 부부가 그대로 죽었습니다.
이 본문이야말로 많은 설교자들 또는 부흥사들에 의해 가장 악용된 본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봐라. 헌금을 제대로 안 하면 죽는다. 그러니까 제대로 헌금하라.’ 고 위협하는 설교본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에서 이 사건이 갖는 위치는, 단순히 헌금을 내고, 안 내고 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그냥 빨리 읽으면 헌금을 제대로 안 내서 죽었다는 사고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헌금과 관련된 사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가장 처음 만드신 공동체가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죄가 들어와서 에덴동산이 파괴되는데, 그 원인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다시 신약으로 와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인 첫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교회는 정말 놀랍고 황홀한(fantastic) 공동체였습니다.
위로부터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방언을 하는데, 그것도 외국에서 온 이곳저곳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해서 부족한 사람이 없고,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구분 없이 서로 다 나누어 쓰는 놀라운 공동체였습니다.
4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족 사람’ 요셉이 있는데, 별명인 바나바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성령충만함을 받고,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에 큰 감동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당연히 그 영광을 드러낸 사람도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성도들로부터 받는 칭송과 존경과 사랑에 대해 질투가 생겨났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1-2절)
헌금을 한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족한 지체들을 돕기 위해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된 동기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 보니까, 원래부터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까운 생각이 든 겁니다.
‘바나바가 낸 것보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고 생각했던 것 갔습니다.
다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바나바처럼, 자기들도 가진 것 전부 다 낸 것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사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죄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사탄은 결코 큰 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겁니다.
큰 거짓말이 아니라, 작은 거짓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결코 엉터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엉망이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유혹이 오면 누가 못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교묘합니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아나니아의 사건은 물질문제가 아니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영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과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거짓된 인생으로 추락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과 변명으로, 타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지만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의 이름의 뜻이 바로 ‘거짓말 하는 자’ 입니다.
처음에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꼬이던 때부터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안 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쓸 데 없는 거짓말을 섞어서 농담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의 뿌리가 마귀요.
거짓은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저도 그동안 설교를 솔직히 피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중에 놀라운 신앙의 본질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무엇을 드리고 안 드리고 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믿음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이런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모든 것을 움직여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거짓말 한 것인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 였 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람관계 인 것 같으나, 하나님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고, 신앙을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마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헌신을 결단하고 소유를 팔아 헌신하기로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서 결단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1절)
아마 초대교회에 가장 거부로 나타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큰 불행에 빠졌습니다.
성령이 주신 감동을 소멸하고 하나님께 거짓된 행동이 큰 충격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신앙은 세 가지 감동이 옵니다.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다가, 삶 속에 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오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유혹의 마음입니다.
첫 번째 감동이 올 때 마음을 뒤집어 놓습니다.
세 번째 마음은, 첫 째와 두 번째 온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합니다. (감동=> 부정 => 타협)
첫 번째 마음을 붙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 사탄의 생각에서, 영육의 갈등을 하면서 이럴 때 인간적인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성도에게 첫 번째 오는 마음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첫 번째 오는 감동을 따를 때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돼, 이런 짓 하면 안 돼, ..........
그것을 따라가면 안 된다면 절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그러면, 아나니아 부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헌신을 약속했고, 믿음을 약속했습니다.(2-3절)
1) 거짓이 문제였습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2절)
아나니아의 잘못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짓입니다.
헌신의 약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드리느냐? 안 드리느냐? 적게 드렸느냐? 많이 드렸냐? 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하는 본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느냐?
이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의 감동을 받고,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 약해져서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감추면 안 됩니다.
감추는 것은 신앙적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 믿음이 약해졌어요. 있는 그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제 신앙이 약해져서 일부만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럴 때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감추매” 라고 하는 게 문제가 되고, 또 하나는, “아내도 알더라.”거짓말을 하는데 공범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에 공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담도 하와와 공범이 되어서 선악과를 따 먹고 쫓겨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거짓된 행위에 공범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부부는 한쪽이 믿음이 약해져서 신앙 없는 행동을 할 때, 당신답지 않게 왜 어리석게 살려고 하느냐?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깨우쳐 주는 게 지혜로운 아내요. 지혜로운 남편입니다.
지혜로운 부부는 은쟁반의 금 사과 같다고 했습니다.(잠25:11)
이것이 믿음이요, 함께 사는 길입니다.
2)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3절)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속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느냐?
사탄이 아나니아 부부의 마음에 들어가 감출 수 있다는 거짓된 마음을 넣었다는 말입니다.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마음을 사단이 넣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거짓의 출발은 사탄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요8:44)
있는 그대로 말했으면 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텐데 왜 감췄을까?
초대교회에 가장 큰 갑부로 귀하게 쓰임 받았을 텐데.....
그 속에 진리가 없기에 거짓된 영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짓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짓은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왜 아간이 망했습니까?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무너트렸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아이성 앞에서 전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그곳에서 전리품을 탈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장막 뒤에 전쟁에서 탈취한 것을 숨겼습니다.
아간의 범죄로 여호수아 군대는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작은 아이성 앞에서 전쟁에 패했습니다.(수7;24-26)
12지파를 확인했더니 유다지파에 속한 아간이었습니다.
적이 멀리 있는 것 아닙니다. 아간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아간을 죽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왜! 사울이 망했나요? 거짓 때문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에서 이겼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짐승을 왕궁 뜰에다 감췄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사울을 이때부터 버리셨습니다.
거짓은 마귀에게 속는 일이요, 하나님과의 은혜와 축복이 막히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 할 수 있습니다. 실수 할 수도 있습니다.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감추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있는 대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십일조를 적당히 드리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를 기도해 보세요.
기도하면 응답하십니다.
신실한 약속 그 약속을 놓치지 마세요.
기도하면 해 주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일 년을 결산해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아나니아 부부는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하나님이 감동한 것을 소멸하고 거짓으로 포장할 때,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은 우연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릇을 키우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시간이 많고, 소유가 많고, 여유로 와서 헌신하는 것 아닙니다.
깨닫고 보면 성령이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주신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인간적인 생각을 할 때, 사단이 마음을 점령했습니다.
사단이 점령 할 때 마음이 황폐해졌습니다.
사단의 속성은 파괴자입니다.
은혜를 파괴하고 축복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항상 성령과 동행해야 하며 성령의 감동을 민감하게 따라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본 사건은 사람관계나 물질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할 일이 없는 (백수가 되어야 주의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텔렌트 정영숙 권사님은 간증시간에 자투리 시간, 화장실 갈 때도 성경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지에 시간이 많아 가는게 아니고 시간을 쪼개어 봉사한답니다.
내가 여유가 있어 헌신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첫 번째 주신 마음이라 했습니다.
사단의 유혹이 많이 있었지만 단호하게 물리치고 사역을 하고 있답니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민감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할 때 사단이 점령했습니다.
2.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베드로의 탄식입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4절)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다는 마음은 어리석은 인간의 현 주소입니다.
어떻게든 사람의 눈만 적당히 숨기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듣고 계시고, 나를 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언어와,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바로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한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기도하세요. 이것이 코람데오 신앙입니다.
인생은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것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 보는 것 같으나 다 보고 계시고,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계십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도 내 손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억울하고 분하여 더 이상 억울함을 이기지 못 할 때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대신 손을 대 주시고, 원수도 갚아 주십니다.
2) 시험에 빠진 자에게 동조하지 마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절)
베드로의 탄식입니다. 거짓을 함께 동조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1) 함께 할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은혜는 함께 해야 합니다. 기도도 함께, 믿음도 함께, 칭찬도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랑도 함께. 감사도 함께. 협력도 함께. 주의 일도 함께 해야 합니다.
(2) 반면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죄는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범이 됩니다.
불평하는 일도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염이 됩니다.
시험에 빠진 자와 함께하지 말아야 합니다.- 같이 시험에 전염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나니아 부부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 관계의 문제도 아닙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함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거짓된 인생으로 추락합니다.
거짓은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과 변명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베드로에게 한 말인데 성령을 속였고,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람관계 같으나 하나님 관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정직한 기도, 정직한 예배, 헌신 감사, 구제(선교)을 하세요.
주님의 보혈은 기억도 없이 지워 주십니다.
흰옷을 입은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진 자들입니다.
셀 수 없는 흰무리가 누구냐 물을 때 어린양의 보혈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