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질했으나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요 21:3). 이때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어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광경은 3년 전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시던 때와 아주 흡사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도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 주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았었습니다 (눅 5:1-11).
이러한 정황을 배경으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본문 15절) 라고 베드로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아침에 사도인 베드로를 만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어부로 돌아간 어부 시몬을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식사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에 대해 대답합니다.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동일한 질문을 세번씩이나 물으셨을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 주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베드로로부터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진정한 고백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실까요?
1.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첫 번째 질문: 본문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특심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왕상 19:10).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함은 물론 맹세하며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새벽닭이 울 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6:69-75).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습니다 (롬 5:20-21). 사도바울은 원래 “희망”이란 뜻의 사울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난후 이름을 “작은 자”의 뜻인 바울이라 바꿨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요, 만물의 찌꺼기 같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딤전 1:13-15). 결국 주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첫 질문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의 분량이 누구보다도 크다고 너는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죄인됨을 더 깊이 깨닫고, 이 엄청난 죄악을 용서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시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가슴 깊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두 번째 질문: 본문 16절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가 전부였습니다. “네가 능력이 있느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길 것이냐?”, “성심성의껏 일하겠느냐?” 등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내가 너를 아가파오한 것 같이 네가 나를 아가파오하느냐?”란 질문입니다. 주님은 아무 조건이나 제한없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 내놓았습니다. 이는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신 첫번째 사랑입니다 (요한 1서 4:19).
그러나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조건없이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마 20:21). 이처럼 우리 사람들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조건적입니다. 의심과 좌절, 분노와 원망을 남기는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혹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이나 신앙생활을 우리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교회다니는 이유가 비지니스를 위해서... 또는 생활의 필요를 위해서... 등등.
다윗은 전심으로,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며 찬양드림이 그의 생애의 목적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전재산과 자녀들이 한날에 다 날라갔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함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욥 1:21).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으면서도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2:10).
3. 마지막으로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마음이 상할 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주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본문 17절) 베드로는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hurt 뤼페오) (본문 17절). 그 질문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던 사실을 상기시켜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다시 어부로 돌아간 원인을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던 확고하지 못한 신앙 때문이라 보시고 그것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안 ‘숯불’ 곁에서 주님을 부인했던(요 18:18) 그에게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 ‘숯불’ 곁에서(요 21:9) '사랑'을 다짐시키고 계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비록 용서받은 것일지라도 참회자의 슬픔을 다시금 불러 일으키게 해줍니다. 또 그 질문은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앞날의 잘못을 그리스도께서 예견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낳게도 합니다. 때문에 그는 “주여 그러하외다” 라고 확실히 답하지 못하고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라고 답변했습니다. 비록 주님을 사랑함에 실수와 실패가 많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음을 그는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신있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지만, 그리하여 “이제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순간순간 발견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뜻대로, 우리 정욕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시간 우리 모두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와 같은 주님의 세번의 질문에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3번이나(15, 16, 17절)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3년 전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들은 베드로로 하여금 그의 사도직에 대한 사명을 재확인케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직무로의 복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언제든지 예수님을 사랑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웃들을 구원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되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십시다. 전심으로 사랑하십시다. 설령 마음이 상처를 입더라도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우리 모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주님의 질문에,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