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시139:1-10
제목: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김경열 목사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 하리이까. (시139:7)
Whither shall I go from thy spirit? or whither shall I flee from thy presence?(Psalms139:7)
요즘은 CCTV가 범죄의 현장을 너무 잘 잡아냅니다.
우리도 모르는 곳에 카메라가 설치 돼 있고, 어디선가는 녹음장치가 되어
있어서 변명도 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바르게 살지 않으면 큰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아들이 과수원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잘 익은 사과를 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누가 있는가, 망을 보라고 하고는 과수원에 들어가서 사과서리를 하는데, 아들이‘아빠 누가 봐요’놀래서
뛰어 나왔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우리 교회선생님이 그러시는데 하나님은 어디서나 다 보고 있다고 하셨어요 하더랍니다. 맞습니다. 이 아이의 말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짓고 잘못사는 것이 하나님 임재의식의 망각 때문입니다.
사람이 옆에서 다 보고 있다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
어두운데서 못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문화일수록 밤 문화가 화려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범죄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왔던 성경 말씀도 롬13:11-14절 말씀을 읽다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씀에 삶의 변화를 받아, 기독교 역사의 한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사는 비결은 항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했는데, 다시스로 가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에 숨을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 ‘코람데오’ 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라는 말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임재의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마다 나타나셔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직장을 잃고, 집을 빼앗기면서도 믿음을 지킨 것도 내가 알고 있고, 네가 주님을 배반하고 니골라당을 따른 것도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
잘한 것도 아시고, 잘못한 것도 아십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갖고 살 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사건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삼하11:)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겁탈했는데 하필이면 임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숨기려고 전쟁터에 있는 남편 우리아를 불러다가 잠을 재우려고 했더니, 충신 우리아는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찌 편하게 아내와 잠이나 자고 있겠는가.? 뜰에서 잠을 자고 다시 전쟁터로 나간 충신이었습니다.
이런 충신을 다윗왕은 자기 죄를 숨기려고 전쟁터 맨 앞에서 싸우도록 편지를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제는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속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왕이여 이 나라에 이런 자가 있습니다. 일 백마리 양을 가진 부자가, 한 마리 양을 아끼며 키우고 있는데 손님이 오니 그토록 아끼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손님대접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왕은 화를 내면서 당장 그를 잡아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나단선지자는“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우리아의 아내가 바로 한 마리 양입니다.” 당신은 은밀한 중에 행하였으나, 당신의 여인들은 백주에 발가벗겨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삼하12:)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이 내릴 죄 값에 대해서 선고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죄 값으로, 자식을 낳았는데 병이 들었습니다.
금식을 하며 기도했지만 죽었고, 가장 믿었던 신하가 반기를 들었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해서 맨발로 왕궁을 빠져 나가는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침상이 젖도록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손발이 죄를 지었는데 내 지체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51:10에 하나님이여 내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고백한 시입니다.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곳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눈이 항상 보고 있음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7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나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어디서나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면서 바르게 사는 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1. 무엇보다,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2-3절)
1)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나의 생각을 아시며. 나의 가는 길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신다.(3)‘ 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난날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계심을 체험했습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한두 번 잘못할 때 경고를 하십니다. 마음에서 깨닫게도 하시고, 기도할 때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도 행동에서 돌이키지 않고, 반복된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손을 대십니다.
물질을 거둬 가시기도 하고, 건강을 치시기도 하고, 자녀를 치시기도 하고, 앞길을 막으시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숨긴 후, 자식이 죽었고, 신하가 배신을 헸습니다.
아들까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눈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를 숨겼으나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을 깨닫고 이제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못을 박으면 빼고 나도,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용서는 받았지만 다윗의 생애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있습니다.
마1:6에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남의 아내에게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처럼 흐트러진 마음이 아니라, 낮 에와 같이 자신을 단정하게 하는 경건한 행동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2.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4절)
다윗은 시139:4에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
은밀한 중에 하는 말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속으로 하는 말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말의 뿌리는 생각이고 생각의 뿌리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1) 혀에 3가지를 조심하라.(약3:3-8) 고 했습니다.
특히 야고보는 혀에 대한 교훈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① 길들일 수 없는 것이 혀다.(약3:7-8)고 했습니다.
지난번 TV에서 호랑이, 사자 같은 맹수들이 어린아이와 함께 노는 모습이 보았습니다.
사자의 목덜미를 어린 아이가 끌어안고, 사자 등허리에 타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슬렁 어슬렁 걸어갑니다. 모두가 조련사에 의해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짐승이나 벌레나 하물며 물고기까지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길들여지지 않는 지체가 사람의 혀라고 했습니다.
혀는 아주 작은 지체입니다. 굉장히 작은 지체인데 이 지체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혀가 행복을 만들기도 하고 불행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혀가 용기와 희망을 줄 수도 있고, 절망에 늪으로 빠뜨릴 수도 있고. 혀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무서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혀가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까?
- 유고슬로바키아의 작은 시골 천주교에서 미사를 신부가 집례를 준비하는데 어린 한 소년이 성찬 예식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실수를 해서 성찬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신부가 이 소년의 뺨을 때리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시는 이 제단 앞으로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성전을 쫒겨났고 그 말대로 영원히 제단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소년이 장성해서 훗날에 공산주의 지도자인 알칸 반도를 지배한
유고슬로바키아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티토는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로인해 기독교 국가였던 지금의
크로아티아는 기독교가 황폐하게 무너지고 5%도 안 됩니다. 그토록 번성하던 기독교 국가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티토는 신부의 말대로 제단 앞에서 쫒겨나 하나님을 비웃고 조소하고 또 핍박하는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작은 혀끝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상대의 말로인해 받은 상처가 많겠지만, 나로 인해 준 상처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② 또한, 야고보는 혀를 배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약3:4절) 큰 광풍에 밀려가는 배가 지극히 작은 키에 의해서 방향을 정하고 물결을 헤쳐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 또한, 혀를 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약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작은 불씨가 온 세상을 태우는 것과 같이 우리의 혀도 작은 지체인데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인생의 삶을 불 사르는 삶을 황폐하게 파괴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혀는 잘 사용하면 모두를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잘못 사용하면 나도 망하고 남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21:23에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환란에서 보존하느니라. 사람이 내 입술에서 몇 초 동안에 내 뱉는 말이 가슴속에 30년간 지워지지 않고 남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손에 의한 폭력보다 말에 의해서 받는 폭력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말에서 주는 상처가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은 칼보다 무서운 지체입니다. 우리가 칼에 찔린 상처는 다시 꿰매면 치료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말에 의한 상처는 아주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고 아물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력 있는 이 말을 회복해야 됩니다.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듯이 말에도 아름다운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음식에 맛이 있듯이 우리의 언어에도 맛이 있는 언어가 있습니다.
우주 만물에는 조화가 있듯이 말에도 조화가 있습니다. 절망을 주는 말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7절)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8절에 하늘에도 계시고 스올에도 계십니다.
10절에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의 손이 붙들어 주십니다.
주의 손이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영혼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생명도, 가정도, 건강도, 생업도 붙들어 주십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917-963-9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