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이 희망을 만듭니다
본문 : 빌립보서 1:3-11
한 사람의 변화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큽니다. 한 사람의 위치가 그 만큼 중요 합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뒤를 잇는 행렬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바로 서면 뒤를 잇는 행렬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한 사람의 뒤엉킨 인생이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메시아 됨을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은 조용 합니다.바울의 눈에 띄기만 하면 오해 받기 십상입니다. 아예 그 사람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외로운 사람입니다.
복음은 소문난 훼방꾼 악랄한 폭행자 바울을 바꿔 놓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을 파괴하던 자가 복음에 의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사람이 익숙해진 성품이나 성격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은 가능합니다. 어떤 기질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달라집니다. 변화 됩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바로 서니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나요.. 바울의 복음 전파는 그 시대에 많은 가치와 관심의 대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빌립보 교회 입니다. 복음이 흘러 들어가면서 빌립보 교회는 달라졌습니다.
복음이 제대로 증거되기 전에는 냉랭하게 썰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복음이 흘러 들어가면서 빌립보 교회 공동체는 그 시대의 희망 공동체로 변모해 갑니다.
첫째, 복음은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 합니다
5절에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 교회 사람들은 바울이라는 영적 가이드를 만납니다. 바울을 통해서 삶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
복음의 위력이 삶을 새롭게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이란 복음 전파를 의미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일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당시 주변에 얼어붙은 영혼, 죽은 영혼, 절망 가운데 사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절망으로 온통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살아있는 영혼으로 변화 됩니다.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가 입술을 열어 복음을 듣게 합니다. 누군가 복음을 들으려면 전하는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에 듣는 이들이 듣고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복음을 말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 입니다 .
바울이 걸어가는 길을 빌립보 교회가 따라 갑니다.
예수 방향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 갑니다 .
복음을 위한 일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까지 소문이 들려 옵니다.
바울을 위해 중보 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했던 자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감옥에 갇혀 있는 자를 향해 눈물로 기도 합니다 .바울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조차도 전율을 느낌니다.
세상은 강박 합니다. 세상은 생명을 함부로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소통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격려와 위로가 넘쳐 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으로 무수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강한자가 약한자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살상 무기로 공격을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권력을 앞세운 잘못된 결정이 아픔과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 안에 예수 복음이 없으면 인간적 판단이 앞서게 됩니다. 거기에 따르는 부인할 수 없는 결과는 동일 합니다. 생명이 함부로 약탈 당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생명을 함부로 여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결정입니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갈 2:5에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면 세상은 자기 멋대로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내 안에 항상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에 현명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무상으로 죄인을 위해 베풀어 주신 자기 희생입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를 향해 영적 숙제를 제시 합니다. 6절 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복음의 지속성을 강조 합니다. 가장 귀한 복음을 전하고 전파하는 일에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고 강조 합니다.
둘째, 복음의 공공선인 이웃 사랑을 점점 더 풍성케 하라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라 고 제안을 합니다.
너희 사랑을 풍성케 하라.
사랑보다 상처를 더 많이 주고 받는 오늘날 입니다.
세상의 패러다임은 철저한 자기 방식과 자기 중심적인 삶을 강조 합니다. 복음의 패러다임은 공동체 의식입니다. 자기를 뛰어 넘어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복음이 원하는 삶의 방식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나 만을 위한 신앙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 곧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나를 뛰어 넘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공선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 바울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라 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익숙해 있는 사랑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 사람은 질책하면서 키워 갈려고 합니다. 사랑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잔소리로 들려 집니다.
바울이 이웃에게 보여주는 성숙한 사랑은 지적보다는 격려와 배려 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가치와 자유 보다는 내 손안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아가페 사랑은 연습이 필요 합니다 .인내가 필요 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세요. 사랑의 핵심은 용서 입니다. 우리는 용서가 어려워요 .. 지적해야 성이 풀려요..예수님은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 주기 위해 용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베드로가 즉각 일곱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됩니까?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합니다. 그 정도 연습을 하라고 말씀 합니다.
내 기준에서 바로 바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관계를 맺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웃들에게 자신을 종의 마음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높이는 태도 입니다 .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 하는 것입니다.
개인 간에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불법을 요청하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은 정의라는 단어로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정의는 공동체 속에서 예수의 용서를 실천 합니다. 예수의 성품을 닮아 이웃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
사회 생활 속에서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무라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용서할 줄 아는 관용과 너그러움을 가질 때에 공동체는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도 모른척 하고 지나 갑니다.
하지만 사랑이 넘쳐나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시간을 드립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웃을 향한 가치를 존중해 주는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겁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겁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는 바로 사랑의 열매 입니다.
사랑은 철저한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에서 실천하는 겁니다 . 복음의 공공선이 중요한 이유는 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예수 믿고 잘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공동체적 의식을 갖고 나와 너 에서 우리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 제시하는 의의 열매 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 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광야에서 허덕이는 이웃이 많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나에게서 떠나 이웃을 향한 시선이 넓어져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메마르면 관심이 사라집니다. 사랑이 풍성하면 관심은 풍성해 집니다 . 복음의 공동체 의식은 이웃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소원 합니다.
벧전 4:8에 무엇보다도 사랑을 계속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무장되면 복음이 나를 사랑에 대해 날카롭게 합니다. 사랑이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알기에 실천 합니다.
마지막,오직 복음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라
10절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교회는 한 개인이 아닌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빌 1:4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말씀 합니다. 여기 무리라 함은 여러 사람들.. 공동체를 의미 합니다.
무리들이 때로는 갈등과 의심에 사로잡혀 딴 길로 갈 수 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거기엔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어려움에 직면하고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의심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의심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긴다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과 의심은 신앙인에게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과 갈등이 복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의심의 지팡이를 짚어 가면서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
빌립보 교회도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되었던 교회 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내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철저한 복음에 초점을 두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겁니다. 빌 3;15-16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로 신앙이란 오직 복음만이 구원을 이루는 길임을 다시금 확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철저한 자기 중심에 머물게 됩니다. 자기 논리 속에 빠져 살 기 쉽습니다. 자기를 변명합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테두리를 침니다.
복음은 갈등을 우회하거나 혹은 극복하거나 조절하는 법을 알게 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 희망이라곤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걱정할 뿐입니다. 바울에게서는 그런 불안한 감정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소위 감옥안에서도 쾌활한 죄수 로서 지금을 삽니다. 감옥 안에서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신앙의 상태는 복합적입니다.
믿음이 강한 것처럼 느낄때도 있지만 의심과 두려움도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
베드로도 주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고백 합니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주님은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 위로 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로 다시 부르십니다.
복음이 희망인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 놓았습니다.
복음을 따라가는 행렬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사라, 베드로 그리고 바울 모두가 달라진 인생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으로 인해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글은 실수와 불신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들의 삶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복음은 삶을 촉진 시킵니다. 복음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코로나 광야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
광야의 시간은 불안을 가중 시킵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광야가 주는 불안이 뭔가요?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일까? 불안케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복음은 얼어붙은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
지금 우리가 지녀야 할 영적 태도는 복음의 확신 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막혀진 곳을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뚫고 가게 할 것입니다 .
코로나 광야를 뚫고 앞으로 전진해 갈 수 있는 힘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파워는 변화 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바꿉니다. 복음은 세상을 바꿉니다. 영원을 바꿉니다. 세상의 길을 바꿉니다.
복음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무엇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암담케 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절망하게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 합니다. 복음은 내 안에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제공 합니다
복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라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백성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 보라.
골리앗앞에 모두 절망뿐이었습니다. 다윗이 복음에 근거한 외침이 주눅들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 합니다. 아무리 두렵게 하는 이 시대의 골리앗 조차도 복음에 굳게 서는 겁니다.
바울이 간수에게 희망의 복음을 증거 합니다.
지금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닫혀진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 하겠다고 합니다.
복음이 희망입니다 .
복음이 내 안에 충만하게 하십시오. 복음은 직면한 현실 속에서 분별력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허물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경주 속에서 가나안으로 점점 다가 가는 앞으로의 시간이 되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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