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살전 1:3-8
제 목 : 소문이 잘 나야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 함이니 (살전1:3) Remembering without ceasing your work of faith, and labour of love, and patience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in the sight of God and our Father, (1 Thessalonians 1:3)
그리스 철학자 아르스토 탤래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있어도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 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이웃과 이웃이 모여서 사회라고 하는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야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항상 말이 있게 마련이고, 그 말이 퍼져나가는 것을 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무성한 소문들이 많은데 들리는 소리마다 어두운 소문이 너무 많습니다.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보다는 비관적인 이야기가 훨씬 많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에 힘들어 하는 소리를 많이 들립니다.
요즘 소문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모든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한번 나쁜 사람이 되면 회복하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가짜 뉴스들은 얼마나 많은지 악성댓글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자살: 한국 하루평균37.5명,1년에 1만3670명,40분1명)
사람은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소문이 잘 나야 인격적인 신뢰감을 얻게 되고 또 인생을 성공하게 됩니다.
요즘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 연예인들이 부끄러운 소문 때문에 패가망신하며 추풍낙엽처럼 추락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미투 운동)
어렵게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하고, 또 종교지도자들도 나쁜 소문 때문에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문은 그 사람의 신용도라든지, 또 그 사람의 진실성이 소문이 날 때 무너지지 않는 기초가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교회들이 안 좋은 소식이 너무 많은 것이 부끄럽고 속상합니다.
원수 마귀들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데 (벧전5:8) 이럴수록
교회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했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들을 염려 한다는데 염치가 없고 부끄럽습니다.
좋은 소문이 잘 나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성도들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좋은 소문이 엄청난 브렌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같이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잘못된 소문만 믿고 우수광스런 일은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소개되는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당시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또한 각처에 좋은 소문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좋은 소문이 많으니 관심이 있게 되고, 전도의 문이 열리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면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7절)
모든 믿는 자에게 모범이 된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고 칭찬을 받는 것은 큰 행복이며 축복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칭찬을 받으며 자라는 것이 축복입니다.
학생은 스승의 칭찬을 받아야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주의 종의 간증 대상이 되어야 하고, 주의 종은 성도의 자랑거리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마다 간증거리가 되었고, 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나, 교회나, 사회나, 나라나, 좋은 소문만 퍼지는 그런 세상
되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눅5:15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널리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모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소문이 전해질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 같이, 교회는 은혜스러운 좋은 소문이 전해질 때, 하나님의 역사도 함께 동반하게 됩니다.
교회도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 말씀이 좋은 교회, 성령이 충만 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 고 소문이 날 때 부흥이 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런 소문을 본받고 싶습니다.
1.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8절)
주의 말씀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고했습니다.(8절)
1) 신앙은 오직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에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믿음이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히11:6)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사는 교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순종도 하고, 헌신도 충성도 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안고 올 때에 믿음을 먼저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내가 믿나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병 고침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8:5~13)
맹인들이 예수께 나사렛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 예수께서 내가 능히 이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리하외다 하니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이 밝아진지라. (마9:27~29)
히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엄청난 믿음 좋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이 모두 믿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들입니다.
수많은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많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은
유일한 방법이 믿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려놓고 믿음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믿음대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질병, 자녀, 영적문제 등)
전도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고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믿기 때문에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라고 했고, 예수님도 네 믿음대로 되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이 믿음의 렌즈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옳은 믿음을 가지면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으로 인생관이 바뀝니다.
절망하며 환경을 보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소망과 희망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어려운 역경에 처했어도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가는 데살로니가 교회 이런 믿음의 역사가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가만히 앉아서 일어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도 날아가는 새를 보라고 했지, 졸고 있는 새를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돌문을 열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왜 돌문을 마리아에게 열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돌문을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고 그 속에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만들어 가십니다.
그 시대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들이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2)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교회였습니다.(5절)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5절)
말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 동반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행동화된 믿음을 야고보 기자는 산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건물을 지을 때, 설계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가 건물을 완성하는 능력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계도를 들고 다닌다고 집이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를 마음속으로 간다 간다 하면서 가지 않는 행위는 믿음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가 아니라 믿은 바를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 믿음의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갈라지고 건넌 것이 아니라 갈라질 것을 믿고 내 디딜 때에 갈라졌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행동화 된 믿음이었습니다.
전에 건물에 1층에서 불이 난적이 있었습니다. 불이 나니까 옥상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순식간에 불길이 밑에서는 치솟아 올라가니까 당황하고 무서워 소리믈 지릅니다.
이때 소방 구조대원들이 그물을 쳐놓고 빨리 뛰어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만 뛰어 내려 살고, 그러나 몇 사람은 기회를 놓쳐
죽고 말았습니다.
나를 살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성도들 하나님을 잘 압니다.
그런데 믿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분들을 많이 봅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은 것에 행동이 동반될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정검해 보세요. 어떠합니까?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막상 문제 앞에 놓이면 전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안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행동화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뛰어내릴 때 하나님의 역사는 동반하게 됩니다.
2.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3절)
믿음의 역사뿐 아니라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3절)
이 세상에서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핵심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전부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요한1서4:8절)
1)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을 말합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수고가 뒤를 따르는 사랑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5절)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수고는 지치고 힘이 든 것이 아니라 행복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키우면서 수고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하니 힘든 일도 고통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9남매를 낳아 기르셨습니다.
어머니 19살 때 결혼해서 2. 3년마다 아이를 23년간을 낳았습니다.
긴 세월동안 아이 낳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습니까?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머리에 이고 세참이나 점심을 만들어 밭으로 나르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나는 등에 업고, 한손에 또 다른 아이 손잡고, 뱃속엔 또 아이를 임신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다 교육시키고 시집, 장가보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한 번도 힘들어 하는 생각을 느끼거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들 자라는 모습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기쁘고 즐겁더라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가 노동이 아니고,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한 봉사가 아닌 희생이었습니다.
가시고기처럼 다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자기 엄마를 소개를 하는데 코가 문 들어지고, 눈이 찌그러지고 귀가 없고 얼굴이 이글어졌습니다.
‘우리 엄마야’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우리 엄마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식사를 차려주는데 비유가 약해 못 먹겠드라고요.
그래서 배가 안 고프다고 핑계하고 한 숟가락도 먹지 못 했어요.
친구가 어렸을 때에는 자기 엄마가 제일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를 입학 했더니 아이들이 야! 너희 엄마는 왜 코가 없냐?
너희 엄마는 눈이 찌그러졌냐? 왜 너희 얼굴이 탔니? 귀가 없니?
이러면서 조롱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울면서 엄마는 왜 귀가 없어 눈이 찌그러졌어. 나 엄마 안 할래 라고 울었더니, 이 엄마가 자기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때서야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 너희 엄마가 못생겨서 내가 미안하다. 너 가 어렸을 때에 재워놓고 밭일을 갔는데 우리 집에 불이 났었단다. 불길이 타는데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끄겠다고 모여왔지만. 그 속에 아이가 있다고 외쳐도 한사람도 불길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단다.
이 엄마가 불이 활활 타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불속에서 이불로 너를 싸가지고 나오다가 엄마 얼굴이 다 타버린 거란다.
그 이후 너희 아빠도 우리를 버리고 다른 데로 나가셨고. 네가 온전하므로 내가 이런 화상을 입은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고 했답니다.
이야기가 어린 친구 가슴에 못이 박히듯 박힌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엄마가 최고로 훌륭하고, 최고 미인이라고 자신
있게 누구를 만나도 소개를 한답니다.
아주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아이였어요. 진정한 사랑은 수고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60이 넘은 부인이 찾아와 결혼생활 거의 40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목사님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하며 통곡을 하며 울고 있었어요.
실컷 울었다 싶어 뭐가 그렇게 억울한가요?
나는 40여 년간 남편 뒤치닥거리하고, 자식새끼 낳아주고, 살림해주고, 시집 장가보내고, 지금 남은 것은 주름살 밖에는 아무것도 없데요.
난 인생을 너무 억울하게 살아서 분하고 후회스럽다며 또 우는거예요.
그래서 진짜 자매님은 억울하게 사셨네요.
수고를 했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수고였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40년 동안 가정부 생활을 해도 수억은 벌었을 텐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쭈굴 쭈굴 주름만 늙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수고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이요,
즐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헌신하며 수고하는 그 자체는 인생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누구를 이렇게 사랑해야 되는가요?
2)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요1서 4:9절)
이 사랑을 경험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의 이름 한 마디만 모른다고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해도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의 매어달리기도 하고, 화형에 처함을 받은 그런 환난 중에도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습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은 86세에 아우텔리우스 황제 때 순교했습니다.
황제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은 폴리갑에게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는 한마디만 하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네가 끝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면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할 때,‘나를 불에 태우라.’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서 나를 태워 순교의 길 가게 하라고 고함을 질렀답니다.
내 입에서 더러운 말이 나오기 전에 나를 화형 시키시오 하면서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 사랑합니까?
3. 고난 속에서도 소망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3절)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이 많았음을 보여줍니다.(6절)
이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했다는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다른 교회들까지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고난이 많으면 소문이 안 좋게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즘에는 없는 말까지 만들어 내는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는 안중에도 없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일단 터트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소망을 놓치지 않았습니까?
1)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5-6절)
오늘 본문에서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이란 말씀을 주목하세요.
성령이 충만할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소망이 끊이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5-6절)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사로잡혀야 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람이 담대해집니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할 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이 있었습니다. 담력과 배짱은 다릅니다.
배짱 좋은 베드로도 막상 죽음의 문턱에 놓이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돌아섰습니다.
신앙은 배짱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담력입니다.
성령이 충만 할 때에 가치관이나,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할 때, 예배드리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한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더 이상 하나님이 멀리 계신분이 아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보혜사성령님이 내주내재하시며 임마누엘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더 중히 여기는 마음이 은혜 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요, 사랑이 넘치는 교회,
그리스도를 대한 소망에 인내가 넘치는 교회라고 소문이 잘났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성령이 충만함 속에서 영성회복이 이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비결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은 늘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설 때마다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이여 도우소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면, 자신도 모르는 힘이 위로부터 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노력도 한계가 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언제나 푸른 초장에 심겨진 푸른 나무처럼 늘 풍성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습관에 구습을 좆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충만한 영성을 회복해야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성령은 마음에 꿈을 주십니다. 담대함을 주십니다.
성령은 기쁨과 평안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성령 충만할 때 은사가 나타납니다. 영성이 회복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편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소문이 잘나고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주변으로부터 좋은 소문이 나고 있나요?
우리 영안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으로 역사하는 교회, 사랑에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이겨 냄으로 소문이 잘 나는 교회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 영성회복이 속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 져야 좋은 소문이 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안교회가 더욱 부흥되어
예수생명 흘러넘치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