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얕은 묵상 - 느헤미야 5장 14절

Caleb 0 2017.02.11 09:12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 I would like to mention that for the entire twelve years that I was governor of Judah -- from the twentieth until the thirty-second year of the reign of King Artaxerxes -- neither I nor my officials drew on our official food allowance.” (느헤미야 5:14)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사람 중에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서 높은 직위에까지 오른 지혜로운 사람이라 보여 진다. 그는 본국에서 다니러 온 형제 하나니로부터 이스라엘에서 사로잡힘을 면하고 아직 남아 있는 백성들이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면서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귀국하여 훼파된 조국을 다시 일으키는데 쓰임받기를 원하는 기도였을 것이다. 이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왕의 술관원으로 발탁되게 하심으로써 왕의 총애를 받게 하시어 마침내는 특명조서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여 이스라엘 총독이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사흘째 되는 날 밤에 비통한 마음으로 무너진 성 곳곳을 둘러보고 성벽재건을 추진하는데 그야말로 백성들이 한손에는 칼을 들고 한손에는 곡괭이를 들고서 외부 방해세력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성벽 건축에 분투하여 마침내 시작한지 52일 만에 완공하는 엄청난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를 한 줄로 표현하기를, 인근 나라들이 성벽 역사가 끝난 것을 듣고 두려워하고 크게 낙담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조차도 만군이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대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12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총독이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녹봉을 받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백성도 성벽공사뿐 아니라 아직 식민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어 극심한 가난을 호소하며 부르짖는데 총독이라고 꼬박 꼬박 녹봉을 받아 챙기기엔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참 지도자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만나는 느헤미야는 너무나도 멋진 지도자로 부각된다. 단지 녹봉을 안 챙겼다고 훌륭하다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형편을 보아 지도자로서 마땅히 스스로 취할 처신을 아는 지도자라는 점에서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나라 형편이야 어떻든 봉급은 물론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설 퍼런 권력을 죄다 동원하여 부자로부터, 기업으로부터 갹출 금을 요구하여 챙겨 쌓아두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온 국가 지도자들이다. 어려울 때는 허리를 동여 메고 함께 고난을 감수하고, 형통할 때는 온 국민과 함께 기뻐하며 고루 행복이 나누어지도록 나라를 경영하는 지도자이어야 할 터인데, 그렇게 잘 할 줄 알고 뽑아 놓으면 실망을 안겨주고 줄줄이 검찰로 불려가는 것이 우리의 지도자들이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오늘날의 형편과 대비가 되어 성경이 재시해주는 본받아야 할 것과 때로는 본받지 말아야 할 분명한 본보기와 기준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주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다. 읽을 때마다 상황과 처지에 적합하게 이미 전에 읽고 받은바 은혜와 다른 새로운 깨우침과 각성을 안겨주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무언가 보상이 있으면 일하고 그렇지 못하면 내가 미쳤다고 일하냐? 하는 심리가 오늘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는 일반적이고 다반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시대, 그 한 예로 일제 침략을 받고 고통 속에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할 때 우리의 선대들은 희생과 헌신과 더불어 설움과 고통을 나누며 인내하였던 아름다운 역사도 있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는 그런 아름다운 헌신이 사라지고 없을까? 아마도 등 따시고 배부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보신주의와 가급적 고통은 피하고 보상에는 눈이 반짝이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여도, 글로는 번지르르 하게 피력을 하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부끄럽다. 
그렇기에 지도자급도 아닌 나이지만 부단히 말씀으로 나를 비춰보아 고침 받고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 받아 차차 느헤미야의 심장을 가지도록 쳐서 복종시켜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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