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월요일)은 Martin Luther King. Jr. Birthday Observed날(생일은 1월 15일)이다. 이 날은 미국의 국경일로서 공휴일이다. 개인의 생일이 국경일인 것은 초대 대통령 George Washington (Presidents Day는 George Washington의 생일 2월 22일과 Abraham Lincoln의 생일 2월 12일 사이)과 Martin Luther King뿐이다. 미국은 킹목사님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킹목사님은 1968년에 암살 당하였다.
킹목사님은 인도의 간디와 한국의 안창호 선생과 함께 무저항, 비폭력주의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그들은 모두 열악한 환경속에서 자신의 안일을 버리고 형제와 이웃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는 모두 압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디에게는 영국, 킹목사에게는 백인들, 안창호 선생에게는 일본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압박자와 대항하며 한편으로는 자기 동족을 계몽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결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킹목사님은 1963년 비폭력의 워싱턴 대행진을 주도하였다. 그 때 그는 이런 연설을 했다. "백인들을 불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백인의 운명과 흑인의 운명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인의 자유와 흑인의 자유도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어느 한 쪽도 혼자 걸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흑인들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해서 증오의 잔으로 자유를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반항이 아니라 협조,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꿈꾼 것이 아니라 오직 지극히 단순한, 인종을 초월하여 서로를 도와가며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 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킹목사님은 본래부터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골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매우 온순하고 순종적이었지만 모든 일에 소극적이며 자신감이 없는 아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흑인 노예의 역사 등 인종 차별 문제를 가르쳤다. 또한 항상 "네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너는 언제나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명심해라"하고 그의 재능과 온순한 인품을 인정해 주었다. 어머니의 그 말은 소극적이고 온순한 아이에게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고 그는 흑인 사회의 리더가 되어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는 30여 차례나 체포되어 많은 고난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비폭력 운동을 이끌며 수많은 흑인의 인권보장을 이끌어 낸 것은 그의 성품과 재능 인정해 준 어머니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모든 사람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는 지도자로 서게 된 것이다. 그는 35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그가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 들게 된 계기는 작년에 92세로 타계한 '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팍스 부인의 사건 때문이다. 팍스 부인은 1955년 12월 1일 흑백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당시 짐 르로 법은 버스의 앞쪽 4줄은 백인용, 뒤쪽 10줄은 흑인용으로 구분하고 중간 자리는 백인이 없을 때만 흑인이 앉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버스 이용자의 70%가 흑인이던 시절이었다. 42세의 백화점 재봉사였던 팍스 부인은 중간 자리에 앉았다가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비워 주라는 운전사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 경찰에 체포됐다. 팍스 부인의 체포는 381일에 걸친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라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촉발시켰다. 연방 대법원은 1956년 11월 13일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팍스 부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때 킹 목사님은 26세의 나이로 흑인들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킹 목사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 철폐와 민권운동 지도자로 떠올랐다. 킹목사님이 주도한 민권운동은 1963년 민권법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킹목사의 비폭력 무저항 주의를 다시 되새겨야 한다. 자기의 자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타인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부끄럽다. 한국은 이제 폭력이 일상화 되었다. 물질적 폭력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신적 폭력, 말의 폭력 등 폭력이 합리성보다 앞서게 되었다. 사람들의 정서도 폭력적으로 변하고 메마르고 자기 주장만 있고 남에 대한 배려는 없다. 오히려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나 않는다면 그것이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정하게 된다. 오늘의 우리의 상황이 킹목사님의 경우보다 열악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을 행함으로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에게는 엄청난 손해를 입히고, 잠시동안에는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오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서로가 많은 것은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킹목사님은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랑과 正道로 자기 이상을 실현했다. 그 당시에 그가 흑인들의 인권을 찾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에 던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고 빈손으로 약한 자들을 데리고 평등과 자유를 위해 전진하였다. 그는 Christian Century에 '내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글을 썼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에 편안한 날을 별로 갖지 못했다. 앨라배마 감옥에 다섯번 투옥되었다. 내 집이 두 번 폭파되었다. 나와 나의 가족을 죽이겠다는 전화를 거의 며칠에 한번 꼴로 받았다. 나는 칼에 찔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더 이상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 정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이 의심스럽다. 정말 조용하게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시간마다 받는다. 나는 나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흑암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를 배웠다.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다. 나의 개인적인 불행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 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바울은 자랑스럽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다'고 말한 뜻을 실감 있게 이해한다."
고통과 싸우면서도 정도를 걷는 목사님의 모습이다.
킹목사님의 '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되새기면서 이 지구상과 우리 나라에도 폭력이 사라지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피부의 색깔이 아니라 그들의 품성과 인격으로 평가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나라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의 천국이 되고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즐길 평화의 동산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낮은 골짜기는 돋워지고 높은 언덕은 낮아지고 황무지가 평탄해지며 하나님의 영광과 공평이 두루 펴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낼 수 있음을, 이 나라를 덮은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교향악으로 바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