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성탄절을 앞두고 복음뉴스는 "2020년의 성탄절"이라는 주제의 글들을 연재합니다. 뉴욕, 뉴저지 일원의 목회자들이 쓴 글을 원고가 도착된 순서대로 게재합니다.
제목 : 2020년의 성탄절
카와무라 겐키라는 일본 작가가 쓴 “세상에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소설입니다.
제목만 보면 고양이나 혹은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박한 인생을 사는 젊은 집배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사로부터 뇌종양 말기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지 못하고 있을 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악마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 ‘세상에 한 가지를 없애면 하루의 생명을 더 살 수 있다.’ 는 흥미로운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는 교묘하게 설득을 합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 그러한 것들 하나씩 없애면 너의 생명은 하루하루 연장되는 거야...’
설득에 넘어간 주인공은 그의 제안을 받아드려 자신이 싫어하는 야채인 파슬리를 없애자고 합니다.
그러자 악마는 없애는 것은 너가 정할 수 없어 하면서 첫 번째로 핸드폰을 없앱니다. 죽음 앞에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핸드폰이 없어지는 순간 핸드폰에 얽힌 모든 사연이 없어집니다. 특별히 잊지 못하던 전 여자 친구를 핸드폰 때문에 만났었는데 그 친구와의 인연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영화를 없앱니다. 그랬더니 영화 때문에 가까워졌던 친구들과의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시계를 없앱니다. 그러자 시계수리공인 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고양이를 없애자는 제안을 하자 주인공은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하늘나라에 먼저 보낸 엄마와의 추억도 사라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의 유일한 위로였던 고양이 레스터가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소설과 영화는 죽음을 통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짐을 통해 삶의 소중한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소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이 사라지고 사라진 그 일상을 그리워하며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우리 인간들은 어리석어서 있을 땐 소중함을 모릅니다. 없어지고 사라져봐야 그것을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마굿간과 말구유가 사라진다면?
예수님은 조산원에서 혹은 평범한 집에서, 혹은 여관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어짜피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태어난 장소와 위치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서 말구유에 뉘여졌다는 사실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하지 않아서 마가와 요한과 마태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 걸까요??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굿간과 말구유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있어서는 아닐까요??
만삭된 여인에게 방을 양보하지 못할 만큼 매정하고 비정한 유대인들이란 인식이 생길까봐 그렇지 않아도 십자가에 죽게 한 것도 자신들의 조상들인데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민족이 홀대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추론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마태, 마가, 요한은 유대인들이고 누가만 헬라인 즉 이방인이란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본이 아니게 우리도 예수님의 출생 장소가 좀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냥 성탄절을 편하게 즐기고 싶고, 기쁘고 즐겁게 보내고 싶은데 마굿간, 말구유,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마음에도 없는 소외된 사람을 봐야 할 것 같고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 같고 주위를 돌아봐야 할 것만 같은 뭐 그런 불편함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출생의 장소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의 삶에 마굿간과 말구유가 없어진다면, 사라진다면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도 사라지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는가 하는 목적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비위생적이고 더럽고 악취가 나는 마굿간과 말구유의 출생에 대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내몰려져야만 했던 당시 인간들의 죄악 된 모습이 마치 마굿간 처럼 찌든 짐승의 냄새와 배설물의 냄새가 뒤섞여 있는 것과도 같고, 더러운 오물이 가득한 말구유처럼 질병, 불안, 염려, 걱정, 미움, 시기, 다툼, 공포와 온갖 문제로 고통 받고, 상처 받고, 신음하고 있는 인간들의 아픔과 고통의 자리로 직접 오셔서 친히 공감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마굿간과 말구유로 오신 것입니다.
그 마굿간과 말구유는 먼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굿간처럼 썩은 내가 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말구유처럼 여전히 세상 찌꺼기 때문에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미움과 시기로 인한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안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재혼한 부부가 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딸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여자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난 아이였는데, 사정이 있어서 12년 전에 고아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 1, 2년까지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잘 해서 성악 레슨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름대로 고아원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느 순간 그만 연락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자기들 힘으로는 찾지 못하고, 사람 찾아 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딸을 계속 찾았습니다. 이 일을 맡은 쉐이드란 사람이 미국 전역을 수소문하고 쫓아다녀서 마침내 LA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쉐이드씨가 연락을 하고는 찾아갔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라, 무대 뒤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쉐이드씨, 저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선생님 편지도 제 매니저가 읽어줘서 내용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자기는 엄마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 그 엄마에 대한 원한과 원망으로 살았었는데, 이제 만나면 겨우 삭힌 그 마음에 오히려 새 불만 지필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쉐이드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결국 딸은 엄마를 만나보기로 작정하고 날짜와 장소를 잡아 만났습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흐렸습니다. 딸이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겨우 인사를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엄마가 말합니다.
“목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이리 가까이 와 주겠니?”
그 말을 듣자 딸은 갑자기 그 동안 꾹 참았던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왜 저를 찾으신 거예요.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찾으려는 거예요. 저는 당신이 싫어요. 당신은 제 엄마가 아니에요.” 막 울부짖으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딸의 모습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 어머니는 딸의 두 어깨를 잡고, 그 손이 머리로, 얼굴로, 볼로 차례차례 만지며 내려가는 겁니다. “참 많이 컸구나. 이렇게 예뻐졌구나.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러면서 계속 딸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는 겁니다. 순간 딸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외칩니다.
“그럼! 엄마도 앞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 나도 너처럼 앞을 못 본단다. 하지만 네가 세상 어디 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
그러자 그 둘은 서로 와락 부둥켜안고 통곡을 합니다. 그 동안에 엄마에게 품었던 모든 원망과 분노, 증오, 원한 이런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녹아내렸습니다. 엄마도 자기와 같은 시각장애인이란 것을 알자, 모든 게 다 용서되고 이해가 됐던 겁니다.
그 어머니는 어느 날 의사로부터 자기가 유전성 시각 질환을 앓고 있고, 얼마 후면 앞을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미리 통보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어린 딸을 보니까 딸에게도 그 병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맡기면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자기와 사는 것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겠지 하는 마음에 눈물을 머금고 고아원에 맡긴 것입니다.
누군가 날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위로자 되기 위해서 낮은 곳, 마굿간과 말구유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마굿간과 말구유가 사라진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도 사라지고 우리의 아픔을 공감해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은 언제 Shutdown 될지 모르지만 2020년 성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분명 성탄절에 영광과 찬양 받으실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축하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코로나로 인하여 삶에 지쳐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뉘이셨기 때문입니다.
Merry Christmas!
글 : 장병근 목사(유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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