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칼럼

 

신학교 입학 후에 바뀐 목회자에 대한 인식

김동욱 0 2017.01.17 00:32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못하고, 교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목회자들의 딱한 모습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온당치 못한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닌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고, 글을 쓸 수가 없는…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 그런 처지가 된 것이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 얼마 쯤 지난 후에, 길재호 목사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집사님! 이제 집사님 편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집사님, 혼자이십니다. 집사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옵니다. 왜 이 힘든 길을 가시겠다고 결정하셨습니까? 이제 평신도들도 더 이상 집사님의 편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은 원래부터 집사님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신학은 집사님 같으신 분께서 하셔야” 한다고 하셨던 길 목사님께서, 내가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시며 그렇게 아파하셨다. 여생을, 나를 염려하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나 때문에 힘들어 하시며, 그렇게 살아가실 것이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길재호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목회자들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하게 되면서, 목회자들이 그냥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하는가를,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려움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아파 하는지를, 목회자의 생활비는 커녕 운영비도 충당하지 못하는 교회를 붙들고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교역자가 되기 전에, 나 만큼 많은 목사님들과 교류하며 지낸 사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목회자들이 고쳐야 할 것이 무엇들인지에 대하여 비교적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들 중에서,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다. 직장에 출근해서 근무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오전 10시도 되지 않아서 전화를 하는 목사들이 제법 많다. 그 시간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쁠 때이다. 그 교인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교인이라고 해도, 분명히 욕을 해댈 것이다. 오전 일찍부터 전화를 할 것이 아니라 카톡이나 이메일을 이용하여 "편하신 시간에 전화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지혜로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깜깜무소식인 목회자들이 제법 많다. 이메일을 보내면, 예스건 노우건 답을 해야 할텐데, 묵묵부답이다. 같은 질문을 두번 세번 되풀이하게 한다. 끝내는 전화를 하게 만든다. 바빠서 답을 못했다고 한다. 자기만 바쁜 게 아니다.

체면을 모르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다. 체면을 지키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고, 해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이기도 하다.

감사를 모르는 목회자들이 많다. 뭔가를 부탁할 때는 연락을 몇 번이고 한다. 그 부탁이 해결되고 나면,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다수이다.

쪼잔한 목회자들이 많다. 초등학생들도 하지 않을, 유치한 행동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런 목회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교인들의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참)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다.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 중 대부분(나중에 다시 교회로 돌아올 사람들은 제외하고)은 처음부터 (참)교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요즘말로 거품이었다. (참)교인들은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주님께서 꼭 붙들고 계시지, 떠나가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내가 만났던 몇몇 사람들은 어느 교회의 직분자들이었다. “3년 동안 교회를 안 나가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 가운데 있을 때는 잠깐 동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편한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직분자였던 사람들이, 3개월도 아니고 3년 동안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고(지금도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참)교인이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 교회를 떠나 성당엘 간다. 그 사람이 (참)교인이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근본적인 교리가 다르다. 교리는 종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개신교인이 어떻게 성당엘 간단 말인가? 

(참)교인이 아니었지만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관점은 (참)교인들의 관점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 보다 “제도” 와 “씨스템” 이다(이 말이 “참교인”들은 제도와 씨스템에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은, (참)교인들과는 달리 “믿음” 때문에 (교회나 목회자들의 잘못에)인내하지 않는다. 우리의 책임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다. 그들을 교회에 붙들어 두어, (참)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 곁에서, 그들을 돕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책무이다. 

교회의 씨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교회의 제도가 변화되지 않으면, 목회자들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줄지 않을 것이다. 줄어드는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변화가 되어야 한다. 재정도, 인사도, 운영도 개선되어지고 변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사람들(“참교인”을 포함하여)이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지 않다. 더는 “덕’ 으로, “은혜” 로 포장되어지지 않는다. 덮어지지 않는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줄어듦에 따라서, 교회의 재정 수입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교회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어야 한다. 헌금 수입이 줄어드는 것 만큼, 재정의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출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는 작은 교회들은 교회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 이런 교회들끼리 통폐합을 하거나, 아니면 자비량 목회를 하던가 선택을 해야 한다. 나에게 야박한 소리를 한다고 나무라지 마시라!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 공멸한다. A, B. C, D 네 개의 교회가 하나로 통합을 하면, 교회 건물을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¼로 줄일 수 있다. 네 명의 목회자가 역할을 나누어, 하나는 장년부를, 하나는 청년부를, 하나는 중고등부를, 하나는 초등부를 맡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교역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사례비의 액수도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 그렇게 못하는가? 자기가 대장(담임목사)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욕심 때문이다. (교인들을 향하여)낮아지라고, 욕심을 버리라고 설교를 하지만, 그것은 남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고 나는 낮아질 수 없고, 내 욕심은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담임목사 자리가 그렇게 욕심이 나는 자리라면, 순번을 정하여 1년이면 1년, 2년이면 2년, 기간을 정하여 교대로 하면 된다. 교회의 운영이나 목회의 방향에 관하여는 네 명의 목회자들이 협의하여 결정하면 된다. 안 된다고? 정주영 회장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에, 안 된다고 대답을 하는 임원들을 향하여 “해 보기나 했어?” 라고 질책하곤 하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똑 같은 말을 해 주고 싶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을 하자 “김 집사가 포스트 길재호 목사를 노리고 신학교에 간 것” 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신, 대단히 잘못 생각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신학교에 간 것은 “길재호 목사님 다음” 이 아니라 “길재호 목사님과 함께” 를 위해서였다.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길재호 목사님과 함께 생명나무교회를 섬기면서, 나의 그와 같은 생각은 더욱 더 굳건해졌다. 우리 – 길재호 목사님과 나 – 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다. 상대의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가 채워 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붙여주신 것 같다. 우리 두 사람에, 하나님께서는 조경윤 목사님을 더해 주셨다. 세 사람이 많이 다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같다. 생명나무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여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는 소모품이라는 것, 오직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100% 일치한다(설교자로 모신 강사 목사님을 소개할 때, 우리는 그 목사님의 경력이나 그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무개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겠습니다.” 라고만 소개한다. 덧붙여서 소개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예배 시간에 하지 않고 친교 시간에 한다). 

길재호 목사님과 조경윤 목사님, 그리고 나, 우리 셋은 가지고 있는, 아니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들이 모두 다르다. 각자가 잘하는 것을 맡아서 한다. 심부름은 내가 한다. 두 분에 비하면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데에 조금 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 동안, 어떤 목회자가 될까에 관하여 생각을 많이 했었다. 1년 여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릇이고, 연장이고, 소모품이다. 그릇이 주인을 향하여 나에게 뭘 담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연장이 주인에게 나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소모품이 나를 오래오래 되풀이 사용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는, 연장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는, 소모품을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할 것인가는, 사용자의 뜻에 달려 있다. 나를 쓰실 분은 주님이시다. 그 분께서 쓰시길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고자 하실 때에, 제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주님! 잠깐만요… 라고 떼를 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를 준비시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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