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황현조 목사가 집회 둘째 날, 세번 째(마지막) 집회에서 전한 말씀의 요지이다.
“행복한 신앙인의 새해 행진” 요 17:1-3
설교 중 찬송 317, 신 527 / 519 (539)
우리는 불과 몇시간 전에 새해를 맞이하였다. 2019년은 기해년으로서 무려 60년만에 돌아온 황금돼지의 해라고 해서 재물의 행운이 터지는 해, 올해 태어나는 아이들은 재물운이 좋다는 속설을 믿고 사람들은 흥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사주보라는 선전 광고도 있고, 손금, 별자리, 타로 등으로 자신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점술집을 찾기도 한다.
지난 12/31 밤 New Year’s Eve를 맞아 뉴욕 타임 스퀘어에 비가 오는 데로 불구하고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자정이 다가오자 Count down 에 들어가 Ten nine eight seven…One 와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Happy New Year를 맞이하였다. 그때 New Year Ball이라는 행운의 둥근 풍선이 터지고 그 속에 있는 오색찬란한 색종이조각들이 공중에서 쏟아졌다. 모두 새해의 행운을 상징하는 색종이 조각들이 관중들을 뒤덮었다. 모든 해피 뉴 이어 행운을 기원했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은 행운과 행복을 기원하고 바란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걸어가는 인생의 방향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A라는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어떤 사람은 B라는… 또 어떤 사람은 C 라는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또 어떤 사람은 A B C 의 길도 아니고, 그냥 방향없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생길을 걸어간다.
왜 이렇게 사람마다 인생의 방향과 길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왜냐하면, 각자 생각이 다르고 결심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과 결심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고 또 각자의 인생의 질, 내용과 행복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면 보통 사람들은 새해 결심이란 것을 한다. 미국 사람들은 이를 New Year’s Resolution 이라고 한다. 올해는 좀 착한 일을 하고 살겠다. 올해는 술, 담배를 끊겠다. 올해는 체중을 줄여야 되겠다. 올해는 자녀들과 시간을 좀 많이 보내야 되겠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올해는 성경을 통독을 해야겠다. 올해는 매일 감사하며 살아야 겠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좋은 결심들이 대부부 작심 3일로 끝나고 마는데 있다.
제가 사는 커네티컷에서 발행되는 뉴혜이븐 리지스터라는 신문이 있다. 거기에 난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다. 어떤 독자가 자기는 절대로 새해 결심을 안하기로 하는 것을 결심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그것도 한해만 그렇게 새해결심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매해마다 새해결심을 안하기로 했다. I always resolve each year not to make any New Year’s Resolutions.
Why? 그래야만 내가 실망할 일이 없으니까? That way I never get disappointed! 노상 새해결심 해놓고 작심 3일로 끝나니, 내 자신에 대해 기분이 나쁘고 실망이 되니까 아예 새해 결심 안하기로 결심(?)했다. 하하 그런데…그것도 결심이라고 해도 될까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때 내가 어떻게 살것인가를 생각해 보며 방향과 목표를 결정하고 살아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엄청나다. 분명한 인생의 방향설정과 목표설정에 대해 결심을 하고 사는 것과, 아무런 인생의 목적과 방향 설정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 두가지 차이를 이렇게 구분한다.
아무런 인생의 목적과 방향 설정없이 그냥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을 영어로 Existing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분명한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사는 것을 Living (사는 것) 이라고 표현한다. 옛날 우리나라 속담에도 이런것이 있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산다고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Are we existing or living? 새해를 맞이한 지금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하고 참으로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하고는 분명히 심각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It’s big difference.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갖고 계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곧 그의 양들에게, 즉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냥 생명을 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더 풍성한 삶을 주시려는 목적과 방향이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단순히 존재하면서 세상 물결 흘러가는대로 존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런데 예수 안믿는 불신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예수쟁이로서 예수 믿는 다고 하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향없이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풍성한 삶을 모르고 그냥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불행이요 비극이요 예수님께서 가슴 아파하실 일이다.
지금 나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나는 그냥 존재하고 있느냐? 아니면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 요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문”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려진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앞둔 자신을 위해 기도, 그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둔 바로 전날 밤 체포되시기 전에 하신 기도이다. 구약에 예언된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중대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순간에 이 기도를 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방향을 다 성취하신 그의 전 생애를 마감하시는 순간의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냥 단순히 존재하지 않으시고, 분명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의미있는 생애를 다 마치시고 하신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의 삶은 우리 모두가 닮고 따라가야 할 삶이다.
우리가 그냥 이 세상에 단순히 존재하지 않고/ 예수님의 양들로서 예수님처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본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도전과 교훈을 지금 여기에서 주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고 새해를 맞이하여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새해 행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행복한 신앙인이 되고 힘찬 새해 행진을 할 수 있을까?
(1)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살아야 행복한 신앙인이 되고 힘찬 새해 행진을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요17:1에 보면 대제사장 예수님의 기도 첫마디가 “아버지여” 이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예수님은 이 지상에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존하시는 삶을 사셨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 수시로 기도하셨고, 성부 아버지의 뜻에 따르시고 그에 순종하시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7가지 말씀가운데 첫 단어가 “아버지여” 였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첫마디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33:46) 였다.
이와같이 성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성부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매일 매일 그렇게 살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요 5:19에 보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같이 행하느니라”
그런데 감히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에서 탕자와 같이 살아서 되겠습니까? “ 아 나는 자존심 상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여 내 혼자 힘으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완전히 이 세상에서 아버지 집을 떠났던 탕자와 같은 바보가 되지 않겠는가? 탕자가 아버지에게 독립선언을 하고 집을 나가서 잠시 세상 연락을 즐기다가 재산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먹는 처지로 전락하여 실컷 고생하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생생하게 교훈하고 있다.
우리가 행복한 신앙인으로서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새해 행진을 할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
찬송가 부릅시다. 317장 (신 527) 어서 돌아오오.
(예화: 멘델스존)
우리도 우리 인생의 키보드를 우리 인생의 대연주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는 것을 거부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내 오르간은 내가 연주해야만 하고, 대 연주가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연주해서는 안된다고 매몰차게 거부하고, 고집부리고, 고함친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내 인생의 오르간을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내 자신이 연주해야만 기분좋고 행복하고 내 인생에 좋은 오르간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집부렸지만, 그렇게 했을 때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낭패와 실망 당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 인생 오르간의 키보드를 맡겨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우리는 신령한 목적과 방향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행복한 신앙인으로서 새해 힘찬 행진을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으매 The time has come”라고 기도하셨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께 바로 이때를 위해서 그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이다.다시 말해 이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겠다는 그 목적을 이루실 때가 되었다는 기도이다.
한 주간 전에 우리가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경축했습니다만, 예수님은 베들레헴 어느 여인숙의 마굿간에 있는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서 탄생하셨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여기에는 깊은 구속사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출 15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말라서 헤매다가 마라의 쓴물 연못을 발견하였는데, 그런데 그 물이 워낙 써서 마실 수 없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한 나무를 지시하여 그 나무를 그 쓴물에 던지라 명하셨다. 그래서 그 나무를 던지니까 그 물이 달아졌다.
쓴물을 달게 만든 이 나무는 곧 신약시대 메시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 (광야 사막같은 인생들, 얼마나 세상이 주는 죄악의 쓴물 많이 마시고 영적으로 목말라 갈급하고 지쳐 죽어가고 있는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의 마라의 쓴물, 죄악의 쓴물 마시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고 그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한 그 위대하고 숭고한 목적으로 오신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 실 때가 이제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1절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하셨다. 그리고 본문 2절에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좀더 자세하게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음이로소이다.” 그리고 3절에서 그 영생의 뜻이 무엇인가를 좀 더 자세히 기도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하게 신령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살 때 신령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 목적을 이룰 때가 있어야 한다. 그 때가 오기 위해서는 먼저 신령한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의 참 제자들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교회생활 잘 하고, 봉사생활, 전도 구제의 생활을 잘 수행해야 할 목표와 그를 이룰 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복한 신앙인으로서 새해에 신령한 목표가 있는 새해 행진을 힘차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 드리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행복한 신앙인으로서 힘찬 새해 행진을 할 수 있다.
본문 1절 끝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님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귀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은 아들 성자 예수님의 영광이었다. 인류 구속 사업이 완성되는 때, 바로 그 때가 성자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때였고, 그 성자 예수님의 영광은 곧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신앙인들의 신조 중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제1조에 이런 질문이 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그 질문 뒤에 이런 답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첫번째로 중요한 목적이란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삶을 사는 것은 신자로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신앙인 답지 않게 사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참 예수쟁이처럼,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그 말과 행실과 인격과 삶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의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때인 것이다. 마태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통해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바울 사도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살면 불행한 신앙인이 된다.
날마다 성경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이웃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복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해 첫 발걸음을 내 디뎠다. 그 첫 발걸음이 신년금식성회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 큰 축복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님의 발자취를 본 받아 3가지를 기억하고 새해를 출발하자.
1. 새해에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자.
2. 새해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살자.
3. 새해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자.
이렇게 결단하고 살면, 그럴때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 힘차게 새해를 행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다같이 따라 합시다.
“저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 주님 손 붙잡고 힘차게 새해를 행진해 가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결단의 찬송합시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통성기도 합시다.
김동욱 기자ⓒ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