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주일인 28일 오후 5시, RCA 팰리세이드 노회는 The Second Reformed Church of Hackensack에서 영적 대각성 집회 "Heart for the Future"를 개최했다.
RCA 팰리세이드 노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함께 한 이 날의 집회에서 정광희 목사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을 전했다.
정광희 목사의 설교는 정영민 목사(예수행교회)가 영어로 통역했다.
살아 있는 자 같으나 죽은 자(계3:1-6) (영적 각성 집회) 10/28/18
제가 보는 크리스천 신문 9월 8일로 발행되는 신문에 헤드라인의 제목이 “명목상 크리스천들을 다시 하나님 품으로!”라고 보도되었습니다. 내용을 읽어 보니까 퓨리서치에서 설문을 조사를 한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46%가 명목상 크리스천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온전한 크리스천은 18%에 불과 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명목상 크리스천은 자신이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여기는 기독교 신자를 말합니다. 자기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삶은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명목상 크리스천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구원 받은 줄 알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너는 누구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이처럼 망해버린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자들을 자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사람 중에 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줄 알고 살았는데 죽고 난 다음에 가짜인 것으로 판명된 사람입니다. 자기는 살아 있는 자로 알았는데 실상은 죽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데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지금의 터기 지역을 말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이 일곱 교회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교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일곱 교회를 선택해서 편지를 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일곱 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표성 때문입니다.
이 일곱 교회 상황과 상태가 재림 때까지 나타날 교회시대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교회의 특징은 놀랍게도 교회 역사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역사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사데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데교회의 모습은 바로 명목상 그리스천들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자로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체들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건물도 있고 사람들도 모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살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바라볼만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형태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교인들도 분명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했습니다. 분명히 교회의 형태는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데교회는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최대의 금맥이 흐르는 금 생산지였습니다. 금과 관련된 산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무역중심지였습니다. 자연히 돈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재정이 풍부한 교회로 보여집니다.
이 이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처럼 외부의 박해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다 받아들이니까 무슨 박해가 있겠습니까?
두아디라 교회처럼 교회에는 이단도 없었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하고, 선교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교회답게 보였고 성도답게 보였습니다. 겉모습을 볼 때 그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싶은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면 전 세계적으로 목사들이 지원할 교회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가고 싶은 교회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를 “죽은 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같이 보이지만 죽은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당 좌석에 사람들이 앉아 있지만 시체들이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죽었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육신이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었다면 벌써 무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심리적으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는 절망하고 의욕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인가 열심히 했습니다.
행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활동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1절에 보면 “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행위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하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선교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행위, 신자들의 행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행위는 있는데 죽은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는데 행위가 있는데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행위가 있는데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힌트가 2절에 나옵니다. “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가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가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의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전하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의 표준에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자기들의 마음과 생각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죽은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 8: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은 육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행위는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행위가 좋은 것이라 해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음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함이 있지만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분명이 말씀합니다.
(롬 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성령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들은 옷이 더렵혀지지 않고 흰옷을 입은 자들이 몇 명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옷이 더렵혀져 있는 자들은 어디서 옷이 더렵혀졌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가치관, 세상 여론, 인권으로 포장된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 세대가 만들어낸 문화속에 물들여 있습니다. 여론이 두려워 여론을 따르는 교회를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 양보하고 굴복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 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따르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법이 하나님의 법칙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이 Merry Christmas 라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Happy Holiday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Merry Christmas 입니다.
우리는 인권이 아니라 신권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도 가야야 합니다. 적당하게 회색분자가 되어서 살면 안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구조에 적당히 혼합해서 살면 얼마나 교회가 더러워지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흘러가는 물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물고기는 흘러가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자들은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함께 흘러갑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찬송하고 헌금도 합니다. 선교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면 세상을 따라 갑니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문화,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굴복하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은 인본주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권이 최고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신권입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가 미국입니다. 하나님이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딤전 5:5-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5)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향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바울도 살았으나 죽은 자애 대해서 말씀합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지만 죽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제목은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control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마다 성령 충만하기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마 약속하신 성령님을 구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너희들의 모습이 이러한 죽은 자들이니까 지옥에 가야 되고 너희들은 이렇게 산 자들이니까 천국 갈 거야!’ 라고 편 가르는 편지가 절대로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날에 어떻게 될 것인가의 정보를 주기위한 목적으로 쓴 책도 아닙니다.
이 편지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에게 쓰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미래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는 거룩하고 흠 없는 신부가 되어 달라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의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에게 3가지를 사랑의 권면을 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2절에서 깨어나라 Awake
잠자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뭡니까? 깨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일어나는 사람은 산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계속 잠자고 있다면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깨어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청하고 구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무디는 하나님의 위대한 운동의 배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미국이 깨어납니다. 미국이 깨어나면 전 세계가 살아납니다. RCA 교단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미국 교회가 깨어납니다. 우리 노회가 기도하면 교단이 살아 날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둘째로 3절에 “네가 어디서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기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Reformed의 기초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장자교단이 우리 Reformed Church 교단입니다. 우리 교단은 성경을 기초로 세워진 교단입니다. 우리 교단은 성경이 가라하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교단입니다.
성경이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남자 아니면 여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셔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성경을 기초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성경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감옥에 가더라도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바라기를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겁내지 않는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미국 감옥은 카타콤보다 100 배나 좋은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천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목사와 성도가 RCA가 제일 많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지키며 그 말씀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실하게 믿고 성경으로 돌아가 됩니다.
셋째는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바꾸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콧물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고 갈아타야 합니다.
만일 내가 워싱톤을 가기 위해서 95번 고속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south가 아니고 north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 워싱톤 브리지를 건너 브롱스를 지나는 것입니다. 잘 못 가고 있는 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차안에서 “하나님! 내가 잘못 가고 있어요, 바로 가게 해주세요. ” 울고 소리치면서 북쪽으로 계속 가고 있습니다. 울면서 북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죽은 자의 행동에서 산자의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영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동의 변화가 없는 영적각성 집회는 구호에 불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 영적 각정집회를 한 후에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지 않는 다면 오늘 모임은 헛된 모입니다. 시간 낭비요 예산 낭비입니다. 그야말로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모임이 프로그램이 아니라면 행동의 변화가 교회마다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도둑같이 오십니다. 도둑같이 오심은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하시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집회가 진정 각성하고 회개하는 집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고 기도운동을 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을 가지고 성령을 구하여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께서 하신 일을 보고 간증하는 교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임 후에 기도로 깨어있지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더 큰 징계를 내리실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오늘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납시다. 그것은 말씀을 구하고 성령을 구하는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 너희가 나와 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깨어나기를 원하시면 한 시간 기도 운동을 하시면 어떨까요?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편집자 주] 시간의 제약 때문에 위 원고의 마지막 부분은 현장에서 다 전하지 못했다.
김동욱 기자ⓒ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