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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들" 20 - 평양 대부흥의 주역, 길선주

조경현 목사 0 2018.01.1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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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열매로 알리라

 

오늘날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학자들은 나름대로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애를 써 보지만, 결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요, 부흥의 결과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눈으로 볼 때 이 땅은 동방의 지극히 작은 나라,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나라였다.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이제 1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한반도는 절반으로 나뉘어져 남과 북으로 대치상태에 있다. 이런 땅이 이제 세계 경제 13위에 진입했으며, 자동차, 선박, 가전제품은 물론 한국 상품이 전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으며, 한류의 열풍으로 K-Pop은 세계 여러 나라를 열광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한국선교 초기 선구자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발아하여 맺은 열매라 생각한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방방곡곡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고,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병원과,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인 목회자, 의사, 기업인들이 이 사역을 지속하였으니 오늘날 이런 열매들로 나타난 게다. 이제 그 열매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평양 대부흥의 주역, 길선주

 

1907917,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이 배출되었다. 이때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그리고 길선주가 7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안수 받아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로 한국교회사에 기록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요, 초기선교사들의 공로요, 그리고 본인들에게는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마포삼열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고, 신앙의 은사인 이길함에게도 역시 첫 번째 열매였으니 장차 그는 한국장로교회 설립 및 부흥의 주역으로서 주의 손에 크게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필자가 길선주를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한국장로교회 가운데 큰 영향을 미친 주인공이며, 또한 부흥운동 현장에서 그 역할을 친히 담당했기 때문이다.

 

길선주(1869-1935)1869315, 성균관 박사 길재의 19손으로 평남 안주 후장동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선주이고 자는 윤열, 호는 영계이다. 부친 길봉순은 노년에 낳은 둘째이므로 지극한 사랑으로 아들을 키웠다. 그는 비록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영특하여 4세부터 어머니께 한문을 배웠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학과 도교에 관심을 갖고 성장하였다. 그는 11세에 같은 안주 출신의 16세의 신선행과 결혼을 함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지만, 나이 어린 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자 선주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평남의 유명한 사찰인 용타사에 입산하여 기도와 수도생활을 권하여 그렇게 하였지만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오히려 시력만 약화되었다.

 

그의 나이 23세가 되었을 때, 선주는 집을 떠나 팔도강산을 유람하면서 기인과 도사를 찾아다녔고, 유학자를 만나 공맹의 도를 논하기도 하였고, 승려를 만나 밤새 불교 설법을 듣기도 하였고, 그리고 지관풍수, 사주팔자, 택일점복, 주역도 공부하였다. 그는 도교의 옥추경도 암송하고 약차, 신차의 장사되는 법과 먹지 않고 사는 벽곡양정의 선술도 터득하였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도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89310, 25세에 그는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자산 북암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찬성을 만나 수도생활을 서로 나누며, 수련을 하였지만, 인생의 한계를 느끼고 그만 하산하였다. 하는 수 없이 하산한 선주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료 중에 있었을 때, 그의 친구 김종섭이 찾아와 존 번연의 <천로역정><성경>을 전해주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 있어 안드레와 같은 인물이었다. 이때 김종섭은 선주에게 말하길,

 

나도 자네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도교를 찾았지만 모두 허사였는데 하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희생정신, 봉사의 삶이 내 마음속에 가득 채워져 버렸어.”

 

이 말을 들은 선주는 마음의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고, 친구가 전해 주었던 책과 성경을 읽었으나 구도자의 마음만 있었을 뿐 아직은 회심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김종섭은 계속하여 기독교 서적을 건네주면서 읽어 보라고 권하였지만, 그는 그저 호기심으로 읽었을 뿐,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도교와 기독교 중 어느 것이 참 종교인지 알기 위해 명상하고 기도하는 중, 1896년 어느 날 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강권적으로 임하사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 상황을 선교사 기일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을 밤 새로 한시쯤, 끊어 엎디어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 하여 주옵소서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옥저 소리와 같은 청량한 소리가 들리니 이에 총 소리 같이 요란한 큰 소리가 있어 공기를 진동하는지라. 선생이 크게 놀라 잠잠하니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삼차 부르거늘, 선생이 더욱 두렵고 떨며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려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 어버지시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살려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니 그 때 선생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서 더욱 힘써 기도하였다.”

 

이것은 길선주의 회심체험 사건이었으니 이후에 그는 평양의 첫 예배당인 널다리교회(후에 장대현교회)에서 1897815, 30세에 이길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회심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찼다.

 

그날 밤부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거리에서 만나

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가 주님을 믿을 것을 권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 된 증표로 상투를 자르고 기도와 성경읽기에 몰두하였으며, 회심 후 가장 먼저 자신의 가족들을 전도하기 시작하여 1898527, 그의 모친이 세례를 받았고, 같은 해 712일에는 그의 아내가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복형 길희주는 길선주를 핍박하다가 길선주의 기도로 20년 후에 주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들을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특별히 김찬성의 전도이야기는 참 특이하다. 김찬성은 청일전쟁을 피해 강원도 인재군 산곡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길선주가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 후 김찬성은 길선주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고, 길선주를 만난 김찬성은 그로부터 5일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후에 목사가 되었다.

 

길선주의 신앙은 일취월장 성장하여 1898년 봄, 장대현 교회 영수가 되었고, 이때 교회가 급성장하여 1,000명을 상회하였다. 1901년에 길선주는 방기창과 함께 장대현교회 장로로 임직을 받았는데, 이때 세례교인이 386, 학습교인 392, 총 교인은 1,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 많은 교인들이 예배 볼 수 없어 당시 총 공사비 7,000원을 들여 2,000명이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길선주는 190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하고 9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 이길함 목사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가 되었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임직설교에서 길선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을 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중국인들에게 증거 하기 위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본을 보인 것처럼, 한국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빚을 갚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장대현 교회는 계속 성장하자 교회를 분립 내지는 개척을 하였는데, 1903년에 남문밖교회를, 1905년에는 사창동교회를, 1906년에는 산정현교회를, 1909에는 서문밖교회를, 1911년에는 외성교회를 분립 개척하였다. 오늘날 대형교회를 향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주님의 교회는 유기체이기에 몸집이 커지고 성장하면 계속 분립하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리라.

 

19071월은 길선주 사역에 있어 놀라운 분기점이 된다. 그것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기도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모였던 원산 기도모임에 강력한 성령이 임하심으로 소수의 선교사들이 은혜를 받고, 원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으로 부흥이 확산되었다. 모일 때마다 성령이 임하였고, 1906년 여름, 미국인 목사 존스톤을 주강사로 한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 평양집회 중에 존스톤은 여러분 가운데 한국의 부흥을 위하여 헌신할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라고 했을 때, 길선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헌신하였다. 집회를 마치고 집행부에서는 19071월에 진행 할 평양사경회 계획을 세웠다. 결국 190716(주일), 길선주는 저녁집회에선 마음의 눈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라는 설교를 하였는데, 모인 청중들이 은혜를 받고 기도에 전혀 힘쓰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15() 마지막 날 저녁에도 길선주가 설교하고 회개하였을 때 성령의 역사가 폭포수 같이 임하였다. 성령 하나님이 길선주를 부흥의 주역으로 사용하셨던 게다.

 

그 후 길선주는 19079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교회를 위한 사역이 시작되었다. 사역은 한국교회 부흥과 더불어 쾌를 같이한다. 그의 첫 번째 임지는 이길함의 뒤를 이어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회직이었다. 그는 부흥의 여세를 몰아 파워풀한 목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081120일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눈은 희미하였지만, 압록강 연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의 심령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교통시설이 열악하여 산간벽지는 당나귀나 우마차를 이용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썰매를 타고 가다가 얼음이 얇아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길선주는 구조되었으나 성경과 설교원고는 모두 잃고 말았다. 이때 길 목사를 모시고 가던 교인들이 미안해하자 길선주 목사는 말하길,

 

성경이 압록강에 빠졌으니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압록강 연안에 있는 교회는 모두 부흥될 것이오.”

 

그의 말대로 평북 용천교회를 비롯하여 의주, 강계, 초산 등 압록강 일대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산간벽지에 교회의 등불이 켜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입으로 말한 대로 이루어짐을 배우게 된다.

 

길선주는 교회 안에서만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역도 간과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일제의 강점기에 있었기에 민족적 과업은 독립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강한 민족의식이 있었다. 1896년 서울에서 독립협회가 창설되었을 때, 한석진, 김종섭, 양전백,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 설립에 함께 하였다. 1898년 가을, 독립 기원절에 평양 지부는 한석진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는데, 안창호와 함께 연설하면서 민족각성을 촉구하였다. 1911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선건, 일명 105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길선주는 자신의 장남 길진형이 심한 고문을 받아 숨지고 말았다. 또한 191931, 만세운동에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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