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10시에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방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성부장님이 호텔측에 "check-in이 될 수 있나"? 물어 보니, 1시가 되어야 할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성부장의 room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진 부장도 MK이었다.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셔서 고마웠다.
우리를 1시에 Check in을 해 주어서 내일까지 머물 방으로 들어 왔다.
성부장은 공항으로 전지능 목사님을 픽업하러 가시는데 전목사님이 호텔로 들어 오시면 같이 시내를 구경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우리 부부가 성부장의 룸에 쉬고 있다가 배가 고파 2층 Food court에 가서 Bento를 먹고 아내와 함께 호텔 근처를 돌아 다녔다.
1시 30분쯤 전목사님 내외분과 동생 목사님 내외분이 호텔로 오시고 2시에 같이 지하철을 타고 Praha 시내로 갔다.
전목사님은 처음인데도 인터넷으로 다 찾아 보시고 잘 하신다.
성진 부장의 말에 의하면 전목사님은 새로운 곳에 잘 가시고 그 곳을 갔다 오셔서 성부장에게 그 곳이 좋다고 관광을 추천해 주기도 한다고 하신다.
나보다 연세가 훨씬 더 많으신 목사님께서 너무나 잘 아신다.
전목사님을 따라 호텔 바로 근처에 있는 Vysocanska역에서 타서 Mustek역에서 내렸다.
지하철 표를 끊는 것도 전목사님이 잘 하신다.
편도가 체코 돈으로 23전이다.
지하철 역은 에스카레이트를 타고 지하 깊이 내려 갔다.
우리는 전목사님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전목사님이 돌아 가는 곳을 다시 천천히 가르쳐 주신다.
지하철 안에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
지팡이를 짚고 조금 쩔룩 거리는데 아무도 돈을 주지 않는다.
특별히 여행객 같은 사람 앞에서는 오래 서 있다.
아내가 지갑에서 미화를 꺼내 주었다.
프라하에서 느끼는 것은 여기 사람들이 뭔가 모르게 초라해 보인다.
오랫동안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인가?
이제는 국민 소득도 꾀 되고 잘 살텐데.
우리가 미국에 살다 와서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인가?
전목사님 형제 내외분은 점심 식사를 안 하셔서 그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시고 우리는 그 곳에서 헤어져 구경을 다녔다.
먼저 동상과 어울려 있는 멋있는 Museum이 바라 보이는 바출라프 광장으로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그 곳에서 사진을 찍고 아내와 함께 프라하 거리를 데이트하며 거니는 여유를 가졌다.
한국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들"을 회상하며.
우리는 Old Town Square 근처를 다녔다.
광장에서 우리 고등학교 동창들이 보내 준 모자를 우리 내외가 쓰고 사진을 찍어 고등학교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어떤 친구는 우리 부부가 유럽에서 한국으로 직행하는 줄 알고 있고 어떤 친구는 우리 내외가 환갑 잔치 기념으로 한국 간 줄 알고 있다.
이 곳에서 화장실도 돈을 내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곳에 음식을 사도 돈을 내야 했다.
체코 돈으로 10전을 했다.
아내는 버거킹을 화장실을 이용했지만 나는 결국에는 참았다.
버거킹, KFC, Starbucks, Mr. Gelato에서 사 먹었지만 종업원들이 대부분 너무 불친절하다.
나는 이 곳 저 곳 구경하러 다니기를 원하지만 아내는 자꾸 기념품 가게에 마음이 가 있다.
기념품은 중요하지 않고 구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해도 선물을 사다 주어야 한다고 아내는 조른다.
할수 없이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 했다.
아내가 기념품을 사러 가서 물건을 고르는 동안 내가 한 곳의 사진을 보고 종업원에게 여기가 어디 있냐?고 물어 보고 찾아 갔다.
그곳은 후스의 동상이 있는 Old Town Square이었다.
전에 프라하의 전경이 나올 때마다 이 곳을 보와 왔기 때문에 이 곳이 프라하의 상징인 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곳이 후스의 동상인 줄 몰랐다.
사람들만 엄청나게 많이 몰려 있었다.
더구나 구시청 앞에 정시에 맞추어서 예수님의 12사도의 인형이 열린 문 사이로 지나가며 종을 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려고 그 앞에 서 있다.
때마침 그 때가 5시이기 때문에 그 장면을 우리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네 시간동안 걸어 다니며 구경을 하는데 발이 아프다.
아직 날이 밝기 때문에 더 구경할 수 있었지만 아내나 나는 지쳤다.
전 날 밤에 잠을 거의 못 잤는데다 오래간만에 많이 걸었다.
그래서 그만 호텔로 가자고 했다.
내일 또 구경할 것이지만, 아내와 함께 구경하면서 우리가 같이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내일 다시 구경할 수 있지만 오늘 대강이라도 이것을 본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후스의 종교 개혁 전의 개혁은 종교 개혁의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루터나 칼빈의 종교 개혁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후스의 종교 개혁은 일반인들은 거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회사를 공부할 때마다 후스를 그리워하고 존경해 왔다.
언제가는 후스의 종교 개혁을 한 곳을 방문해 보고 싶었다.’
그 꿈이 이루어 진 것이다.
종교 개혁은 루터나 칼빈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종교 개혁의 역사는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의 신앙적 시냇물이 흘러서 루터나 칼빈 등으로 하여금 큰 개혁의 강을 이루게 한 것이다.
종교 개혁의 이전의 개혁자들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 거의 모두 순교의 피를 뿌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은 John Wyclif (1324-1384)와 John Huss (1373-1415)와 같이 도덕적인 개혁보다는 신앙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고, Girolamo Savonarola (1452-1498)와 Peter Waldo와 같은 실제적인 개혁자들과 Meister Eckhart (1260-1327)와 Thomas A Kempes (1381-1471), John Wessel과 같은 신비적인 개혁자들이 있다.
영국의 Balliol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는 왕실의 전속 목사가 된 후에 성직자들을 비판하며 부와 정치적 힘이 교회를 부폐케 하였으므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고 교회는 가난과 사도 시대의 순수성으로 돌아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기독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경 뿐이라고 가르치며 라틴어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읽을 수 있게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황 정치의 잘못을 공격하고 카톨릭 교회의 성만찬의 화체설과 로마 교회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비밀 고회를 배척하고 연옥 신앙과 순례 그리고 성자 숭배 및 유물 숭배를 모두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런던 대회 때 로마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위클리프의 교훈을 적극 받아 들인 보헤미아 출신인 프라하 대학 총장인 장 후스(Jan Huss)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고 개심의 참된 경험을 겪고 불타는 정열로 성직자들의 부패에 항거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위클리프의 의견에 동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단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일체의 혐의를 부인하고 화체설, 미사, 면죄부 등 구체적인 교리들을 열거해 가면서 자신의 정통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영국왕의 의해 파견된 John Stokes가 보헤미아에서 널리 호응을 받고 있던 위클리프가 영국에서 이단자로 취급된다고 언급하고 보헤미야 지방에서 면죄부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후스는 면죄부에 대해 정면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중 앞에서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설파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라고 촉구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해서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소귀족들과 도시 민중 등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후스는 단지 교회의 실제적인 도덕 문제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교리 개혁을 요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우주적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며 교황들과 감독들은 교회의 통치에 불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속죄표를 파는 것은 성경 교훈에 위배되는 지독히 미워할 예배 의식으로 정죄하였다.
그는 교회의 부와 사치스러움은 사악함과 신앙의 표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가 온갖 비싼 성화들과 성직자들의 예전복, 성작과 종을 사용하여 행하는 예식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교회가 갈취하는 헌금에 대해 비판했다.
교황 요한은 즉시로 후스를 파면하였고 후스는 그의 파문에 항쟁을 하여 그것이 무효이며 헛되다고 선포하고 종교 회의에 교황을 고소하였다.
1414년 후스는 Constance 종교 회의에 소환되어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Sigismund로 부터 신변 안전 보호를 약속받고 출두하였으니 교황과 추기경들의 모략에 걸려 토굴에 감금 당하고 8개월이상이나 신문과 고문을 당했다.
그는 마침내 1415년 7월 6에 이단으로 직분을 박탈 당하고 높은 기둥에 매달려 화형에 처하였다.
그는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를 태우지만 100년 뒤에는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인데 당신들은 그 백조를 결코 구워 먹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백조는 루터파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화형을 당하면서 “나는 기독교의 복음 진리와 교부들의 교훈을 따라 쓰고 가르쳤다”고 외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의 복음과 거룩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무서움과 부끄러운 잔학한 죽음을 인내와 겸손으로써 참습니다. 오!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하고 기도하고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태연히 죽어갔다.
후스가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헤미안인들은 분개하여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얀 후스를 추종한 후스파와 그들에게 로마 카톨릭 교회를 권위를 강제로 강요한 여러 군주들 사이에 1419년 부터 1434년까지 전쟁이 지속된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특별히 창밖 투척 사건은 유명하다.
1419년에 후스를 따르던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이를 거절하는 시의회 의원들을 시청사 건물 창밖으로 던져 버린 사건이다.
후스파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도중 시청 창문에서 누가 돌을 던졌고 젤립스키가 그 돌에 맞았다..
그러자 격분한 군중들이 시청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 가, 판사와 시장을 비롯한 시 평의원 7명을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투척당한 7명은 모두 추락사했다.
며칠 후에 지기스문트 형인 보헤미아의 국왕 바츨라프(Wenzel)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을 장악하게 된다.
이 창 밖 투척 사건은 후스 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618년에도 투척 사건이 일어 났다.
개신교들이 개신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살려두면 우리의 자유 칙서와 신앙을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 섭정관과 비서관을 붙잡아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는데 이 세 사람은 3층 21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 남았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451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고 프라하 대학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 때에 신약 성경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고 이것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 후에 Han Ziska를 중심으로 개혁당을 결성하였고 개혁의 정신은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시작될 때까지 도도이 살아 있었다.
후스는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 해당 된다면 교황에게 대항하라고 설교 했다.
첫째, 만일 교황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아는 경건한 자들을 무기하고 인간적인 전통에만 눈을 돌린다면 이것은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표시가 된다.
둘째, 교황과 영적인 지위층들이 경건한 삶을 벗어나서 세상적인 일에 얽매여 산다면 이것이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표시가 된다.
셋째, 교황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세상의 장사꾼을 내세우고 자신의 세속적인 삶에만 욕심을 내어 교회를 압박하는 경우.
넷쩨, 만일 교황이 자신의 명령서를 통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탈취한다면 이것이 교황을 향하는 대항할 표시이다.
프라하의 종교 개혁 광장 중앙에는 후스의 동상이 있는데 후스의 사거 500주년을 맞은 1915년 세워졌다.
이 동상에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말라"라고 후스가 감옥에서 보낸 열 번째 편지의 마지막에 적었던 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