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설교문 : 진정한 찬양과 감사(에베소서 1장 3-15절)
정준모목사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ph.D & D.Miss)
서론) 2019년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본질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결코 명예, 부귀, 건강 등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 구원, 죄사함, 영생 등 신령한 복이요, 영원한 복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이유와 감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소망과 영원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감사드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라스도인들은 그 고난과 환란과 역경의 이유를 알고, 그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역설적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박국 선자자의 감사요, 바울 사도의 감사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산 소망이 끊어진 위기 상황 속에서도 감사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복, 신령한 복, 구원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라고 고난에서 제외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가 언제나 물질적인 복, 현세적인 복이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받은 복은 어떤 경우라고 빼앗거나, 포기되거나, 살아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령한 복, 생명의 복, 구원의 복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의 서신서 중 왕관” 혹은 “인간의 글로 표현된 글 중 가장 거룩한 글” 이라고 불리 울 만큼 매우 값진 말씀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말씀의 사역자인 로이드 존스 목사님 에베소서를 가지고 무려 8년간 설교할 할 만큼, 진리의 보고입니다.
특별히 2019년도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사업의 실패나 패업, 직장을 잃은 힘든 경제고 속에 있는 분들, 질병과 투쟁 생활로 지친 분들, 가족 간의 갈등으로 별거 중에 있는 분들, 불의 사고나 질병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진 분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무슨 감사냐?”,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하느냐?”, “나의 삶에는 감사라고 눈꼽 만치라고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감사라는 허울 좋은 이야기, 뚱단지 같은 말은 내 앞에서 내배지 말라?” 하면서 영적 분노와 깊은 회의 빠진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중에 복음인 에베소서 1장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할 이유, 감사를 드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은 기복적인 복을 받을 때, 노래가 있고 감사가 있고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고 있는 복, 노래, 감사,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차원을 초월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현실적입니다. 기복적입니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고 있는 복은 현실을 초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령한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복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기업되는 복입니다.
1.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을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라고 힘차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찬송이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진정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미 경험하였듯이 세상 노래는 부를수록 허무합니다. 세상 노래는 우리의 심령을 밝게 하기보다 더욱 어둡게 만듭니다. 세상 노래는 인간을 갈망하고 인간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세상 노래를 부를수록 자기 연민에 빠지고, 서글퍼지고, 허무해 집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감격하여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영혼의 노래입니다. 영혼이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영적 새 힘을 얻고 활력을 얻데 됩니다.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서 우리 나오는 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줄 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우리의 영혼에 안식과 만족과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줍니다. 찬송은 바로 우리 영혼의 노래이며 우리의 심령을 채우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연애 계나 가수들의 세계는 비참합니다. 더 이상 인기가 없고 더 이상 자신의 연기를 발휘하지 못할 때, 마약 그 마약도 더 이상 강한 약이 되지 못할 때는 자살의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향하신 놀라운 사역과 놀라운 계획을 바라 볼 때, 찬송이 나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크게 뭉친 눈덩어리 처럼, 점점 더 모여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수처럼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양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입니까? 신령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 조금을 주셨습니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내 노력 아닙니다. 내 행위의 댓가로 아닙니다. 세상이 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신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신령한 복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기뻐하고 감격하고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복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전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미술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깊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이 그릴 그림을 미리 다 계획하고 생각한 그 계획과 생각과 이미지를 그림에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계획과 구원 계획에서 우리를 우주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해가 되어 믿어지는 것은 이해되어진 자신과 자신의 머리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어질 때,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안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세뇌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뇌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어 졌다는 사실을 매우 자연스럽게 조금도 의심없이 믿어졌습니다. 목사님에 말씀하실 때,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영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 내가 대단한 존재이구나”, “나는 별 존재가 아닌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나를 삼아주셨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이구나” 하는 사실입니다.
1장 4절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선택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에서와 야곱 중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듯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건과 상태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자의로 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돌발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조건을 따진다면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흠없게 만드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본성대로 버려둔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인생, 욕된 인생,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에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그가 얼마나 흉측한 죄인으로 비참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만약 주님의 선택받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이 얼마 추악하고 더럽고 허무하게 살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거져 주신 은혜, 그 택함을 받은 영광을 찬송하려 함이라”
시애틀에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사돈되시는 장로님의 손녀가 미국 전체 고등학교 졸업자 중 100명을 선발하여 대통령의 초정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장로님은 너무나 영예스럽고 자랑스럽고 감사해서 주일날 전교인들에게 잘 차린 식사를 한턱 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 전체 고등하고 졸업자 100명에 백악관 초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본인과 가족들이 기쁘고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의 초청을 받은 그 영광, 자격이 없는 자가 받은 그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한턱을 내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그 영광 그 축복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찬송을 돌릴 뿐입니다. 그저 감사하고 그저 찬양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2019년 한 해를 보내면서, 감사드릴 진정한 이유는 나같은 죄인이 이미 창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