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8-1
글: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8-1장. 진리 위에 세워진 삶 (1)
(LIFE FOUNDED UPON TRUTH)
8-1장 진리 위에 세워진 삶(1): 여러분과 함께 성경이 어떤 종류의 책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제 이 책을 함께 펼쳐 그 안에 있는 것을 찾아내야 할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聖經)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 만약 그것이 읽을 가치가 있다면, 이제 그것을 읽자. 그리고 우리가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자(Well, if it is worth reading, let us now begin to read it and see whether we can discover what it contains).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내가 매우 어려서 내 마음에 다른 어떤 대답을 거의 몰랐을 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매우 좋은 대답을 내 마음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 제3문답인데, 그것은 내게 매우 좋은 대답으로 생각된다. 이 요리문답에는 106개의 다른 좋은 문답들이 있다. 소요리문답은 107개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이다.나는 어떤 장로교인이 말했다고 비난받는 것처럼, 소요리문답은 ‘요약된 성경’(the Bible boiled down)이기 때문에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까지 가서는 참으로 안 되지만, 역시 나도 확신을 가진 장로교인(長老敎人)이다.
나는 소요리문답이 놀랍게 광범위함과 성경에 충실함, 그리고 엄숙함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내가 본 적이 있는 가장 참되고 고상한 요악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소요리문답의 제3문답은 내가 지금 관심을 가지는 문제이다.: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대답은 이렇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하는지를 주로 가르친다.”내가 여러분에게 이 대답에 대해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은, 첫째로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둘째로, 사람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주로 가르친다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진리(眞理)를 행위 앞에, 교리를 생활 앞에 놓는다. 그것은 진리를 행위의 기초로 그리고 교리를 생활의 기초로 삼는다.
오늘날에는 그 순서가 보통 뒤바뀌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듣는다. 삶(Life, 생활)이 먼저 오고 교리(doctrine)는 그 후에 온다. 종교는 우선 경험이고 오직(only) 이차적으로 교리이다. 교리는 단지 종교적 경험의 표현이다. 그래서 비록 경험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의 교리적 표현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변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위대한 신경(信經)들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이 담고 있는 사실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참되다’(true) 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가 여전히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경험을 지나간 시대의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성경도 또한 그렇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일상적인 의미로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의 배후에 있는 경험을 놓치는 것은 한층 더 큰 잘못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셨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물론,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과 관계하여 어떤 물질적(physical)인 기적이 발생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것을 말했을 때 그들은 매우 귀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매우 귀한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옛날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물론 그러한 표현으로 우리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한 거룩한 분이 자발적인 행동에 의해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전혀 그렇게 믿지 않는다. 반대로 예수님이라는 분은 그가 저 유대인의 가정에 태어나기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선언(宣言)했을 때 그 사람들이 말했던 것을 거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귀한 어떤 것에 대해 그 당시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그것에 대해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면, 그러한 표현은 그들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무익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는가? 물론 믿는다. 한 위대한 경험의 표현으로서 믿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참으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지적(知的)인 표현은 시대를 따라 필연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것이 우리의 시대의 종교계에서 지배적인 태도이다. 즉 종교는 하나의 경험이요, 교리는 그 경험의 필연적으로 변하는 표현이고, 생활이 먼저이요, 신경(信經)은 그것에 대한 변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널리 유행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불신앙의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이 진리 혹은 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참된 어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은 주장하기를 이 세대를 위한 진리 그리고 저 세대를 위한 진리는 있지만, 모든 세대들을 위한 진리는 없다고 한다. 이 민족을 위한 진리 그리고 저 민족을 위한 진리는 있지만, 모든 민족들을 위한 진리는 없다고 한다.
나는 수년 전에 신학교수들의 한 회의에서 ‘계시’(revelation)라는 주제의 한 논문을 낭독한 것을 기억한다. 내가 한 논문을 읽은 후 그 다음에 다른 한 교수가 한 논문을 잃었고 그 다음에 다른 교수들이 그 논문들에 관해 논평했다. 그들 중의 한 교수가 말하기를, 비록 그는 나와 완전히 의견이 불일치라고 나의 상대자와 훨씬 더 의견이 일치하지만, 용어의 정의(定義)에 대해서는 내가 나의 상대자보다 훨씬 더 ‘계시’라는 용어의 역사적 의미(the historic meaning)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심지어 나도 사람들이 보통 그 용어에 의해서 의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다음에 그는 다소 분명하게, 대개 단어들은 그 의미가 변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의해서 과거의 세대들이 그것들에 의해 의미했던 비록 결코 의미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전개시켰다.
그것이 그 특정한 교수가 말했던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어떻든 간에, 나는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각 세대는, 다른 세대들과의 담화의 많은 기회가 없이 일종의 지적인 방수(防水) 칸막이 실(室)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 같다. 각 세대는 그 자체의 사상 형식들을 가지고 있고 어떤 기회에 의해 다른 세대의 사상 형식들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가?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에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것이 참되다면, 과거의 세대들에 출판된 책들은 우리에게 순전히 뭐가 뭔지를 알 수 없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책을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전 384년에 태어났다. 그의 책은 수천 개의 단어들로 구성되었다. 그가 그 책을 썼을 때, 그것은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그 수천 개의 단어들의 각각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어들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결과로 생긴 책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취급하고 있는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단어들의 각각의 의미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2천 3백여 년 동안 흔들려 왔다. 물론 그 단어들이 모두 정확히 동일한 정도로 그리고 정확히 동일한 방향으로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可能性)은 너무 희박하여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확률은 100억 대 1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The probabilities against it would be ten billion or more to one). 그러면 무엇이 불가피하게 그 결과가 되겠는가? 2천 3백여 년의 요동의 결과는 그 수천의 단어들 모두가 완전히 흩어질 것이고 그 결과 그 책은 의미가 없는 잡동사니가 될 것이다. 그렇다. 만약 단어의 의미들의 불가피한 변천(變遷)에 관한 그 교수의 이론이 옳다면, 이것은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불가피한 결과가 실제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 그 이론의 문제가 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옛날과 같이 오늘날도 역시 아주 분명하고 논리적(clear and logical)이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우리가 취급했던 그 이론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실상 단어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세대들의 사람들과 아주 잘 교통할 수 있게 하는 지적인 황금표준(gold standard)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역사상의 서로 다른 시대들에 해당하는 것은 또한 오늘날 함께 사는 서로 다른 민족들에도 해당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서양인의 신경(信經)들이 동양인의 지성(知性)에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동양인의 지성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독자적으로 표현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가상적인 그러한 동양인의 지성의 표현들 한 두 가지를 검토하였는데, 그것들이 내게는 시카고(Chicago)의 남부 사람의 표현들과 대단히 비슷하게 생각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 서양인(western)의 신경들을 동양인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나는 그러한 소위 서양인의 신경들이 정말로 서양인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략할 것이다. 그것들을 인용부호 안에 넣어 그리고 변론을 위해 ‘서양인의 신경들’이라고 부르자. 그러한 서양인의 신경들이 동양인의 지성에 주어져야 하는가?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물론 그러한 서양인의 신경들은 동양인의 지성에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의 조건 즉 그러한 서양인의 신경들이 참되다는 조건에 근거해서만 행해져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참되지 않다면, 그것들을 동양인의 지성에나 어떤 다른 지성에 주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참되다면, 그것들은 미국에서 그러하듯이 중국에서도 똑같이 참될 것이다. 사실, 비록 내가 성경은 참되며 기적들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기 때문에 나의 어떤 친구들에 의해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될지라도, 내가 그것에 관해 확실하게 회의적인 어떤 사실들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동양인의 지성이나 서양인의 지성이나 고대인의 지성이나 중세인의 지성이나 현대인의 지성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인류의 다른 민족들이 다른 소질들과 재능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각주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표준 문서 중 하나로, 1643년부터 허버트 팔머(Helbert Palmer)에게 작성을 지시해 1648년 의회 승인을 완료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위원회는 처음에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을 동시에 준비했으나, 얼마 진행한 후 우선 신앙고백서를 필하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요리문답들을 작성하기로 결의했다. 1646년 12월 3일에 완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회의의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는 그 각 부분에 성경구절을 난외(欄外)에 방주(傍註)를 달라고 지시했다. 회의는 마침내 각 명제에 대한 성경구절을 완전히 첨부해서 1647년 4월 29일에 의회에 보고했다. 소요리문답이 끝나서 의회에 보고된 것이 1647년 11월 5일이었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1648년 4월 14일에 보고되었다.
각주 2) 아리스토텔레스( 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le, BC 384-322)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불(Fire), 차갑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흙(Earth), 뜨겁고 습한 성질을 지닌 공기(Air),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닌 물(Water).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 2022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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