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 인종 차별(Racial Discrimination)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
글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는 말>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인종차별과 폭력이 가중되고 있다. 사람의 죄가 가져오는 편견과 오해, 때로는 제도와 기관이 부추기는 잘못된 평가는 이런 죄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움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터넷상의 웹 내용이 확산되고 있다. 다수의 전문 직업 스포츠 팀들이 아직도 미국인 원주민들을 풍자한 마스코트를 사용해왔다. Atlanta의 Braves, Cleveland의 Indians(Guardians로 개명), Washington Red Skins(Commanders로 개명)가 대표적인 예이다. 학교에서마저 인종분리를 없애는 목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다음의 질문들을 통해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적 편견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할 것들을 매우 부분적이고 제한된 범위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인종차별이 무엇일까?
인종차별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피부색이나 언어나 문화적인 한계에 따라 그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다.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를 향해 그 사람의 조상이나 피부의 색에 근거해서 싫어하는 것은 죄악된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 각자 각자는 조상이 누구인지 사실대로 알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만으로 그 후손자체를 가치있게 하거나 미움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2. 어떤 인종 차별이 진행되어 왔는가?
유럽인들에 의해 미국이 침략을 당한 후, 미국의 원주민들은 백인우월주의에 의한 잔인한 결과를 감내해야했다. 미국 원주민들이 미국 내의 법률에 의해 제정된 가장 많은 인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인종처럼 취급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적인 기초는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법률 시스템은 나라의 역사 속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차별하는 일을 지속하였다. 히스패닉 라틴계는 아직도 많은 경우 불법체류자로 간주되거나 융화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생활한지 7세대가 되어도 마치 1세대인 것처럼 취급받고 있다. 그들의 문화적 차이와 독특한 공헌들을 무시하고 있다. 인디안 제거법, 중국인 제외법, 하와이와 괌 식민지화, 1924년 이민법 등은 지금 우리 삶의 원죄가 되었다. 이는 교육과 재정, 수입과 기회에 대한 불평등을 낳고 있다. 미국에서의 백인들은 각 개인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평등을 믿고는 있지만 백인우월주의의 혜택을 계속하여 누리면서 실제로는 인종 차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3. 인종 차별이 왜 발생하는가?
인종 간에 증오감이 발생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조상이 관계된 이유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는 화해되지 못한 상처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흑인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계속되어왔던 노예제도와 근대까지도 이어온 분리 정책의 역사 때문에 백인들에 대해서 분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백인들은 흑인 커뮤니티의 계속되는 범죄율이나 불법적으로 약물을 사용한다는 등의 이유로, 그리고 이런 것들의 원인이 백인들 때문이라고 하는 몇몇 흑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에 흑인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행동에 대한 양식에 대해 편견이나 선입견에 치우치지 않는 성경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특별한 인종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어떤 소수 특정한 집단이 잘못을 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4. 인종차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무엇일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미워하는 감정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공동체의 일부의 행동 때문에 전체 인종을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억압하는 계층이 억압을 받는 집단을 싫어하거나 그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반대로 억압을 받는 계층의 사람들이 억압하는 계층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을 적합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종차별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는지에 근거해서 증오나 차별을 하든지 받든지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역사로 인한 화해되지 못한 아픔이 어떠하든지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집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수십 년 혹은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계속되는 증오와 분노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기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으며 그런 차별로 인한 상처들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인종차별이 항상 미워하는 감정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인종차별은 미워하는 단계 이상 더 나아가 우열의 감정도 포함한다. 이것은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을 포함한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열등하다는 것도 분명히 편견이며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설사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측정하며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일반적으로 더 지능적이고 우월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관심을 증명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어떤 것에 대해서 능숙하고 잘해낼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을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능지수 검사는 지능 그 자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적인 성취를 위해 적합한 특정 종류의 지능만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단적인 비교의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우열의 평가는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6. 인종차별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
1) 하나님을 다양성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정의와 다양성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창조의 모든 것들의 다양함을 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요, 인종의 다양성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종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상태에 있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서 나온 성격과 자질들을 사람에게 주셨음을 말한다. 상상력, 지적인 능력, 영, 감정, 결정하고 숙고할 수 있는 의지, 그리고 선과 악 및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분별하는 도덕적 양심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독창적인 목적은 인간관계에 대한 중요한 주장을 이루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각과 일치하면서 사람은 모든 인간 삶의 신성함과 존엄성에 대해 감사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존엄하게 여겨야 한다. 상호 애정의 연결을 가져야 하며 도덕적인 책임을 가지며,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시며, 또 인간 가족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신다.
2)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하여 그 이상의 범위를 대상으로 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잡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약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성이 사랑과 정의의 길을 벗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런 책임을 회복하도록 촉구하신다. 긍휼이 여길 자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심판을 말씀하고 있다. 언약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인류애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인종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임을 말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족속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부한 자, 남자와 여자, 이방인과 유대인, 백부장과 세리, 수로보니게 여인등을 모두 다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열정과 환대, 정의와 사랑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는 정의와 다양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인종 차별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예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거룩한 은혜의 자유를 버리고 사람이 만든 차별을 높이 올리는 것은 우상숭배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인종 차별은 형제 자매됨을 부정하는 사람에 대한 거짓이며 하나님께 대한 거짓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한 인종을 편애하신다고 생각하는 거짓된 주장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께서 주신 지상대명령은 어떤 제한이나 차별이 없이 모든 족속들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4) 신약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초월한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이 다른 이방민족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는 것 때문에 그들을 분명하게 책망한다. 어떤 개인이나 인종도 사람들에게 가능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다양한 영적 은사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은 모든 것을 다 같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서로를 차별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한다. . 신약의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헌신을 성령의 사역으로 말씀한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인류 가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은 이런 다양함의 축제와 포용으로 드러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만인 제사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평등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공동의 운명을 나누며 서로 관계되어 성장하고 살아가도록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종과 문화의 차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7. 우리는 인종차별에 대한 일부의 실제적인 평가를 인정해야 할까?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낮은 출산과 수입, 낮은 교육지표를 가져왔으며, 더하여 높은 치수의 자살과 폭력 등을 낳았다. 미국의 중서부의 한 대학의 농구 감독은 “흑인 운동선수가 평균적으로 백인들보다 더 잘 달리고 높이 뛴다”고 말했다가 해고를 당했다. 이런 경우에 감독의 관점은 사실의 가능성이 많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자유도 있지만, 모든 인종이 모든 특정한 능력에 있어서 모두 똑같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은사의 다양성처럼 나라들과 인종마다 모든 능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점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IQ에 대한 유전적인 영향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사람의 능력과 장애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며 과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들이 한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프로 농구에서 뛸 수 있는 백인들보다 흑인들이 비율적으로 더 높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보아 남자가 여자보다 힘든 노동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여자들은 어떤 남자들보다 더 힘이 세고 더 일을 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인 우월성이나 열등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논리를 개인들에 대한 편견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8. 특정 부류의 인종 집단이 타 인종집단에 비해 열등하거나 우월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
실제적인 면에서 우리는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불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의 남미인들이 있다는 통계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근래에 벌어지는 테러들은 모슬렘에 의한 것이 많다는 표현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흑인지역에서는 사생아의 출산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더 높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과거 미국의 노예의 소유주들은 백인들이었다는 표현도 사용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겼으며 그들의 문화가 우상중심의 문화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그들의 심각한 우상숭배를 견책하고 있다. 성경은 역사의 한 시점에 대하여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관영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모든 표현에 대해 그것들을 인종차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인종이나 국가의 죄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유한 죄들을 겸손하게 인식하고 이를 회개하도록 서로 권면해야 한다.
9. 인종간의 결혼이나 분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것이지 인종적인 자격요건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 때부터 시작하여 다른 많은 애굽인들과 미디안 족속들뿐만 아니라 라합과 룻 같은 이방 가나안 족속들을 포함하는 혼합된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인종들은 누구라도 함께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원리란 있을 수 없다. 한 개인이 자신과 다른 인종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결정에 따르는 사회적인 결과를 잘 알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해서 하나 될 것을 말씀한다. 성경은 인종 사이의 분리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 인종을 분리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결코 문제들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항상 악화를 가져올 경우가 더 많다. 성경은 오히려 통합된 사회를 말씀한다. 인종들 간에 사랑과 존중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더욱 그렇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과 같이 피부색보다는 그들의 성품에 의해 판단받는 사회가 되어야할 것이다.
10.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는 높은 성향도 인종차별일까?
우리가 비슷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경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이런 경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배우자나 친한 친구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문화적 집단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집단들 사이에서 보다는 동일한 집단들 내부에서 더 높은 차원의 상호 이해와 공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함께 긴장을 풀기 쉽고 또한 소통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흑인들이 서로를 “영혼의 형제(soul brothers)”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 인종 밖의 사람들이 영혼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실상 외부인들은 친밀한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성경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자연적인 성향 자체를 꾸짖지 않는다. 한 인종이나 한 성으로 된 학교는 모든 이들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학교들을 세운다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택시 강도가 빈번하고 여러 택시 기사들이 살해당한 곳이라면, 운전사가 백인이며 이 동네의 대부분 사람들이 흑인이라면, 그는 택시를 태우고 그 지역으로 가기를 거절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자신의 안전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일까? 이런 경우에 택시 운전사는 인종 차별을 한 것이라고 비난받을 수 없다.
11. 흑인과 백인들이 각각 드리는 예배가 인종차별적일까?
왜 흑인들과 백인들은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가? 이것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흑인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거나 흑인 기독교인들이 백인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배란 서로를 가장 친밀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에 교회들이 한 인종으로 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교회는 가족과 같은데 이것은 소통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이것은 민족적인 한계 안에서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인교회와 백인교회는 음악을 선정할 때나 설교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들도 흑인들이나 백인들은 같은 인종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같은 인종이 예배드리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을 인종차별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미주에 사는 재미 한인교회들도 친밀하고 친숙하게 한국인의 언어와 문화적 습관을 선호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과 흑인들이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예배의 스타일에 있어서의 차이점 보다는 과거의 역사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흑인들은 어린이로 취급받는 것에 대한 거절이요, 백인들은 그들의 힘을 나누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예배 속에서 인종차별을 이겨내고 화해와 치유를 감당하는 과제를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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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종차별에 대해 의식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이 인종적인 방벽을 깨드렸고 복음을 통해서 모든 종류의 모든 방언과 족속과 나라와 사람들을 불러서 한 위대한 새 가족으로 만드셨다. 교회 안의 다양한 민족적 집단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마땅한 자들로 부름 받았다. 교회는 세계적으로 퍼져 나아가야 하며, 회중들은 언어의 문화와 다양한 배경의 차이까지 포괄하며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평등주의에 근거해서 모든 민족 집단에게서 친구를 찾아야만, 더 이상의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한글을 하는 사람들은 한글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전도자가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영어를 말할 능력이 전혀 없으면서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내 삶을 드린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소통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모든 배경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필요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선교사들의 값진 노력과 피 묻은 복음으로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의 한계에 도전하여 자신들의 공동체의 편안함을 벗어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지 않고 있거나, 다른 문화, 인종, 국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위협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은 늘 인종과 문화를 포괄하고 초월하여 감당해야 할 우리의 사역이다. 성경이 모든 회중에게 다문화주의나 다민족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교회가 다민족이 될 때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더 잘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은사를 교회에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와 예배와 사역의 스타일을 확장함으로 이러한 다문화적 성장을 격려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그 어떤 사람도 인종차별주의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인종차별은 잘못된 행동과 가치관을 학습함으로 인한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의 결과가 없는 행동과 가치관을 학습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 인종차별로 인하여 혜택을 입는 사람이 있고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종차별의 가치관과 구성을 제거하고, 비록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의 대부분을 상실하였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사회에서 나쁘다고 여겨지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것은 인종차별이다’라는 주장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인종 차별은 나라의 삶과 역사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미국의 유색인종들은 이런 차별의 결과로 고통을 겪어왔다. 미국 원주민들의 대량학살 사건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람들의 노예제도, 중국인 배제 행위, 일본계 미국인의 대량 투옥, 히스패닉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차별으로 이어져 왔다.
이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통합된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굳건한 장벽을 허물기에 힘이 미약하다. 반 인종차별주의는 정의가 물같이 흐르고 공의가 강같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 믿음의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이다. 이제 인종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인종차별의 해소를 위한 광의의 공동체들이 이를 위한 대화부터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인 인종 차별의 해소를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고백, 용서, 화해, 변화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절차, 대화, 예배와 성경공부, 방법론, 전략, 참여에 대한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인종차별주의의 죄와 투쟁의 필요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에 속한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가족이나 인종차별의 개념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더 이상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친밀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법률적으로도 인종차별을 해체시기고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인종차별을 뿌리채 뽑아야 하는 이 일은 장기적인 노력과 헌신, 기도의 지속성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며 그의 의를 추구하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 2022년 6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3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