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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메이첸 박사 저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 우리는 축자영감을 믿는가? (후반부)

복음뉴스 1 2022.04.15 11:50

 이민철 목사의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⑤  우리는 축자영감을 믿는가(Do We Believe In Verbal Inspiration?)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이러한 사실들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에게 매우 증거적인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영감(靈感)에 대한 아무런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게 된다고 생각해 보라.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그는 그가 읽는 내용에 대해 신임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기록자들이 사실들을 알 기회를 가졌던 자들이었다는 것,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이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완전영감의 교리에 대해 그 자신이 인정하기 전에도 그에게 생각되어질 수 있다. 만약 그가 다른 역사적 자료들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공정함을 가지고 이 성경을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내용적으로 참된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다음에, 그것이 내용적으로 참될 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책들이 참되듯이,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성경 기록자들이 일반적인 역사적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아직 믿게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주는 증거를 위해 심히 중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 기록자들은 단지 자료를 얻는 일반적인 수단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문체의 습관(their own individual habits of style)을 따랐다. 사람들이 성경의 완전영감의 교리는 성경 기록자들의 개성(個性)을 정당히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보여준다. 그렇다. 성경에는 놀라운 다양성(variety)이 있다. 마가의 다듬지 않은 소박함, 바울의 무의식적인 그러나 훌륭한 능변(能辯), 히브리서 저자의 의식적인 문학적 기교,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 선지서 들과 시편들의 높은 시적(詩的) 재능이 있다. 만약 성경이 모두 한 문체로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했을 것인가!

 

성경의 완전영감을 믿는 우리는 그것을 단지 인정하시는 것뿐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강조’(insist)한다. 완전영감의 교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똑같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들이 모두 똑같이 아름답다거나 심지어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똑같이 참되다는 것과 각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성경에 있는 그 놀라운 다양성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It came by the gracious providence of God.). 그 기록자들의 다양한 교육을 관할하여 그들을 그들의 중대한 사명을 위해 더 잘 준비시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God)이셨다. 선지자 아모스가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이었을 때 그를 눈 여겨 보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門下)에 있었을 때 그를 눈 여겨 보셨던 분은 하나님이셨다. 내가 성경기록자들 가운데 있는 놀라운 다양성과 이 다양성 속에서의 그 책의 놀라운 통일성(統一性)을 생각할 대, 나는 참으로 모든 인간적 표현들을 초월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한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 66권의 기록자들이 마치 하나의 큰 오케스트라, 보잘 것 없고 기계적인 서투른 연주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주의 깊게 선택되고 주의 깊게 훈련된, 개성이 있는, 각각 다른, 하지만 그들의 바로 그 색다름에 의해 한 위대한 지휘자의 지휘봉 아래서 어떤 영광스러운 심포니의 통일성에 기여하는, 참된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같이 그들을 생각하고 싶다. 어느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그 위대한 음악가의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 이러한 영감교리는 확실히 큰 역설(逆說)이다. 그것이 이 사람들이 자유로웠다는 것과, 하지만 그들이 기록한 모든 단어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이 기록한 바로 그 단어들을 결정하시면서 그러나 그들을 단순한 기계로 취급하지 않으실 수 있는가?

 

그런데 나의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그런지 말하겠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를 말하겠다. 그가 그것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God is God.).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취급하심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적인 유사물(類似物)들을 훨씬 능가하는 특이한 미묘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취급하실 때 그는 인간들을 기계들이나 혹은 나무와 돌들을 취급하듯이 하시지 않는다. 그는 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성경 기록자들을 취급하셨을 때, 비록 그가 그들을 기계로가 아니고 인간으로 취급하셨지만, 그는 그의 목적들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삶을 그들의 사명에 적합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생활의 섭리적인 정돈에 첨가하여, 우리가 말한 그들의 개인적인 재능들의 사용에 첨가하여, 그 결과로 생긴 책을 인간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책으로 만든,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인 사역이 있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인 사역(事役)은 성경의 모든 부분들에 미친다. 사람들은 성경이 종교에 대한 책이고 과학에 대한 책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이 과학적인 문제들을 취급하는 곳에서 그 것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그것을 말할 때 만약 그들이,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종교가 참으로 과학과 독립하여 있는가? 물론, ‘종교란 매우 광범위한 용어이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광범위한 용어인가를 말하지 않겠다. 아마 그것이 심지어 과학이 정당히 취급하는 모든 사실들과 독립하여 있는 인간의 영혼의 태도를 포함할 만큼 광범위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태도가 종교라고 불리 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고 확신하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Christian) 종교(기독교)는 사실들 즉 외부세계(객관세계)에 있었던 사실들,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이 확실히 취급할 권리가 있는 사실들에 아주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말하는 성경은 종교의 참된 지침서(指針書)이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나 과학을 취급할 때 그것이 참된 지침서인지 아닌 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할 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의 육체가 1,900여 년 전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그 무덤 밖으로 나왔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성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활의 사건(event of the resurrection), 만약 그것이 참으로 발생했다면, 외부적인 세계에서의 사건일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진술은 물질세계에 대한 어떤 이상적으로 완전한 과학적 묘사로 진술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원리적(原理的)으로 과학이 취급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의 영감이 미치지 않는 그러한 과학적인 문제들의 하나, 성경의 경건한 독자에게는 그것에 관해서 성경이 참되냐 그릇되냐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은 그러한 과학적인 문제들의 하나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와 과학의 분리의 논리적인 결과에 대해 겁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비록 과학적인 역사가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는 그릇되다는 것과 사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줄지라도, 성경은 충만한 종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담대히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죄인들인 것을 알고 있다(We Christians know that we are sinners.).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영감을 주는 시()나 영혼에 감동을 주는 권면이나 경건하게 되는 기술에 대한 능숙한 교훈보다 훨씬 더 이상의 어떤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실들(facts)을 기대한다.

 

성경에 제시된 종교의 형태는 매우 훌륭한 하나의 형태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지금 그러한 형태의 종교를 실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내게 말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그 이야기가 역사이든 감동적인 이상(理想)이든지 간에 복음서들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종교의 한 훌륭한 형태를 가진다고 내게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나의 친구여, 당신에게 말하겠다. 그것은 내게 지극히 적은 유익도 주지 않는다. 당신이 내게 그와 같이 이야기 한다면 당신은 단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나의 참된 상태를 무시하고 있다. 당신은 내 자신의 의()로는 내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과, 내 자신의 힘으로는 내가 죄의 두려운 멍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가 무엇보다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권면이 아니고 복음(福音)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지침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길에 대한 지식(knowledge)이다.

 

당신은 나를 위해 어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는가?

(Have you any good news for me?)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질문하는 물음이다. 나는 당신의 권면들이 나를 돕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이 이루어졌다면, 당신은 내게 그 사실들(사건들)을 말하지 않겠는가?

 

성경은 내게 사실들을 말한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성경은 그가 그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고 나의 살아계신 주()가 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한다. 성경이 내게 그것을 말할 때,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내가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역사이지 종교는 아니다.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가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에 대해 사실을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성경은 종교의 책이지, 과학의 책이나 역사의 책이 아니다.”

 

나의 친구여,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이렇게 말한다. : “부활과 십자가의 그 복된 이야기로 인하여 찬송이 하나님께 돌려지기를! 그 진리에 나의 모든 소망(所望)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의존하기를! 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거룩한 책에서 그것이 참되다고 내게 말씀하셨음을 얼마나 기쁘게 생각하는지!”

 

나의 친구들이여, 여기에 여러분에게 한 법(a rule)이 있다.

 

사실들이 없으면, 좋은 소식들도 없다(No facts, no good news.).

좋은 소식들이 없으면 소망도 없다(No good news, no hope.).

 

만약 성경이 사실들의 기록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쓸모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것은 사실들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무한하신 자비로, 단지 성경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발()할 때 뿐 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한 복된 기록을 기록했을 때에도 역시 그리고 완전히 그들과 함께 하셨다.

 

단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contains)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크게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It is the Word of God.). 그것이 사실들을 기록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말할 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들으라. 그것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 매우 깊이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의 죄의 어두운 비밀들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것은 여러분에게 인간의 어떤 말도 줄 수 없는 구원(salvation)의 좋은 소식을 줄 것이다.

 

[편집자 주 : 2022년 3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0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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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복음뉴스 2022.04.15 12:03
주 1) 박형룡 박사의 대한민국 최초의 조직신학으로 출판한 저술은 19, 20세기 신학 비평서인 『기독교현대신학난제선평』(基督敎現代神學難題選評, A Review of Modern Theological Problems(According to Schools)) (장로교출판사, 1935)에서 최초의 축자영감이라는 단어가 쓰여진다. “우리는 반드시 신앙을 통하여 본래적 영감(本來的 靈感)의 계속으로서의 영감에 참여자(參與者)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축자영감(逐字靈感)을 믿노라고 말할 때에 그는 이 개념을 현실화(現實化)하여 그의 체계에 맞추어 드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이고 베르카워는 논평한다.” p. 204. (역주)

주 2)  “성경은 신자들이 그것을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확고하게 여기고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 자체를 듣는 듯이 할 때 의당히 그들 가운데 완전한 권위를 갖게 된다.” 존 칼빈, 문병호 역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기독교 강요 1』 (생명의 말씀사, 2020), p. 236. (역주).

주 3)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의 저서 『조직신학』(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0)에 서론, 제2부 교의학의 제 원리, 4장 성경의 영감, A. 역사상의 영감 교리부분은 이렇게 첫 시작된다. “계시와 영감은 서로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특별 계시에 관한 한 둘 중 하나를 다른 것 없이 생각할 수 없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다고 확신하는 데 달려 잇다. 그렇지만 이 둘이 아무리 가까운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찰스 하지는 이 둘이 그 목적 및 효과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올바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계시의 목적 곧 의도는 지식의 전달이다. 영감의 목적 곧 의도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계시의 효과는 계시 받는 자를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다. 영감의 효과는 가르침에 있어서 그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한 영감 교리의 형태가 늘 같았던 것은 아니므로 그 역사를 개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p. 155. (역주).

주 4)  요한복음 14장 26절

주 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계시를 어떤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주셨는가? 베드로는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어떤 사람 자신의 해석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예언은 절대로 인간의 뜻에 의해 유래되지 않았으며, 함께 낳으시는 성령님에 의해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했던 것이다(벧후 1:20-21)라고 기록한다. 베드로는 이 진술에서 먼저 예언의 저작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부정 명제를 주장 한다. 첫째,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건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선지자의 평가나 또는 미래에 대한 선지자의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선지자 자신의 이해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둘째,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인간의 뜻에 의해 동기 부여되지 않았다. 즉,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단순히 인간적 충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정 명제를 사용하여 베드로는 성경의 궁극적인 시작 원인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Robert L. Reymond 『최신 조직신학』 A New System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CLC, 2010), pp. 80-81. (역주)

주 6) 아모스 7장 14절

주 7) 존 그레샴 메이첸 박사의 이 책(1936년)이 씌여질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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