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⑧ 율법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한다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우리는 율법의 역할과 목적을 살펴보았다. 첫째로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주시되, 그분의 성품과 거룩하심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셨다. 둘째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를 알려주기 위해 주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높은 수준을 보여줌으로 우리 죄를 드러내 주어, 그래서 하나님만이 우리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을 알려 준다. 넷째로 죄가 심히 죄 됨을 드러내 죄가 얼마나 우리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지 보여 주시려고 주셨다. 다섯 번째 그래서 초등교사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데려가시려고 주셨다!
* 그런데 그 율법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에서 해방하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만 했던 이유를 알려준다. 마치 우리가 집에 들어가려면 현관이 있고 그 문을 열어야 들어가듯이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현관이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지만, 그것이 중심부는 아니다. 그래서 율법은 은혜의 입구라고 할 수 있다.
1. 율법은 은혜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율법은 그 존재 자체로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첫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속에 은혜가 있었을까? 이미 그 속에는 은혜의 요소가 있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의식법(제사 드리는 법)을 보라!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곧 도덕법과 의식법을 잘 살펴보라.
1) 예를 들어 의식법은 제사를 드리는 법이다
소와 염소의 피, 암송아지 재, 정결의 예식과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출애굽기의 후반부와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으며 이 을 잘못 이해할 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 공중 보건 상 이유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세부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법의 목표와 목적을 통해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일정한 행위와 행동을 요구하시고 있음을 알려주신 다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법은 은혜를 담고 있다.
의식법을 주신 분이 누구신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생각한 것도 아니고 모세의 작품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불러 하나하나 계시해 주시고 실행할 것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어떻게 제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은혜에 이르는 길에 앞서 거쳐야 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2) 의식법에 백성들이 짐승을 잡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에 은혜가 있을까? 왜 수소의 머리에 꼭 손을 얹고, 죽인 소의 피를 하나님 앞에 뿌려야만 했는가? 대답은 하나이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며 그것 자체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식법을 통해 친히 죄 사함의 방편과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도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이며 동시에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통해 “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만 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며 지킬 것을 명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너희는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하시면서 그들이 잘 따라야 할 세세한 의식법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3) 율법은 예언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가리키고 있다.
율법은 모형과 그림자다. 모형과 그림자란 무엇인가? 장차 올 것을 가리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히브리서 7장부터 9장까지를 잘 요약하는 말씀이 무엇일까? 히브리서 9장 9-10절에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율법의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것과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함께 무엇일 뿐이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의 예법일 뿐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언제까지 맡겨둔 것인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두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애굽을 떠날 때 유월절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이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식이다. 그러나 이 의식의 주요한 기능은 무엇일까?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리키는데 있다. 율법의 다른 의식법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장차 올 위대한 원형을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언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 율법을 통하여 책망하며 회복을 대언했다. 곧 율법의 의식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중대한 잘못이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와 희생이 충분하다 생각했다. “아! 우리는 제사와 희생만 드리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선지자들이 책망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4) 선지자들의 말씀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희생을 명하신 것은 분명하나, 그것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마음의 예배와 진정한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순종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번제와 희생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이런 생각은 착각일 뿐이며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5) 현대에도 이런 율법을 은혜의 수단인 것 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마 가톨릭이 바로 이것과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 예를 들어 그들의 고해성사를 보라. 그들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리고 사제를 찾아가 고백하면 문제없어!“라고 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 내가 선한 일을 행하면 그것으로 악행을 상쇄 시킬 수 있겠지?” “내가 넉넉하게 기부하면,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겠지” 이것은 천주교와 똑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례에서, 물이나 빵이나 포도주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선행자체에 우리를 자동적으로 해방시켜주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의식, 율법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 가? “너희는 죄 사함이 필요하다.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만이 절대 필요하다!” “이런 의식들은 너희 죄를 잠시만 덮어줄 뿐이다!” “너희는 이 법 울타리 안에서 장차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가리킨다. 모세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신명기 18장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였다. 모세는 ”그래. 나는 장차 오실 그 다른 선지자를 가리키는 자에 불과하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단다!“ 라고 이스라엘과 오고 오는 후손에게 가르친 것이다.
2. 율법은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1) 율법이 어떻게 은혜의 필요성을 보여줄까?
먼저 이 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보여준다. 사람이 율법을 깨달을 때, “이 모든 조항은 빠짐없이 다 지켜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율법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선함에 대해 더 이상 떠들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율법이 절대적인 수준 100%를 요구하신다는 것 때문에,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1)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산상설교에서 이 것을 아주 명확하게 짚어주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 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이것이 설교자들의 핵심적인 말씀이 되어야 한다. 율법 곧 하나님의 법이요 구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율법은 외친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 율법은 뇌성 벽력같이 외친다. 그것을 듣고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임을 보여 준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 20). 이렇게 율법은 죄를 선고한다. 율법은 우리의 실패를 보여 준다. 그리하고 난 다음에야 복음이 등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 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 율법과 선지자들은 무엇을 증거했는가? 하나님 의, 곧 복음을 증거했다.
(2)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바울은 말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바로 율법 및 선지자들 은혜의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 이것은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다 (3:19).
(3) 그래서 율법은 죄 사함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이것이 율법의 중요한 역할이다. 율법을 먼저 알아야 죄를 깨달을 수 있고, 그래야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내 자신이 실패자요, 죄인이요, 망할 자요, 용서받아야 할 자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 정말 나는 무력한 자구나! 아무 소망이 없는 자요 더러운 자구나! 내가 십자가 앞에 나와 그의 피로서 씻음 받아야 할 자이구나!“ 이렇게 무력함을 느 끼는 것이 은혜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2) 율법은 그 가르침으로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이 종교개혁 원천이 된 주제다.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율법이 입증한 것이다.
(1) 구원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혼란은 율법의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내 속에서 일하는 것을 경험한 자는 오직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 5). 사도가 왜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며, 이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 왜 어떤 교인들은 복음을 제대로 믿지 못할까? 어떤 형태로든 아직 자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결코 없다. 자신의 올바른 행위를 내놓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교회 안에서 자랐고 신앙적인 삶을 살아 왔어요. 불량배와는 다르죠. 어떻게 같겠어요?”. “저는 성경을 읽고 있는데요” 그러나 성경을 읽고 있는 것 자체를 의지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행한 선은 다 어쩌고요?”라고 항변하겠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행위이다!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 할 뿐이다!
(2)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이 은혜라는 말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들은 은혜를 믿지 못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모욕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가르치면 거꾸로 신성모독자로 취급했다. 왜? 그들에게 이방인들은 개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모두 다 외인이기 때문이다(엡 2:12). 어떻게 이방인들과 경건하고 신앙적인 선민들과 동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23). 이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율법이다!
자신의 절망, 무력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율법의 일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그래서 율법이 절대 필요하다. 율법은 철저히 은혜만 의 지해야할 우리 실상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우리의 상태를 잘 요약해준다.
우리가 다 이 세상 풍조를 따랐고 우리가 다 마귀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엡 2:2); 전에도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2:3). 지금도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타락했고 왜곡되었다. 지금도 육체에도 마음에도 욕심이 지배 하고 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울화가 치밀고, 분노하는 것도 간음과 같은 죄다. 시기와 질투와 악의와 야심도 똑같은 욕심이다. 사람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다면, 욕심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욕심을 가진 죄인, 왜곡된 자들이다. 본성 자체가 부패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허물과 죄로 다 죽었던 자들이 바로 우리 들이다(엡 2:1).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저는 선하게 살았는데요?” 그러나 영적으로 살아 있는가? 성경은 죽었다고 밝힌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표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있다면 맞다. 어린 아기는 부모를 사랑한다. 아는 것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사랑한다.
적용해보자!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예수께서 실재 여기 계시는 분으로 느끼는가? 이것이 주님이 제시하신 시금석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나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지만, 살아있지 않은 조화와도 같다. 생명과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실재로는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전에 의지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취급했다고 고백한다:...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러한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4)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무력한 존재. 연약하고 소망 없는 존재다”“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금식하고 분투하며 경건하게 살아도 별 수 없어.” 바울은 율법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7:15).” 이것은 은혜를 구하는 외침이다. “율법이 나를 무너뜨린다. 꼼짝 못하게 한다.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 라고 갈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절대적으로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3. 율법은 은혜 곧 구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거저주시는 호의이다. 무가치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다. 은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한다.
1)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오 는 결과이다.
내가 가진 요소를 구원에 끌어들이는 것은 은혜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 로마 캐돌릭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물에도 은혜가 있다.” “거룩하게 변하는 빵과 포도주에도 은혜가 있다.” “선행도 구원에 이르는 도구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과 동역을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은혜를 부인하는 태도이다. 은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만 나온다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만 내 믿음이 그것에 기여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자신이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다. 왜?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허물과 죄로 완전히 죽었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2) 율법은 내가 구원에 조금도 기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로 기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옷이나 배설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사 64:6, 빌 3:8). 이처럼 율법은 은혜의 본질, 즉 조건 없이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입증한다. 우리는 그 큰 사랑에 힘입어 구원받았다(엡 2:5). 우리는 생명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태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태아와 같았다. 그런데 성경은 밝히 말씀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6,7).
3) 은혜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자비와 사랑 때문에, 또한 한량없는 은혜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응답으로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 안에 부르짖는 마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응답하게 하시는 것이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언제나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런 진리를 우리에게 확실하고 위대하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6-10). 바로 이것이 우리에 대한 진리다. 우리는 죄인이며 왜곡된 자요, 미움 받을 원수이며 힘도 소망도 생명도 없이 죽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 이것이 율법이 알게 해주는 구원과 은혜에 대한 것이다.
4.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은혜가 무슨 일을 해주어야할지를 보여준다.
율법의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어야 하며, 실제로 무슨 일을 해주는지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1) 율법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말하는 것은 죄 사함이다. 복음이 바로 그것을 선포한다.
2) 율법은 내 본성이 비뚤어지고 부패하여 죽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 안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 먼저는 죄 사함이요, 또한 죄사함을 받은 내게 새 출생과 새 본성, 새 창조를 얻게 해준다.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그것을 바로 나에게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교통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제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는 옛 본성 대신, 어둠을 미워하고 빛을 사랑하는 새 본성이 필요하다. 율법이 이것을 보여주고, 복음이 실제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율법은 내게 능력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율법의 의미, 영적 성격을 알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여전히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새 본성을 얻었고 지각도 생겼지만, 그것 만으로 어떻게 새 삶을 살아나가는가? 내게는 능력이 필요하다. 복음은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 거하시며 능력이 되어주실 것이라 말한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시다(엡 3:2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과 확신을 전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 결어: 율법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는 표지판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율법은 복음을 가리킨다. 절실하고 절대적인 은혜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의 선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영원히 죄 사함 받는 것이다! 구속받고 치료받고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해지고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강력하게 일하심으로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늘의 온전함과 거룩한 임재에 합당해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은혜와 진리는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율법은 은혜를 요구하며, 그래서 철저하고 온전히 은혜에 복종하도록 나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로 우리에게 찾아와 구속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율법과 은혜로서 완전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령으로 이루는 삶이 되자!
[편집자 주 : 2022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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