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Field 단상(斷想) ⑧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글 : 문갈렙 선교사 (GMP/한국개척선교회 소속)
내가 섬기고 있는 선교현장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정이 든 한 40대 집사의 간증을 최근 듣게 되었다. 12년전에 그는 이 나라로 선교 현장 체험을 하겠다며 6개월을 작정하고 방문한 바 있다. 선교에 목마른 전남 광주광역시에 사는 성도이다. 이 나라를 찾았던 당시엔 아마도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선교사명에 깨어 일어난 그를 확인하고 그 귀한 싹이 잘 자라게 할 목적으로 매월 10만원의 후원을 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단기선교를 허락했던 것 같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는 즈음에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귀국하겠다고 하며 이곳을 떠났다. 이제 와서야 그 때 이야기를 하여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떠나게 된 이유는 교회로부터 매월 10 만원의 후원이 끊어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캠프에서 생활하며 사역지를 돌며 활동 하는 중에 형제의 생각대로 결정하여 물질로 이 나라 사람들을 돕는 중에 건축물도 지어주는 등 섬기는 것을 본 내가 건넨 권면이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 당시 나는 선교지에서는 베푸는 것도, 현지 목회자들을 돕는 것도 지혜롭게 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캠프가 세워 둔 계획에 의해 사역하는 고로 잠시 다녀가는 일꾼의 입장에서는 현지의 선교사와 상의한 후 집행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해야 계속 남아 사역할 선교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 말이 그에게는 이해와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오늘에 와서 말 하기를 그 때 마음이 많이 서운했다고 말한다. 떠날 때 그는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나라의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깊어진 듯 이 나라의 자매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며 언제든 믿음 좋은 자매를 만나게 되면 연락해 달라며 중매를 부탁하고 떠났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캠프에서 스탭으로 일하는 한 자매가 한국을 동경하며 결혼도 한국청년과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길래 그 자매를 이 청년 집사에게 소개하였다. 한두 차례 그 청년집사가 여기를 다녀가더니 둘은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 신부의 나라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다. 지금은 두 아들의 부모로 행복하게 광주광역시에서 살고 있다.
최근 12월 초 그 남편 되는 집사가 카톡으로 근황을 알려 오기를 1년여 전부터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초청하여 예배모임을 섬기는 사역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을 때 국내에서도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귀한 가능성을 보이며 섬기는 이들 부부가 대견스러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였다. 이 부부의 이런 삶은 선교지에서 생성된 아름다운 선교적 결실이기에 보람과 감사한 마음을 듬뿍 나에게 안겨주었다. 남편의 나라 호남지방으로 아내의 나라에서 온 근로자들을 위한 예배 공동체를 부부가 함께 섬기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부부 중 아내는 외국인 근로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지만 남편은 아직 그 특정 외국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어 이들은 기도하면서 동역자를 찾게 되었는데 마침 경기도에서 사역하던 외국인 목회자 한 분이 경기도에서는 사역이 힘든 여건을 만나 호남지방으로 내려와 사역하려고 정탐을 왔던 차 이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서로가 찾고 기도하던 응답을 받은 것이다. 그 목회자와 동역하게 되어 자국의 말로 예배인도와 설교는 물론 형제들을 섬기는데 아무 장애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젊은 집사가 3개월 이 나라라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한 선교지를 통해 받은 바 여러가 지 소감이 있었겠지만 긍정적으로는 사역자로서 세워지는데 필요한 강한 훈련도 받았다며 이를 아직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내가 12년 전 잠시 귀국하였을 때 나의 소속 선교단체 광주지부에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선교훈련과정을 열고 훈련 중에 있었는데 사역지에서 막 들어와 생동감이 있을 것이라 여겼던지 강의 초청을 받고 갔었던 적이 있다. 그 때 이 젊은 집사가 그 시간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강의를 듣는 중에 마치 엘리사벳의 복중 태아 요한이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태아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온 것을 인지하고 복중에서 기뻐 뛰놀았던 때의 기쁨과 같은 기쁨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 만남으로 인해 인도로 가려고 했던 그의 계획을 변경하고 내가 있는 나라로 단기 사역을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최근 나는 그에게 여기와서 어떤 인상을 받고 귀국하였던가를 그에게 물었다. 그가 받은 강한 인상으로 사역자인데도 바울사도는 텐트메이커로서 일하면서 목회하고 사레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교회 재정을 도왔던 것과 같은 사역의 모델을 이곳에 와서 보고 듣게 된 점이라고 회상한다. 우리 캠프의 사역 모습으로는 그런 도전을 주거나 모델이 될 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는 사역현장에서 현지 농부들과 함께 경작을 하여 농부들의 자립은 물론 우리 캠프도 본국의 후원만 바라지 않고 바울처럼 자립적 사역을 이어가겠다고 몸부림치던 때라 그 방향과 수고의 땀만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 땀에 걸맞게 결실이 계속 열리게 하셔서 지금은 사역 재정의 거의 50%를 자립하게 되었다. 그보다는 내가 소속된 이 나라 교단의 목회정신을 듣고 큰 도전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 교단의 정신은 모든 목회자는 교회에다가 사례비를 위해 손을 내밀지 않고 목회자도 축산이나 농업 경작, 혹은 수산 양식 등의 경제적 활동을 통하여 목회자 가정이 최소한의 생 활을 스스로 영위하고 자녀 교육비도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목회자가 교회 재정을 오히려 도우며 목회를 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재정 관리는 목회자 외 성도 중에서 신실한 2-3 사람을 선임하여 이 세 사람 사이에서 만장일치 동의하에 입출금이 이루어지게 하며, 목회자 독단으로는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교단헌법으로 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도 모든 목회자가 따라야 할 바울 사도적 사역자의 모습이라는 감동을 받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계기로 이제 광주에서 외국인 근로자 교회를 같은 나라 출신 목회자와 함께 섬기는 중에 자기도 건축현장에서 근로자로 일하면서 헌금하고, 헌금 외에도 외국에 나와있는 형제들을 돕고자 일정금액을 구분하여 교회 재정에 넣으면서 섬기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외국인 목회자가 공교롭게도 바울 사도 정신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목회정신으로 삼은 그 교단 소속이라서 더없이 이상적 사역이 전개되리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재정 운영상의 문제가 발생했다며 어쩌면 좋겠냐며 한탄을 하는 것이다. 그 외국인 목회자는 교회재정 은행구좌를 목회자 명의로 개설하고 모든 입출금을 혼자서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입출금 내역이라도 교회 앞에 투명하게 밝혀 달라고 건의해 보았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며 평신도 동역자의 말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가 탄식하며 토로하고 외치는 이유는 이렇다. 그 헌금은 본국에서 그 어려운 선발과정을 통과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근로자로 한국에 들어와(혹은 비자 기간이 만료되었지만 좀더 벌어 가려고 불법체류자로 남아) 한국인이 기피하는 악조건 속에서 3D 노동을 하며 패스트 푸드로 끼니를 해결해가고 번 돈으로 올려드린 것이다. 그런 재정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했는지조차 밝힐 수 없다는 것은 어디서 배운 잘못된 목회자의 모습인가?고 외친다. 구약에서의 제사장과 레위지파에게 허락된 당연한 분깃처럼 여기고 마치 자기가 선지자나 제사장인양 개인 돈처럼 마음대로 헌금을 인출하여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이 형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하다. 물론 모두는 아니고 일부 목회자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세에 어둠의 영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말씀 그대로 이토록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맘몬 앞에서 약화시켜 굴복시킨단 말인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친히 다림줄을 손에 드시고 사역자들을 측량하시며 탄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오늘날 열방의 무수한 교회에서도 모임의 규모에 따라 목회자에게 지불하는 사례도 천차만별이다. 흔히 지칭하는 대형교회에서는 담임의 저서로 인한 인세 수입도 많을 터인데 세상의 대기업 CEO의 연봉 이상의 엄청난 사례비를 또 받는데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교회의 규모와 목회자의 명성과 소지한 학위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 신학을 했는냐에 따라 사례비가 다르고, 그 큰 액수는 당연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교회행정의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재정집행에 관여해도 당회나 성도들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바울 사도를 성경에서 대하며 사역자 모두는 부끄러워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날, 세상 평판에서 추락한 교회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다르다 하여 우리는 과연 바울의 정신으로 일하며 도우며 사역하는 그런 모습, 사례비를 책정 받더라도 과하지 않은 액수로 받는 그런 변화는 정녕 일어날 수 없는 것인가?”하는 그의 질문에 나도 자신에게 질문하며 코람데오 나를 돌아 본다.
[편집자 주 : 2022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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