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광야를 지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글 : 주영광 목사 (넘치는교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기념하는 세 개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 개의 절기 중에 하나가 초막절인데, 이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수장이란 곡식을 창고에 저장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인도를 감사하는 동시에 풍성한 열매를 주신 것에 대한 추수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숙곳’이라고 부르는 초막절을 맞이하게 되면 광야에서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집 근처 공터에 간이 텐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감사의 식탁을 나눕니다. 추수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광야에서의 삶을 감사합니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시편 136편 16절 -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광야에서의 삶은 열매가 전혀 없는 삶인데, 추수열매에 대한 감사절로도 동시에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수할 열매가 없는 시기의 감사절로서 지키는 초막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매가 없는 삶인데 어떻게 감사절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곡물을 수확하고 그 열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지만, 열매 구경을 하지 못했던 40년 광야에서의 삶에서도 이미 그들은 여전히 매년 감사절을 잊지 않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일상에 대한 감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추수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매 없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를 광야의 삶이 끝날 때까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 그리고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그 열매는 이스라엘 광야생활 40년 동안 일상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습니다. 더 이상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한, 이상할 것이 없는 그 일상 자체였던 것입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가면 하늘에서부터 오는 만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상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이 광야에서 태어나면서 놀랍게 여기지 않아도 될,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40년 광야의 삶에서 물리적인 추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일상이라는 삶 속에서는 이미 너무나 값진 열매들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일상들이 없어서는 안 될 이스라엘의 엄청난 열매였던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기억은 불편함의 기억이고, 좌절과 낙심의 기억이고, 인내의 기억들이 많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기자는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시편 136편에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힘든 고난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과 같은 일상의 은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의 삶을 감사절로 지키는 초막절은 일상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수장절로서 물리적인 추수의 경험은 광야에서 불가능했지만 그들은 초막에 살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하늘의 만나라는 일상의 열매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그 평범한 일상이 그것들이 없는 40년 광야의 삶을 상상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에서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소개하는 인구 수를 비교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광야 생활 시작한 때의 인구 수와 광야 생활의 40년 지난 때의 인구의 수의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광야 생활 동안에 전염병도 돌고, 전쟁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도 그렇게 많았는데 여전히 전체 인구 수가 변한 것이 없이 거의 비슷합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그 험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대로 지키신 증거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시간을 돌이켜 보니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키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은 열매가 없는 삶 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광야에서의 삶을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광야에서의 40년은 추수할 열매가 없고, 불행하고 낙심하고, 전쟁과 함께 길어지는 여정으로 인한 탈진이었지만, 그들의 일상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신 감사의 제목들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열매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일상의 삶을 감사하라고 감사절로서 초막절, 혹은 수장절을 명하셨습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감사가 됩니다.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셔도 불만으로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일상을 만나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감사할 제목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일상 자체가 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은총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축복은 불평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상의 은총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는 잊혀진 축복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뭔가 아주 특별한 것이 내게 주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때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삶이 결국 행복이 됩니다.
일상 속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소중한 것인데, 이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순간부터 감사의 삶은 사라지고 불평의 삶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불행을 낳습니다.
따라서 일상의 축복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것을 주신 자의 몫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나의 몫입니다.
우리는 Covid-19의 아직 해결되지 않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올가미 같은 삶의 연속 속에서 감사보다는 불평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얻은 열매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지난 2년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광야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들은 감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Covid-19 환경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제목들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이제 곧 다가올 풍성한 감사절의 축복을 울리는 종은 은총을 주신 자의 몫이 아니라 일상의 소중함을 회복한 자의 몫입니다.
[편집자 주 : 2021년 1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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