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포스트 코로나 교회 가는 길의 전망 4”
글 : 조원태 목사 (뉴욕우리교회)
1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나눔을 실천한 선교현장은 유구한 역사동안 크리스천의 야성을 일깨워 왔다. 그러나 코로나는 선교현장을 정밀타격한 미사일과 같았다. 야성을 공급해 왔던 선교현장의 맥박이 느려졌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선교현장과 어떤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가?
몇일 전, 아이티 선교지역을 방문했다. 2010년 1월, 대지진으로 몇 분 만에 30만명이 목숨을 잃고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아이티에 2012 년부터 방문해 왔다. 방문해 온 선교지역은 아이티의 수도에서도 자국인마저 들어가길 꺼리는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가난한 씨티쏠레이다.
지난 12년 동안 NGO 구호단이 가장 많이 들어갔지만, 씨티쏠레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이는 김승돈 선교사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승 돈 선교사는 2010년 처참했던 지진현장에 있었고, 그 직후 아픔을 보듬으며 가장 가난한 마을 씨티쏠레에 거주하면서 사역해 왔다.
카톨릭에 수단의 이태석 신부가 있었다면, 개신교에는 씨티솔레의 김승돈 선교사가 있다고 나는 여겼다. 아이티에는 700여개의 고아원들 이 있는데, 그는 9개의 고아원 원생의 아버지가 되어줬다. 이런 사랑의 열매가 씨티쏠레의 “사랑과 희망 선교쎈터”였다.
지난 7월 암살된 대통령은 G9이라는 갱들의 연합체와 결탁했었다. 갱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지금은 온 나라의 주요도로를 개폐를 조절하며 석유와 생필품의 공급을 담보로 돈을 뜯어내고 있다. 지난 10 년도 충분히 가난했던 민중들은 더욱 궁핍해졌다.
얼마 전, 많은 사상자를 낸 지진과 홍수 뉴스는 현장에서 큰 뉴스로 들리지 않을만큼 그들의 생존은 벼랑 끝에 달려 있다. 무법천지이다. 흐르는 눈물도 그 땅에서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픈 도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예수님만 연신 떠올랐다. 그들은 강도만난 이웃이다.
그래서 이번 방문을 앞두고 망설였다. 치안불안의 사전정보 때문이다. 혹시 모를 사고가 아군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또 교회에 걱정을 주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래도 선교사는 거기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강도 만난 이웃을 지나친 제사장을 경멸하지 않았던가?
2 결국 하나님이 주신 확신에 순종했고 나는 갔다. 아이티 공항에 내렸다. 산천은 그대였지만, 마음은 비장했다. 교우들이 챙겨준 음식이 바퀴가 고장난 이민자 가방에 한가득이었다. 뉴욕우리교회와 시카고 기쁨의교회 성도들이 마련한 선교헌금이 내 속옷에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선교센터가 지난 일년 반 동안 갱들에 의해 점거당하고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과 아이티 경찰력도 포기한 화력을 갖춘 갱들이 선 교센터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고아를 위해 매일 가동한 빵 공장, 병원, 신학교, 도서관, 예배당 모든 곳이 파괴되었다.
수년 전, 교회 선교팀과 함께 선교센터 맨 옥상에 스피커를 설치했다. 선교센터 앞에 가난한 시장에 무수한 사람들이 새벽부터 운집하는데 그들에게 종일 찬양을 들려주고, 말씀을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엄청난 사운드였다. 스피커를 설치한 날 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춤을 췄다.
그런데 지금은 그 스피커 자리에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기관총으로 가난한 주민들이 무수히 죽었다. 선교센터로 들어가는 사거리에 경찰서는 갱들에게 무기를 탈취 당했고, 처형장처럼 활용되고 있단다. 갱들의 총소리는 일상이 되었다. 납치와 폭력은 평범한 뉴스가 되어버렸다.
선교사의 식량창고에 사랑을 채워드렸고, 과부의 렙돈 두닢 같은 선교헌금을 전달해 드렸다. 후방지원은 전방의 사기를 고취시킨다. 선교 사에게 후방의 존재를 통해 기세를 전달한 것이 초기교회사의 아름다운 문화 아니었던가? 이번 방문의 가장 큰 바램이기도 했다.
신비한 것은 아이티의 참혹한 현실과 달리, 나는 아이티의 미라클 표정을 내내 목격했었다. 숙소는 최근 건축 중인 청소년센터였다. 수 년 전, 선교사와 나는 현재는 갱들이 점거한 선교센터 옥상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고아 청소년들을 위한 합숙터 꿈에 관한 대화였다.
나도 어린시절 고아원에서 자랐기에 아이티 고아들과 비슷한 두려움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아이티나 한국이나 고아들이 18세가 되면 자동 으로 고아원에서 나가야 한다. 아이티 고아들은 남자는 갱으로 여자는 창녀촌으로 십중팔구 가는 악순환의 방파제를 마련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때 선교팀은 고아들의 평화캠프를 진행했었다. 그 열매였는지, 고아들의 합숙터인 청소년센터가 건축되고 있었다. 비록 선교센터는 군사기지로 변했지만, 고아들의 청소년센터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예언자 미가가 품었던 꿈의 실현처럼 보였다.
청소년센터에는 다시 가동될 빵 공장, 고아들이 합숙하며 공부할 교실과 기숙사, 식당, 채플실이 지어지고 있었다. 청소년센터는 비무장 지대에 핀 들꽃처럼 주변을 압도했다. 이사야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살지 않던(사 11:4) 덕에 평화 나팔수가 된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고, 표범과 어린 염소가 같이 자며, 젖먹이가 독사굴에서 장난하고 걸음마가 독사굴에 손을 넣는 불멸의 설교를 (사 11:6~8), 이사야는 앗시리아 깽판 시절에 하지 않았던가? 이사야가 본 현실은 치명적 위협이 바로 곁에 있었다. 위협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니 그 치명적 위협들이 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동반자가 된다. 이것이 믿음의 매력 아닌가?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치명적 위협을 곁에 두고도 해 됨도 상함도 없는 거룩한 산이 씨티 쏠레의 청소년센터 되길 기도한다. 고아들을 위한 청소년센터는 아픈 도시 한복판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있다는 결정적 표정이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도무지 해를 받지 않는 복음의 능력이다.
밤이 더웠다. 자는 도중 땀이 비오듯 했다. 옥상으로 갔다. 추석 보름 달이 씨티쏠레 밤하늘에 떴다. 내가 선 자리에서 고작 5분 거리에 갱들 이 점거한 선교센터가 있었다. 혼자 나는 달밤에 춤을 췄다. 평소 난 대단한 몸치이다. 그런데 반주도 없이 혼자 미친 듯 춤을 췄다.
무법천지 씨티쏠레 한복판에서 맹수들과 어린이가 함께 뛰어노는 놀이터를 경험한 순간이다. 과연 치명적 위협은 씨티쏠레 뿐이겠는가? 뉴 욕은 얼마나 안전할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우리 발 밑에도 있으며 사방의 우겨싸임은 내 등 뒤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들리는 대로 살지 않는 우리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복음의 현장을 지지 하고 지원하며 동행해야 할 것이다.
3 청소년센터 뿐이 아니었다. 아이티 현지인들의 전도폭발훈련 수업현장을 참관했다. 10명 학생들과 8명 지도자들이 김승돈 선교사의 훈련을 받았다. 갱들의 총소리가 일상인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 복음을 전하려고 위험한 거리를 개의치 않고 그들은 걸어와 훈련했다.
선교현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야성을 공급해 줄 성지이다. 우리 안에 예수의 복음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우리는 복음을 제시해 예수를 영접 하게 할 열정이 타오르고 있는가? 최근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복음을 제시했나? 전도폭발훈련은 우리 무딘 양심을 깨트릴 화살촉과 같았다.
이런 난리통에 예수병원이 건축되고 있었다. 병원이 무너졌는데 또 병원을 짓는다. 역시 하나님이시고, 선교사도 역시였다. 그 현장에서 기 도한 중에, 가슴에 말씀을 주셨다. 막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마지막으로 2곳의 고아원을 방문했다. 니콜라스 고아원과 다락방 고아원이다. 10년 전 고아들이 아기였을 때부터 찾던 곳들이다. 고아들은 내 이름을 불러줬다. 기껏 일년에 한번 방문한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이름을 듣고 난 다음에 기억났을 뿐이다.
선교팀이 가져다준 악기들이 씨앗 되어 음악교실이 열렸고, 거기서 배운 고아들은 내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들려줬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 도 해를 받지 않는 연주였다. 고아들의 천진난만한 눈망울은 역시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독하는 파워가 있었다.
우리교회는 씨티쏠레에 오랫동안 바이블 타임 오천 권을 매달 보내 줬다. 고아들은 바이블 타임으로 매일 말씀을 암송한다. 그들은 내 앞에 서 외웠다. 모든 아이들이 각각 100개 이상의 말씀을 쉬지 않고 외운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고아들의 입술이었다.
4 현대인은 약을 먹어도 독이 되고, 밥을 먹어도 독이 되는 세상에 산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예수 믿으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 이것은 백신접종을 안 해도 된다는 식이 아니다. 예수님이 준 대사명이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복음을 들고 가난속으로 들어가라는 예수의 채근이다. 소외되고, 고통받고, 갇힌 이들 속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가라. 그러면 무슨 독을 마 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용기백배의 예수님의 격려이다. 다시 일어나자. 코로나 시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가자. 보내자.
코로나 이후, 교회는 선교현장과 더 거리 좁히기를 해야 할 것이다. 과거 선교라는 미명하에 잘못된 욕망과 탐욕을 채웠던 때를 성찰하며 더 아름답게 멋지게 선교현장에 찾아가자.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옴을 알려주는 샛별은 교회에게 선교현장이 되어 줄 것이다.
[편집자 주 : 2021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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