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민철] 진리 위에 세워진 삶 (2)

복음뉴스 0 2022.10.07 14:28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 이민철 목사(맨해튼성도교회) 

 

8-2. 진리 위에 세워진 삶 (2)

(LIFE FOUNDED UPON TRUTH) 

 

8-2장 진리 위에 세워진 삶(2): 프랑스의 저술가들이 표현의 명료함(clearness)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독일 사람들이 특히 형이상학적 사색의 재능과 학문의 어떤 견고함(solidity)과 철저함(thoroughness)이 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물론 어떤 독일의 저술가들은 상당히 표현이 명료하고 반면에 어떤 프랑스의 저술가들은 표현이 심히 혼란하다는 것이 인정(認定)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표현의 명료함이 특히 프랑스 사람의 문체의 장점이라는 것은 상당히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동양 사람들의 지적인 재능(intellectual gifts)에 대해서도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세상의 지적인 생활에 매우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바치고 있고 한층 더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바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와 저 시대 간의, 이 국가와 저 국가 간의 모든 변동 아래서도 진리에 대한 황금 표준(a gold standard)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의 저술가들을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들을 오해할 가능성을 인식한다는 바로 그것이 그들을 이해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듯이, 내가 중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의 지성적 변천 과정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한 어려움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설 수 있는 공통 지적 기반(common intellectual ground)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불변하게 남아있는 것은 단지 늘 변하는 지적인 형식들로 자신을 옷 입혀야 하는 어떤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끝없는 회의주의를 안전하게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한 세대의 확신들은 결코 어떤 기회에 다른 세대의 확신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주의에 안전히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신들(convictions)이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생활(生活, life)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지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흔히 그것을 참되게 하지는 않는다. 사실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what a man believes)은 굉장히 중요하다.

 

1889년 한 프랑스 현대소설가는 그런 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있는 책 하나를 썼다. 나는 그것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이 감동을 받았다. 그 책을 쓴 소설가는 프랑스의 일류 저술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한 권의 책은 확실히 읽을 만하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작가에 대해 매우 가혹한 경향이 있었던 한 프랑스인 강사 비평가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였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이 사람의 한 책을 읽었는데 그것은 나의 보잘 것 없은 판단으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나와 이야기했던 그 비평가는 말하기를, “, 이 작가의 그 책은 참으로 훌륭한 작품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그 책은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이 쓴 제자(Le Disciple, 1889) 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그 책은, 프랑스 저술가들의 탁월한 표현의 섬세함을 가지고, 한 유명한 철학자요 심리학자인 사람의 소박하고 엄격한 생활을 묘사한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지성적인 일들에 열중해 있었다. 그의 숙소는 4층 계단 위에 있었다. 그의 매일의 생활은 일정한 과정이었다. 6시에 커피를 마시고, 10시에 점심 혹은 아침 식사, 정오까지 산책, 4시까지 다시 연구, 4시부터 6시까지는 일주일에 3번 학자들과 학생들의 방문, 6시에 저녁 식사, 간단한 산책, 연구, 10시에 즉시 취침.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악의가 없는 학자적인 한 사람, 그의 집 관리인의 말대로 파리 한 마리를 해치지 않을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평화스런 과정이 이상하게 깨어졌다. 그 철학자는 형사 조사(criminal inquest)를 받기위해 호출되었다. 이전의 그의 한 제자가 살인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영리한 젊은이였었고 그가 자유를 주는 교훈들이라고 간주했던 것을 위해 충만한 열의를 가지고 그 4층 계단을 올라왔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그 교훈들에 심취했었다.

 

감옥 속에서 그는 그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존경하는 선생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썼다. 그 감옥 안에서 추상적인 것들이 구체적이게 되었다. 그 무서운 이야기는, 그러한 가상적(假想的)으로 자유를 주는 교훈들이 실제 행위로 나타나는 방식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짧은 책이다. 폴 부르제의제자에 대한 연구이다.

 

그러나 그 작은 책에서 그렇게 강하게 묘사된 것과 동일한 비극이 우리 시대의 역사 전체에서 거대한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50년 전 혹은 심지어 25년 전만 하더라도,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성경에 관한 어떤 견해들은 피상적인 관찰자에게 아주 존경할 만하고 아주 순진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즉 해롭지 않고, 부르제의 4층 계단의 철학자의 비극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현대주의 혹은 완곡한 표현인 자유주의’(Liberalism)는 이와 같이 달콤하고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완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민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더럽히고 있다. 그것은 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약속들이 교묘한 설명으로 모면되도록 하고 있다. 마침내 자신에게 해가 되어도 맹세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나 국가는 과거의 신기한 잔재(殘滓)라고 간주된다.

 

여러분은 깨끗함과 정직함과 자유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 세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가? 여러분은 그것이 살기에 좋은 세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장님(blind)일 것이다. 여러분은 인류가 오늘날 끝없는 심연의 구렁텅이 위에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야 할 것(pretty blind)이다.

 

나의 친구들이여, 속지말라.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는 이러한 생각, 교리(doctrine)는 중요치 않고 생활이 우선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사단의 병기 창고(Satan's arsenal) 전체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악마적(the most devilish)인 오류들 중의 한 가지이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시켰는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을 상심시켰는지! 그 프랑스 소설가는 완전히 옳았다(That French novalist is entirely right).

 

아주 존경할 만한 철학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살인, 간음, 거짓말 그리고 모든 악한 것이 나온다.

 

나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것에 대해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성경에 관해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나는 인간이 빠진 덫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단지 마침내 내가 여러분을 그러한 덫이 제거될 곳으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교리가 단지 생활의 변하는 표현(表現)인가 혹은 반대로 생활이 교리 위에 세워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여러분은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성경(聖經)을 아주 깊이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대답은 성경의 처음 구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은 권면(exhortation)으로 시작하는가? 성경은 하나의 생활 강령(program)으로 시작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교리(a doctrine)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근본 교리이다.

 

성경은 생활의 길을 제시한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할 때는 항상 그 생활의 길의 기초를 진리 안에 둔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통독해 보라.

 

구약성경에는 놀라운 생활 강령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십계명이라고 불리 운다. 그러나 그 십계명은 명령(命令)으로 시작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교리로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2) 이것이 십계명의 서문이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 강령이 아니다. 그것은 교리이다. 오직 이 교리가 참되기 때문에 - 그 계명들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 그 계명들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인간이 살아야 할 길에 대해 다른 하나의 놀라운 제시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과 같이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 인용(認用)되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30)의 말씀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계명 곧 사랑의 계명이다. 그런데 그것이 명령으로 시작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교리로 시작한다. 그것은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 신명기에 있는 그 구절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고 기록되어 있다. 오직 그 교리가 참되기 때문에 그 계명(誡命)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게시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그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다음에 신약성경을 보자.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말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치 않으며,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먼저 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생활을 교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현대적 형식으로 하셨는가?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을 제시하셨다. 그가 갈릴리에서 그의 공적인 사역(事役)을 시작하셨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4: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말씀하신 것 전부인가? 그는 단지 회개하라고만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도 그는 말씀하시기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고 말씀하셨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은 명령이나 생활 강령이 아니다. 그것은 교리이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명령은 이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우물가에 앉아 한 죄 많은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는 이 여인의 생활 속에 있는 아픈 곳을 지적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4:18)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생활 속에 있는 당황케 하는 죄 문제를 피하려고 하나님을 예배할 장소에 관한, 즉 그리심 산에서인지 예루살렘인지 하는 신학적 문제를 질문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신학적 질문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그는 어떤 현대의 종교적 사역자들의 방식과 같이 그것을 무시하셨는가? “너는 참된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너의 신학적 질문은 다음에 하고 지금은 너의 생활 속에 속에 있는 죄의 문제로 돌아가자라고 하셨는가? 아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 여인의 영혼이 마치 그 여인이 바른 대답에 도달하는 데 의존하는 것처럼 이 여인의 신학적 질문을 아주 충분하게 대답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리심 산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예배할 장소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때가 오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때, 이 죄 많은 회개치 않은 여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어떤 아주 심오한 신학적(神學的)인 교훈을 하셨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교리를 구원 받은 후에 따라오는 어떤 것이 아니고 구원에 필수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셨다.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에 대한 증인(證人)들이 되라고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며칠 후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이 명령을 순종하게 위해 일어났다. 그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그 위대한 설교를 하였다. 그가 그 설교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그는 사람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어떤 유리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현대의 종교교육이라는 더 없이 귀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확실히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혹은 그 밖의 어떤 것에 관하여 어떤 교리를 주장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고 생활만이 오직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련한 베드로여! 그는 현대의 종교교육(宗敎敎育)의 유익을 받지 못했다. 그는 다른 유리한 조건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즉 그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그 결과는 그의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교리적(doctrinal)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사건들)을 단지 제시하였다. 한 마디의 권면이 아니고, 어떤 생활 강령(프로그램)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오직 사실들, 사실들, 사실들, 교리, 교리, 교리이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마음에 찔렸다그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행할 바를 말했다. 3천 명이 구원을 받았다.

 

나의 친구들이여, 성경의 모든 곳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교리, 그 다음에 생활이다.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단순히 변하는 그리고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회의주의적인 생각에 대해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생활을 단호히 진리 위에 건립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이 진리를 받게 하시고, 구원 받은 후 여러분이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각주]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185292일 아미앵에서 태어나 19351225일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작가, 수필가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다. 문학에서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반항의 신호탄을 쏜 부르제는 처음에는 실험적 분석 소설에 몰두했다. 풍습과 성격에 대한 부르제의 섬세한 연구는 제3공화국 시기 파리의 살롱에 드나든 사교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부르제는 먼저 평론가로 출발하여 <현대 심리논총(論叢)>(1883)에서 1880년대 작가들의 염세사상을 해명하였다. 부르제의 첫 소설들 – 『잔인한 수수께끼Cruelle énigme(1885), 사랑 범죄Un crime d'amour(1886), 거짓Mensonges(1887) 또한 현대성이라는 꿈을 찾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부르제는 뒤이어 방향을 바꾸며 자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소설 제자Le Disciple(1889)를 시작으로 "문제 소설", 즉 관념 소설로 향했다. 부르제는 더 이상 풍습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불가항적인 법에 굴복한, 그리고 그것의 위반이 모든 개인적, 사회적 무질서를 만드는, 그 기원과 원인의 베일을 벗기고자 했다. 이 새로운 길은 부르제로 하여금 휴계L’Étape(1902), 이혼Un divorce(1904), 오후의 악마Le Démon de midi(1914)와 같은 더 많은 심리 소설을 쓰게끔 이끌었다. 부르제는 이후 천주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그의 문학 활동과 소설 지향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통해 그는 과학과 신앙의 통합을 시도했다. 부르제는 20세기 초 당대 사회, 정치,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 심리소설가이자 모랄리스트로서 자신의 재능을 적용하고자 했다. 부르제의 다양한 작품으로는 젊은 시기의 시, 수필과 몇몇 극작도 있다. 부르제의 정치 활동은 대체로 문학 표현의 일환이었지만, 그럼에도 활동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왕정에 옹호적인 전통주의 소설가, 천주교도, ()드레퓌스주의자(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는 포병 대위로서 참모 본부에 근무하던 중, 1894년 독일에 군사 기밀서류를 팔아넘긴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다. 1898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장 발표 후 재심되었으나 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1899). 같은 해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고, 190672차 재심에서 무죄가 확인되어 복권되었다.3공화정 최대의 위기였다고 전해지는 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정치는 민주적 방향으로 재편성되고, 사상·문학면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로서의 입장을 수차례 보여준 모습은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마저 논란을 낳으며, 오늘날 그의 진가를 가리거나, 심지어 과소평가되어 잊혀 지게 만들었다.

 

* 2022년 9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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