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앙의 초절기교
글 : 이선경 (퀸즈프리칼리지 지휘자)
초절기교(Transcendental Etudes)는 초절정, 초월적 기교라는 뜻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연주, 헝가리 태생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열 두개의 피아노 곡으로 작곡한 에튜드이다. 클래식 음악의 변방국인 한국이 제 16회 반 클라이번 (Van Clibur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국제 피아노 대회에서 18살 소년 임윤찬 군이 우승을 했다. 얼마 전 쇼팽 콩클에서 우승한 조성진에 이어 클래식 음악계의 국제적 위상이 승격화 되었고 한류의 열풍은 K 클래식으로 지경이 확대되었다. 임윤찬은 최연소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리스트의 초절기교의 해석을 성숙하게 표현했다. 초월하는 신앙, 영적 초절기교의 해법으로 음악과 믿음의 영역에서 주는 의미를 상고해 본다.
속도는 빠르기인가?
음악은 시간 예술이다. 템포(Tempo)는 시간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창조 이후,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음악도 신앙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즉 물리적인 시간과 초월적인 시간 사이에 공존해 왔다. 과학적이고 물리적인 템포는 기능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카이로스에서는 물리 현상적인 시간의 영역을 초월하게 된다. 이번 반 클라이번 대회에서 보여 준 임윤찬의 연주에서 템포는 빠르기의 변화가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특별히 초절기교 제 4번 ‘마제파’(Mazeppa)는 템포가 주는 시간 개념을 음악적으로 극대화시킨 작품이면서 초월적인 순간의 시간을 연주자를 통해 전달한다. 물리현상적인 시간과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의 시간 또한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지만 삶을 어떤 템포로 믿음의 연주로 이어 나갈지는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는 속도에 집착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속력에 열광한다. 이것은 단순히 ‘빠르다’라는 속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이면서도 감성적, 영적 원리가 내포 되어 있다. 연주의 극적 표현을 위해 속도의 완급조절을 한다. 템포에 있어서 완급조절은 인위적인 의도에서 출발한다 할지라도 결국엔 연주자의 깊은 경험과 성찰이 가져다주는 내공이다. 신앙도 완급조절이 있어야 한다. 질주하는 신앙, 브레이크가 없는 믿음은 곧 시간 절제의 결핍을 말한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처럼 계속적인 질주는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속도의 완급, 자기 멈춤의 시간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템포가 필요하다.
단절과 고립
영국 매체 그라마폰은 “임윤찬의 지적인 기교와 리스트 양식에 대한 완전한 몰입은 진정 초월적이다.”라고 극찬했다. 극한의 모험과 도전, 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가. 쉬지 않고 65분 동안 리스트 초절기교를 친다는 것은 새로운 모험이다. 도전과 몰입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역설적으로 두려움이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한다. 단절과 고립은 임윤찬의 감추어진 내적 내면의 실력이다. 극한의 몰입은 압도적인 에너지로 청중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이처럼 신앙에서도 단절과 고립의 시간이 요구된다. 외부와의 단절과 소통의 벽을 차단해야 할 때가 우리 내면의 감추어진 진정한 실력을 갖게 된다. 인터뷰에서 ‘피아노와 둘이서 산으로 가고 싶어요.’라고 말한 그는 스스로 단절과 고독의 시간을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 분주하고 떠들썩한 주변을 멀리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자신만의 단절과 고립의 동굴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약함의 능력
도전은 여건과 환경과 무관하다. 리스트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의 손은 10개의 음을 단번에 칠 수 있는 거인의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이번 콩클의 세미 파이날에서 선곡한 곡이 작은 손을 가진 임윤찬의 선택이였다는 것은 그가 가진 신체적 조건이나 환경을 뛰어 넘는 약함의 능력을 보여준 연주였다. 우리는 좀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신앙 생활하려 한다. 주위의 환경을 어느 정도 배려해 가면서 정도의 타협과 유익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지나친 배려와 과잉에서 오는 영적 손실, 신앙의 개인주의 성향, 이 모든 것들은 도전과 몰입의 장애이다. 모세도 다윗도,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들의 가장 약한 시간에 오히려 믿음의 야성을 형성하는 시간이였다. 연약한 시간을 어떻게 도전과 몰입의 시간으로 고군분투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야성과 한 끗
야성은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창조적 내재적 기질이다. 임윤찬의 결선 연주는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ff, 1873-1943) 피아노 협주곡 제 3번이였다. 마치 손가락에서 불이 뿜어 나오는 듯한 야성적 기질이 소리로 압도되어 나온다. 특히 카덴자 부분의 해석은 작곡가의 초고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약함의 야성을 보여 주었다. 거침 없는 터치, 몸의 모든 무게가 열 손가락에 실려 있었다. 임윤찬이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른 점이 이 약함이 주는 야성에 있다. ‘The Small Big’ 2014년에 노아 J. 골드스타인, 로버트 시알디니와 스티브 J. 마틴이 출판한 책의 타이틀이다. 이 책에서 ‘Small Changes That Spark Big Influence’ 가 말해 주듯이 임윤찬의 연주에서 작은 디테일이 주는 효과는 청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콘체르토 연주에서 손가락의 터치 각도에 따라 작고 미묘한 사운드의 칼라가 감지된다. 열 손가락에 배분되어지는 각각의 앵글과 힘의 조절은 청중의 심령에 스파크를 일으키게 했다. 음악에서 작은 디테일이 큰 차이 (Big Differences)를 만든다. 우리말에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에도 미묘하고 디테일한 끗의 차이가 있음을 연주를 통해 깊이 숙고해 본다.
달라진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그의 인터뷰에서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 내용이다. “큰 콩클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목적이 세상의 명예나 부귀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세상의 칭찬이나 박수갈채에 함몰될 때 그 순간부터 예술의 순수한 의미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양심고백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18세의 젊은 청년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음악의 본질을 확고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인 손민수 교수는 제자 임윤찬을 옆에 두고 말했다. "테크닉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 다시 음악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바로 초절기교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진정한 초절기교가 무엇인지 말해 준다.
결국 임윤찬은 아무리 작은 연습실 안에서 하루 종일 피아노에 몰입해도 지치지 않고 작아지지 않고 자기 단련과 자기 도약의 길을 의연히 걸어갔다고 믿어진다.
‘속도는 빠르기가 아니다’
‘단절과 고립의 동굴로 들어가라’
‘약함의 능력으로 일하라’
‘신앙의 야성, 그 한 끗으로 결판하라’
신앙의 초절기교
그 인생으로 연주하다.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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