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목을 걸고
글 : 김용복 목사 (City Fellowship Mission )
1971년 법대 2학년때, 교련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정보가 돌았다. 고등학교에서는 교련이 이미 시작되어, 대위 한사람이 학교내에 파견, 훈련하고 있었을 때다. 그런데 대학에도 교련이 생긴다 하니, 군사독재의 본격적 시도라는 위기인식과 비판이 학생들 내에 커지기 시작했는데, 새 학기 3월부터 대학에 정말 교련이 필수 과목으로 되어, 모든 남학생들이 교련 훈련수업에 참석해야 되었다. 그래서 교련거부, 반대가 시작되어 데모도 하게 되었다. 1971년 한 해는 법대생 모두가 교련을 거부,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12월 방학 중에, 집으로 엽서 하나가 배달되었다. 일년동안 교련 안 받은 것을 12월 며칠인가 그 날 하루만 오면, 다 이수한 것으로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할 거면 뭐 하러 일년동안 최루탄 가스 마셔가며, 반대했나 싶어, 당연히 그 보충수업일에 가지 않았다.
그러고 두 어 달이 지난 1973년 3월에 군대 입영 위한 신체검사 영장이 왔다. 경기도에서 제일 먼저 열리는 신체검사장인 안성(나는 인천인데)에 가서 신검을 받는데, 같은 처지의 ‘반정부?’ 학생들이 다 소집되어 왔다 (실제로 내 병적부를 보니 빨간 스탬프로 A.S.P. =Antigovernment Student Power 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열정적 주동자도 아니고, 그냥 학생들 집회에 참여한 단순학생 정도였는데, 과분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때 느끼기에는, 개인적으로 신체가 허약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모두 다 갑 1종(최상급)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달에 입영하라는 영장이 날라 왔다. 보통은 신체검사 받은 후 1년뒤에 영장이 나오는데. 그런데 법대학장님이 만나자 해서 갔더니, 법대생 중에 교련 안 받아 군대가게 된 학생이 나 하나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연기하고, 졸업을 하도록 권하셨다. 그래서 사법시험 1차 합격했으니, 2차 시험 위해 입영연기신청, 군 법무관 시험 2차 위한 연기 신청 등으로 연기해서 3학년, 4학년 중반까지 수차 연기를 받았다. 그런데 졸업 전에 나온 입영영장이 또 있어, 그 때는 해군장교지원으로 연기하고, 졸업하고 74년 4월 1일 입대, 4개월 장교훈련 받고 소위 임관해서, 중형 전투함 갑판사관에 보직 되었다.
배를 타고 동해 바다 경비로 출동했다. 갑판사관은 함내의 제일 초급 장교가 맡기는 하지만, 함정의 모든 장비와 보수를 하는 부서라 부하는 다른 부서에 비해 제일 많았다. 사실 경험 많은 갑판중사, 갑판상사가 있어 한 달 출동 중 첫 일 주일동안 실무를 많이 가르쳐 주어 너무 고마웠다. 일 주일 동해 경비후 보급차 ㅇㅇ 항에 아침에 입항했다. 점심때, 4시 출항까지 상륙(외출)이 허용되어, 고마운 갑판부 중사, 상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와 음료 대접하러 같이 읍내로 나갔다. 생애 처음 바다에서 일 주일을 지낸 후라, 맛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먼저 떠났고, 나는 음식값을 계산하는 등 다른 일로 시간이 좀 지나갔다. 부두가 가깝지만, 거의 4시가 다 되어, 택시를 타고 우리 배가 정박해 있는 부두로 도착하는 데, 아 !!! 우리 배는 이미 부두를 떠나 항구 방파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아마 4시 1분 정도 되었던 것 같았다. 부두에 다른 조그만 보트정장에게 부탁하여 타고 좇아 갔으나, 우리 배는 이미 방파제를 지나 큰 바다로 나섰기에, 보트는 다시 부두로 돌아 오게 되었다. 나는 작전중 미귀를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우리 배는 다음 보급예정인 일 주일 후에 다시 그 항구에 돌아 올 것이라, 나는 할 수없이 서울 집으로 갔다가, 5일 만에 그 항구에 돌아 왔더니, 태풍경보가 있어, 우리 배는 큰 모항인 진해로 피항을 가서, 다시 일 주일 뒤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 항구 읍에서, 며칠을 머물며,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찾아보니, 그 당시 군형법에 작전중 미귀는 5년이상, 무기징역 형이고, 전시에는 사형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휴전중이었으니, 전시인 것 같았다. 불안하지만, 하여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며칠 후 우리 배가 항구에 들어 왔다. 2 주간 미귀 끝에 내가 부두에 들어와 내리는 함장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함장은 딱 한 마디를 했다, “들어가 있어!”. 그 뒤로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함장은 미귀한 나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용납한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 후로 1년여 함정근무를 잘하는 중이었다. 새 함장이 부임했다. 휴가 내 보낸 갑판 수병(계급이 일병이었던) 하나가 집안 사정이 무언가 어려웠는지, 휴가가 끝났는 데도 돌아 오지 않았다. 휴가 끝 날 오후 5시가 넘어도 미귀이면, 즉각 상급 기관에 미귀보고를 하는 것이 윈칙이었다. 그런데 그 수병의 직속 상관인 갑판 중사와 상사가 찾아와 요청했다. “미귀 탈영처리 하면, 이 수병은 전과자 되고 호적에 빨간 줄 거져서, 인생 끝납니다. 우리가 이 밤에 그 애 네 집에 쫓아 올라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끌고 내려오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시고, 미귀보고를 하지 말아 주십시요.” 내가 결정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 함장에게 보고했다. 함장은 그러라고 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인데도, 목을 걸고(잘못 되면, 군복 벗을 각오를 하는 것이므로) 그 밤을 넘겼다. 그 수병은 다행히도 붙잡혀와, 전과없이 군복무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 진짜 목회를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목회를 잘하려고 했다. 그런데 목회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목을 걸고(목숨걸고) 하는 것 같다.
어느 가수가 “소리를 아니까, 허리가 휘더라!” 했는데, 나도 이제 겨우 그 것을 알았는데, 날이 많이 저물었다.
* 2022년 5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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