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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호] 성도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뉴스 0 2022.08.13 09:14

제목 : 성도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 정관호 목사 (뉴욕만나교회)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교회의 정의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아니, 교회는 누구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이런 삼위일체적인 정의를 매우 좋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의 백성들이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들(members)이며, 교회는 성령의 전 곧 성전으로서 함께 지어져 가고 함께 거룩해져 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네 가지 사명

우리는 또한 교회가 적어도 네 가지 사명이나 직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네 가지는 첫째 예배, 둘째 교육, 셋째 성도교제, 넷째 선교입니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려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 찬양, 기도, 헌금 등이 주요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으로서 교회에 속해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교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일을 말합니다. 선교란 국내외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말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오늘 주제는 교회의 사명 가운데 세 번째 요소인 성도교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만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우리 자신의 몸처럼 곧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2:37-40에서 율법의 대강령(본 뜻)을 이렇게 요약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본 뜻, 요체, 요약)이니라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이웃사랑에는 한계(limit)가 없습니다. 또한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다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끝과 한계가 없음을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우리의 이웃을 우리 가족에만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이웃을 같은 교회 다니는 교인에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이웃을 이웃집에 사는 친한 사람에 국한해서도 안 됩니다. 같은 민족인 한인들에게 한정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이웃은 그 모두입니다. 아니 우리의 원수까지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마태복음 5:44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이 이토록 끝없이, 한계 없이 펼쳐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사랑이 이토록 끝없이 나아가야 하지만, 그 이웃사랑에도 우선순위와 그 크기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남다른 사랑의 대상인 다른 그리스도인들

우리는 그 누구라도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같은 신앙을 지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남달리 사랑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일반은혜를 통해 신자나 불신자나 다 사랑하셔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며 그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다 내리시지만, 특별히 그의 백성 된 성도들에게 구속의 은혜, 특별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10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는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가 기록한 요한1서에서 형제사랑, 성도교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게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13:16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1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사랑 가운데서도 특별히 먼저 성도들 사이에서의 서로 사랑,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것과 성령의 전(성전)임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성도의 교제, 성도의 서로 사랑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임을 확인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3:34-35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곧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 곧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서로 사랑함이 없다면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20-21에도 이 진리가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성도의 서로 사랑, 성도의 진정한 교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지닌 참된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해 주는 표지(mark)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성도교제가 중요합니다.

 

성도교제가 어려운 이유, 그러나

그런데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진정한 성도 교제를 나누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안에는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교회의 교인들로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우선 남, 여가 함께 섞여 있고, 연령층도 어린 아이로부터 80세 이상 되는 고령층의 어른들도 있습니다. 지역별로도 영남, 호남이 있고, 이북 출신, 이남 출신이 있습니다. 학력도 대학원을 졸업한 분들도 있고, 초등학교 정도밖에 나오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잘사는 중상류층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서민층이나 가난한 자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함께 어울리는 일이 그리 쉽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교회 내에는 여러 다른 성격의 소유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이 착하고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말 무슨 이유인지, 자라나온 환경 탓인지, 가정 탓인지, 성격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꼬이거나 열등의식이나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제 그들도 신앙 생활해 나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의 지배와 충만을 통해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교회 생활 10, 20년 해도 변화되지 않는 고집스러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함께 어울려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아름다운 성도 교제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도 교제를 이루어 나가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 되었음을 믿어야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 스스로 이미 하나 되었음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 되라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가장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이미 성령으로 하나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우리 자신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곧 내 생각과 견해, 내 일하는 방식과 행동, 내가 살아가는 습관, 내가 배운 교회의 전통과 생활 등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될 때라도 우리는 그 서로 다름이 우리의 서로 같음’ ‘서로 하나 됨의 본질과 그 교제를 깰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정에서 오랫동안-10, 20년 이상 오랫동안-살아왔어도 여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차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일로 서로 마찰도 생기고 갈등도 생기고 분쟁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삶의 기반인 가정을 깰 만한 일은 아닙니다. 가정이란 판-그 소중한 판-은 어떻게 하든지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라도 그 하나 됨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르고 서로 힘들어 하는 부분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아니 영원까지 함께 나아가야 할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성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 됨: 하나 되었음의 사실을 계속 확인해 나가는 과정 없이는 성도 교제를 지속해 나갈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힘써야

둘째, 이 연합(unity,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 우리 각자가 힘써야 합니다.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은 그냥 놔두어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 힘써 지켜야 합니다.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어떤 노력입니까? 에베소서 4:2을 보면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겸손, 온유, 인내, 사랑, 용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 내에 일꾼들(교역자들,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 찬양대원, 교사 등)은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예수 그리스도)과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정말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 안에서 나 말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더 칭찬받고, 사랑받고, 인정받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시기심도 생기고 경쟁의식도 생겨서 그런 사람을 은근히 견제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비판을 넘어 비난하기조차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교회 내에서 신앙 생활할 때 특히 언어생활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서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역시 제게 하는 주변 사람들의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이와 반대로 혹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제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섭섭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야고보서 1:19에서 사람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정말 특히 말하기를 좋아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는 속히 하지만 말하기는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팝송 가사에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란 가사가 있습니다. 대답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란 말입니다. 여러분, 일언삼사(一言三思)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번 말하기 위해 세 번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잠언 12:16에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어도 슬기로운 자는 수욕(치욕)을 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25:11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과하고 용서하는 일이 있어야

셋째, 진정한 성도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인 우리 사이에는 서로 사과하는 일(용서를 비는 일)과 용납하는 일(용서를 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같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서로 대화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와 사정과 배경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코드(code)가 맞지 않아서 코드(chord)를 이룰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그마한 한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해 버린 후 아예 상종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잘잘못은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라는 베드로전서 4:8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고 자신을 잘 성찰해서 나의 섣부른 말이나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교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줄 일은 없는가, 그로 인해서 상대방이 힘들어하는 경우는 없는가를 살펴서 사과하고 용서를 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그가 어떤 행동을 했건 또는 그가 사과를 했건 하지 아니했건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이런 용서를 비는 일용서하는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로 자기 마음에 큰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신앙생활에서도 엄청난 피해자로서 사는 불행한 자가 아닙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그 누구라도 함께 해야 할 성도교제

성도교제는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만 있는,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성도교제는 교회 내에 있는 그 누구라도 함께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어느 다른 교회들의 경우 교회 성도의 수가 갑자기 많아지거나 또는 다른 교회와 합병하거나 다른 교회 교인들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성도 교제에 분파가 생겨 가까운 사람들만 서로 끼리끼리 따로 노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도 끼리끼리, 교회 내 식사할 때도 끼리끼리.

교회는 지금도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내에 절친한 교우가 있더라도 너무 티(?) 내지 말고 교회 내에서는 그런 친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서 이야기도 하고 안부도 묻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교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새 교우가 적응하는 기간이 적어도 3-6개월 걸립니다. 그동안 잘 배려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잘 적응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힘써 도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안이 민감한 정치문제, 사회문제, 지방색 등의 토론으로 서로의 교제가 파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를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서로 사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곧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2022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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