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현대의 목사가 명심해야 할 것 2 가지

복음뉴스 0 2022.04.15 18:41

 

목회 이야기 11 - 현대의 목사가 명심해야 할 것 2 가지 
글 : 이종식 목사 (베이사이드장로교회)



1. 편안함과 풍부함에 젖어 나태해 지지 말고 모이기를 힘쓸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모든 것이 발전되고 편안해지고 있다. 손가락 하나만 누르면 거의 모든 것이 작동 된다. 그리고 전화 하나면 어디서든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다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영적인 일도 그런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예배도 전화기를 통해 얼마든지 드릴 수 있고 번거롭게 어디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코로나 펜데믹을 통과하면서 더욱 그런 자세가 보편적으로  생활화 된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 펜데믹이 끝나가는 무렵을 맞이하여 목사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마냥 편안함과 풍부함에 젖어 살면 결국 영적인 침체를 맞아 영혼이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11장 1-4절을 보면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기 시작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노아 홍수 후에 노아의 후예들은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 동쪽으로 옮겨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흩어지지 말자고 약조하였다. 그리고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벽돌을 구워 탑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나중에 이것이 바벨탑으로 불린다. 왜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했을까? 시날 평지는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두 강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이다. 훗날 바벨론이 이곳에서 번영을 누리게 되는 비옥한 땅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좋은 조건의 땅을 보면서 사람에게 평안과 번영이 오면 위험한 순간을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 것을 누리는 것에 집중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의 사람들은 무슨 하나님의 명령을 잊은 것일까? 하나님은 노아 홍수 후에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기를 온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뜻은 세상에 흩어져 땅과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옥한 시날 평지를 만났을 때 거기에 안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바라는 바는 번영과 편안함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때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영과 편안함을 구할 때 그다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굳게 결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로 가게 되고 그 결과는 바벨탑에서 일어난 일처럼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좀 창피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지난 주일에 교회 앞에 부활절 주일 때부터 저녁 예배를 드리겠다고 광고한 후에 생각해 보니 힘들 것 같았다. 주일 1, 2, 3부 예배를 인도하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다는 것이 체력상 문제가 될 것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주일 저녁 예배를 좀 더 미루어야 할 것 같아 명분을 찾기 위해 여론 조사를 해 보았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일 저녁 예배를 다시 드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내가 예상했던 대로 다들 무리일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은 것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일날 집으로 돌아가서 집사람에게 물었더니 하는 말이 당연히 드려야지 무슨 소리냐고 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그동안 늘 주일날 저녁에 예배를 드려왔고, 주일 저녁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많고 전도도 되니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하는 집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나의 체력은 생각지도 않고 말하는 것 같아 섭섭했지만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단 말을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였지!”라고 속으로 말하며 내가 청소년 시절에 파라과이와 브라질 살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도 역시 한인 교회는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단순히 참석한 것만이 아니고 그때는 바쁘게 뛰어다니는 일들이 많았지만 한 주 동안 오직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이 기억났다. 고달픈 이민 생활 속에서 나는 교회를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사모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에 예배드리고 저녁에도 당연히 예배드리면서 정말 행복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왜 주일 저녁 예배가 힘들게 느껴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코로나 19를 통과하면서 나도 모르게 편한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현대 교회에 왜 예배가 자꾸만 줄어들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세상의 풍부함 속에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요 예배도 없어지고, 주일 저녁 예배도 없어지고 단 한 번 주일 예배만 드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힘들게. 그렇게 되니 성도들은 육신은 편안한데 영은 점점 힘을 잃고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의 전통 있는 교회 중에 계속 살아 움직이는 교회들이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특별히 주일 저녁 예배는 누릴 것이 많은 부자 백인들에게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닌데 그들이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대단한 영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안식년 때 필라델피아에서 주일 아침엔 선배가 목회하는 교회를 출석했고, 저녁에는 그 교회는 저녁 예배가 없어서 설교가로 유명했던 짐 보이스 목사가 시무하던 제 십장로 교회(the tenth presbyterian church)를 출석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교회가 저녁 6시에 예배드린다는 말을 들으며 과연 몇 명이나 모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교회는 필라델피아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고, 교인들이 다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와잍컬러인데 과연 그런 와잍컬러들이 그 황금 같은 주일 저녁에 교회에 올까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한인 교회들 중에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저녁 6시에 드리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주일날 집에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 불편한 관계로 오후 2시나 3시에 드리고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모습은 예배를 안 드리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람 입장을 너무나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편리를 봐주기 위하여 예배를 몰아서 드리는 모습은 해치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제십장로교회가 오후 6시에 드리는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양복과 코트를 입은 신사 숙녀들이 교회로 모여드는데 장관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이 교회가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가 된 것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풍부한 삶이지만 주일을 온전히 지키며 예배에 힘쓰는 모습을 보며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결심하기를 우리 교회도 주일 저녁 예배에 힘쓸 것을 결단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교회는 순모임 후에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필라델피아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오후 6시에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다가 코로나 19를 만나 드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 나부터 힘든 생각이 든 것이다. 주일날 쉬는 평안함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장 23-2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은 성도는 믿는 도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하고,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올 수록 더욱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발전되고 바쁜 뉴욕에 위치해 있다. 이런 곳에서 사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곳에서도 모이기를 힘씀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전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2.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지 말 것 


그다음으로 창세기 11장 1-4절에서 살펴볼 것은 시날 평지에서 풍부함과 번영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이 한 일은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창세기 11장 3, 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탑을 쌓으려고 한 목적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이런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세운 탑은 정말 훌륭한 것이었을까? 성경학자들은 바벨탑은 신전으로 사용되는 건축물로서 피라미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높이가 약 90m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높이를 대략 감으로 잡으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에 높이가 381m가 된다. 그러니까 바벨탑의 높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약 4분의 1수준인 것이다. 지금 보면 별로 높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벨탑은 빌딩도 아니고 벽돌 무더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정도 되는 것을 쌓아 놓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말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자는 뜻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 창세기 11장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인간의 도전적인 행동을 보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인간의 그런 행동을 보시고 어떠셨을까? 시편 2편 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이 말씀은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생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바벨탑을 지어 놓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로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만들고서는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이룬 것을 통해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생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교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 그 사명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어려움은 목사가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기관의 장이 되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분열을 일으키고, 명예를 위하여 학위를 사기도 하는 모습을 볼 때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엔 우리에게 붙는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를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목사로서 “저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산 욕심 많은 자였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저 사람은 교회에 덕을 끼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는 일을 하다 간 겸손한 목사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사람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는 그래도 자기 이름보다는 나의 이름을 높이려고 노력했던 나의 종이었다는 말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편집자 주 : 2022년 4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1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