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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훈] 사랑의 수고하세요!

복음뉴스 0 2022.04.14 19:03

쉼표 ③  「사랑의 수고하세요!」

글 : 박시훈 목사 (뉴욕함께하는교회)



매년 2월이면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밸런타인데이(Valentine‘s day)’ 입니다. 밸런타인데이의 유래가 여러 가지 있 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당시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 는 결혼한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고 판단하고, 징집된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발렌타인 신부는 사랑에 빠진 어느 병사의 결혼을 몰래 허락하고 주례를 섰다가 AD. 270년 2월 14 일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 후 발렌타인 신부가 순교한 날을 축일로 정해 해마다 연인들의 날로 기념해왔다는 것입니다. 그 런데 지금은 그런 순수한 사랑의 고백과 의미 를 되새기고, 지키려는 노력은 온데간데 없고, 여기저기 상업적 목적으로 한 장식과 선물들이 거리마다 넘쳐납니다. 1936년 일본의 ‘모로 조프 제과’에서 2월 14일이 되면 ‘고마운 분들에게 초콜릿을 전하자’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전 세계적인 상업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매해 2월이 되면, 누구든 관심 두고 싶지 않아도 관심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날이 바로 밸런타인데이입니다.

 

며칠 전 마켓에 들렀다가 ‘밸런타인데이 선물’ 코너를 보고, 아내와의 연애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은 매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저와 아내는 4년 연애를 했는데 먼저 아내가 저를 위해서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주면, 저는 다음 ‘화이트데이’ 때에 더 큰 감동을 주고자 고민, 수고, 정성을 다해 선물을 준비하여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나름 저렴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바구니를 장만하고, 예쁜 포장지도 사고, 거기에 초콜릿과 선물을 가득 채우고, 아름다운 꽃다발에 케이크까지 준비하여,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나 아내에게 모든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낯뜨겁고 창피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사랑의 이벤트가 저희 부부 사이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솔직히 언제 마지막으로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기념했는지, 정성스럽게 선물을 준비해서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분주한 삶에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다음번에 더 좋게 보내자”라는 말과 함께 지나쳐 버릴 때도 종종 있습니다. 어느덧 결혼 22년 차니 그저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인데 무슨 날을 기념하고, 이벤트나 선물이 중요할까 싶지만, 문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부부 사이에 사라져버린 것이 그것 뿐일까?” 곧 단순히 특정한 날을 기념하고, 어떤 이벤트를 하고 선물을 전해주는 것을 떠나서 전과 달라진 모습이 많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수고’라는 것에서부터 게을러진 것이 가장 달라진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는 저희 부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모든 부부, 가정 안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일 것입니다.

 

한국의 ‘이혼 전문 변호사’ 최유나씨의 칼럼에 의하면, 부부가 이혼 상담을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당신 변했어!’라고 합니다. 결국 연애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차츰 변해가는 배우자에 대한 실망이 이혼까지 결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변한 것이 배우자만일까요? 나는 변하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고 거기서부터 자유함을 맛보고 싶어 하지만 정작 문제의 원인은 자신 안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곧 지금 현대 부부, 가정 안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의 원인은 변해버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과 다르게 사랑의 수고에 있어 게을러진 모습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하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수고’를 결심하고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은 동사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곧 ‘진정한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동하는 사랑도 내 입장에서 좋은 것만 하려고 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무례하게 되고, 상처와 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사랑을 하되 그것도 상대방의 형편과 입장에 맞춰서, 위하여 기꺼이 수고해야 합니다.

 

특별히 ‘사랑의 수고’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명 ‘세족식’이라고 부르지요. ‘ 그런데 그때 발 씻을 물은 누가 준비했을까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발 씻을 물을 준비하신 분도, 발을 씻기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로 부터 약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수고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함께해주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등등 그래서 예수님의 수고 하는 사랑을 확신하고, 경험한 성도는 누구라도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수고함이 부부 사이, 가정 안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만약 그 사랑의 수고를 직장과 사회 속에서 감당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으로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럼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칭찬 받고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3)”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진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가 ‘사랑의 수고’ 였고 이는 곧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모습이며 자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가 더욱 교회다워지고, 부흥하며, 자랑이 되게 하는 데는 화려한 성전과 잘 갖춰진 예배 시설, 스펙(Specification) 좋은 목회자나, 유력한 구성원이 아니라 각자가 서로를 위해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하는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군시절 통신병으로 복무하며, 군종병의 역할을 병행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감동을 주시길 병사들을 심방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일어나기 싫어서 계급 낮은 병사들이 근무 서는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에 말입니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하나님의 요구에 결국 항복하고 대신 일 주일에 이틀만 하겠다고 타협했습니다. 그래서 일 주일에 두 번 강원도 철원의 혹독한 추위를 몸과 마음으로 다 견디며 따뜻한 차와 초코파이를 들고 초소마다 병사들을 심방 다녔습니다. 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계급 낮은 이등병, 일병들이 그 시간 대에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함께 기도로 위로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교회를 나오지 않던 병사들이 하나 둘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의 작은 사랑의 수고에서 비롯된 새벽 심방의 효과였고 열매였습니다.

 

이 세상에 수고 없이 얻고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가난뿐이다”라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부부관계가 좋아지는 것, 가정의 행복 그리고 직장과 교회의 평안과 아름다운 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부터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때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향해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부탁해봅니다. “사랑의 수고하세요.”

 

[편집자 주 : 2022년 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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