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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찬양 하는 기타리스트, 김명민 전도사

복음뉴스 0 2022.04.13 11:28

나의 인생 나의 노래 ⑧  찬양 하는 기타리스트, 김명민 전도사 (푸른 하늘 교회)

인터뷰 및 정리 : 김현기 목사 (필그림선교교회 예배 및 미디어 담당)

 

 

Q.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푸른하늘 교회를 섬기는 김명민 전도사입니다. 

 

Q.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하셨나요? 


저는 1972년에 태어 났구요. 부모님이 시골 전라남도 영광, 함평이란 곳이 있었는데 왔다갔다 하시면서 목회를 하셨어요. 영광군 백수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긴 촌도 완전 깡촌이었습니다.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을 막 걸어다니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반주자가 없어서 급하게 기타를 배우고 2주만에 아버지에게 급하게  배우고 반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겨울방학 긴 시간동안 잠만 자고 하루종일 기타에만 매달리고 하게 되었더니 제법 잘하게 되니까, 고등학교에서도 계속 기타를 쳤고, 대학에서도 기타를 치고, 군대를 가서도 연주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렇게 계속 기타를 치고 사역을 하게 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Q.군대에서도 연주를 했다면 혹시 군악대를 가신 건가요? 


사실 대학에서의 전공은 중국어였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공부하지 않은 제가 굳이 군악대를 간 것은 아니구요. 논산 훈련소에 입대해서 훈련을 받고서 박격포병으로 보직을 받고 전방으로 자대배치 받을 것을 예상하고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의 군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군인교회 였죠. 훈련소의 거의 막바지에 그 군인교회의 예배에 한 3천명정도가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그곳 조교들이 모여서 찬양팀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그 순간 제가 엉뚱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곳에서 찬양할 수 있게 허락하신다면 제가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는지, 제가 그곳의 조교요원으로 남게 된 거예요. 한 400명의 대기하고 있는데, 어떤 병장이 들어와서 “이중에 한자 잘 읽는 사람 손들어” 이러길래 제가 중국어 전공이니 한자는 자신이 있어서 손을 번쩍 들었죠. 손든 사람들 10명중에 타이핑 잘 하는 사람을 찾길래 계속 들고 있었더니, 결국 4명이 남아서 불려갔습니다. 

 

제가 불려간 곳은 논산 훈련소 감찰실 이었고, 가서 타이핑 테스트를 하는데, 제가 4번째로 하게 되었죠. 그런데, 마침 제가 키보드에 손을 딱 올리는 순간 컴퓨터가 먹통이 된거예요. 그러더니 그 심사하는 소령께서 저보고 “너 진짜 타이핑 잘하지?” 물어보셔서 일단 무조건 잘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잘하는 타자 솜씨는 아니었거든요.  결국은 제가 뽑혀서 전 논산훈련소 감찰실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게 된겁니다. 

 

그리고는 이등병으로 내무생활은 했지만, 논산 훈련소의 교회에서 예배를 할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한 3주쯤 지났는데, 훈련소 교회의 찬양팀에 기타 치는 고참이 제대를 하게 되었고, 기타칠 사람을 찾길래, 제가 그 자리 들어가서 제대할 때까지 한주도 쉬지 않고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 감찰실에는 중령이 실장이고 3명의 소령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인 박병삼 소령이란분이 엄청나게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이력서를 보다가 모태신앙에 목회자 자제라는 것을 알고 참모에게 이친구를 뽑겠다고 이야기를 해서 타이핑 실력도 보지 않고 뽑히게 된거였습니다. 

 

제가 그런 엉뚱한 기도를 한지 딱 두달만에 그 기도가 이루어진 거예요.너무나 기적이죠. 그리고나서 군악대에 기타를 치러 파견도 나갔어요. 군악대 연주후에는 10일짜리 포상휴가도 받았었는데, 제대할 때까지 26개월동안 그런 휴가를 나갔어도 주일에 있는 군인교회 찬양을 섬기러 전라남도 함평에서 충청남도 논산까지 30분 찬양팀 서려고 2시간씩 4시간을 차타고 다녔어요. 그런 기적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찬양으로 섬기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 했던 겁니다.그렇게 제대를 하고 났더니, 저의 정체성이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다라는. 

 

Q.신앙 생활하면서 전환점이 있었나요? 


대학을 충남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습니다.나왔어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장학금을 주는 데를 갔어야 돼요.그래서 국립대인 충남대를 가게 된것죠. 그런데, 그 옆에  대전 유성 지역에 과학기술대가 있어요.  

 

그 당시에는 중국과 교류가 별로 활발하지 않을 때인데,  중국에서 공산당 자제들을   교환 학생으로   충남대나 과기대 쪽으로  많이 보냈어요. 특별히, 과기대는 굉장히 똑똑한 친구들이 많이  오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한국이랑 중국이 수교되기 직전이기 때문에 공산당원이 아니면 다른 나라를 안 보냈죠.  왜냐하면 안 돌아오니까. 그래서 철저한 공산당원들인 그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보자는  생각을 교수님 몇 분들이 하시고, 제가 다니는 중국어과의 교수님도 그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안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죠. 

저희 교수님 중에 한 분이  저를 부르면서 찬양으로 섬겨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작은 교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라 키보드는 어려울 것 같고 해서 기타로 반주를 해야겠더라구요. 그래서 중국어 전공으로 중국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들고 찬양하기 시작하면서 그 인연이 중국의 유학생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아! 그전에 대학교 1학년때의 일이 기억이 나는데요. 대학 신입생이 되면 술 많이 마시게 되잖아요. 저는 잘 못마셔서 보통은 피하게 되는데, 어느날인가 소주를 두잔정도 마시고서는 기절을 한거에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몇번을 토하다가 일어나보니까 학과방의 소파였습니다. 술이 깨서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께 기도를 했죠. 다시는 입술에 술을 대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방의 한쪽 구석에 싸구려 기타가 있길래  집어들고 찬양을 쳐봤어요. 제가 아는 찬송가들의 멜로디를 하나씩 연주하면서 코드를 같이 연주하는데, 이게 마구잡이로 치는 기타연주가 아니라 뭔가 정돈되면서 음이 하나씩 살아서 나타나는 연주가 되는 거예요. 멜로디와 코드를 하나로 연주하게 되면서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기타의 연주 느낌이 깨달아 졌던 거죠. 피크로 냅다 긁어대기만 하던 기타에서 손가락으로 치는 아르페지오 연주가 되기 시작하고 차원이 다른 연주의 세계로 올라간겁니다. 그때 그 순간 하나님이 저에게 기타로 찬양하는 기쁨을 깨닫게 하신 것이었죠.

그렇게 대학내내 기타를 열심히 치다가 군대를 가서도 기타로 찬양을 하게 되고, 제대하고 복학해서 중국인들을 위한 교회를 기타와 중국어로 섬기게 된겁니다. 중국어로 예배를 인도할 수 있고, 기타로 반주를 하며, 찬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명이나 되었겠어요. 정말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던 거죠. 

그리고는, 중국에 어학 연수를 간 때가 98년 IMF 터졌을 때. 그때 딱 갔었는데 중국의 ‘장춘’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 길림성의 수도 였죠. 어느날인가 걷고 있는데, 거리에서 어떤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어떤 모녀가 길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이 약간 헤메고 있길래 혹시 한국분들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리고, 그분들에게 길을 안내를 해줬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제 그 주일날  교회를 가보니까 그때 봤던 그분 둘이 앉아있는 거예요.  예배가  끝나고 이제 동그란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데 같이 먹게 돼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했졌죠. 그 모녀중의 딸이 지금의 제아내가 되었습니다.

장모님은 거기서 원래 성화 그리시는 분이신데, 인천의 주안교회에서 파송해서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오신거고 아내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몸이 안좋아서 어머니께 와서 쉬고 있었던 상태였죠. 그런데, 그렇게 만나게 하셔서 또 가정을 이루는 계기가 된거죠. 

 

Q.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그때가 너무 좋았어요. 그게 1998년인데 사실, 그때 한국 유학생이 갈 만한 그런 대학교가 5개 정도 있었거든 근데 그 5개 대학 대학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줬어요.  그래서 서로 모르시는 분인데 이제 주일이 되면 그 한인교회에서 만나는 거죠.  그 다섯 분들이 한인 교회에서 알게 되고 모여가지고 기도를 하는데 저는 몇 번 그 찬양 좀 도와달라 해가지고 가서 참가한 적이 있는데요. 왜 성경에 예수님이 진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다는 말 나왔잖아요. 

저는 그게 그냥 과장된 표현이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죠.  사실, 중국이라서 크게 기도할 수가 없었지만,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크게 기도할 수 있어서 어디 골방 빌려가지고 기도를 하는데요. 

전 그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은  처음 봤어요. 기도 끝나고 나오면은 진짜 이 몸에 와이셔츠가 쫙 붙어가지고 이 기름들이 막  흐르게 선교사님들이 기도를 하시고, 정말 그렇게 기도를 하시니까 성령의 역사도 너무 강하게 나타났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같이 몰려 다니던 그 청년들이 월요일은 이 선교사님 집에서,  화요일은 저 선교사님 집에서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날마다 집회를 했어요. 말씀이 너무 좋아가지고 말씀을 세 시간씩 전하시거든요.  사실 세시간은 커녕 20분도 지루하잖아요 보통.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세시간동안 꼼짝도 안하고 말씀을 듣고서는 끝나면 화장실에 줄을 쫙 서요. 왜냐하면 말씀 너무 좋으니까 화장실 안 가려고 계속 참는 거에요. 하나도 놓치기 싫어서. 성령이 너무 강하게 역사하시니까 3시간이 진짜 무슨 한 20분 지난 것 같았어요. 

제가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나오게 됐어요. 기숙사를 나와가지고 9층 짜리 ㅁ 자 형태로 생긴 아파트에 세를 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일 걸어서 오르락 내리락 했어요. 그 아파트에 몇백가구가 살았는데, 딱 한집만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우연히 집을 구했는데 그렇게 들어가게 된거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는데, 광동지방의 사투리를 쓰셔서 잘 못알아듣는 말도 많았고, 더구나 할아버지는 반신불수로 거의 누워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신앙때문에 할아버지에게 박해를 많이 받으셨나봐요. 할아버지는 예수 믿는 걸 달가와 하지 않으셨데요. 그런데, 할머니가 신앙을 참 좋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고맙다고 하셔서 매일 그 할아버지를 위해 손을 얹고 기도를 했죠. 기도받기 싫어했어도 뭐 움질일 수 없으셔서 그냥 누워있을 수 밖에는 없었으니까요.앞서 이야기했던 선교사님들 다섯분도 돌아가면서 오셔서 그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해드렸어요. 그런데, 어느날부터 할아버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하루는 기도하러 들어갔더니 방에 앉아 있는 겁니다. 기적이 일어난거죠. 전 기도의 힘이 엄청난 것을 그 때 또 한번 느꼈습니다. 그 차가운 땅에 예수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그 몇백가구의 아파트안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전파 되더라구요.

 

Q.미국에 오시면서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아까 이야기한 그 모녀의 딸과 결혼을 한건 2000년1월이고 2월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장인의 초청으로 영주권을 받으면서 들어왔는데, 저는 일단 함께 오느라 관광비자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영주권자의 배우자는 한국에서 다시 인터뷰를 하고 들어와야 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눌러앉다 보니 불체자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245I를 통해 구제를  받긴 했지만, 어쨋든 그 당시에는 정말 좀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드라이버 라이센스도 갱신이 안되고, 일도 뭔가 정확히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그런 상황속에서도 놓치 않은 건 단 하나 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때로는 섬기던 교회에서 뜻하지 않은 시험을 당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찬양으로 섬기는 일은 놓지 않았구요. 때로는 찬양팀의 리더 자리에서 생각치 않게 물러났어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다른 찬양할 기회를 주시더라구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제가 떠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섬기던 교회의 찬양팀에서 이유도 모른채 리더자리에서 쫒겨 났을 때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어느날 한쪽눈의 가운데 부분이 촛점이 안맞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황반산성이 심해져서 마치 가운데 큰 반점이 씌워진 것처럼 된겁니다.  사실 이렇게 눈이 안보이면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통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느끼게 하시고, 또, 그 안에서 부르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셔서 지금은 불편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Q.마지막으로 인생의 노래 한곡을 뽑는다면 ?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저는 쭉 말씀드렸지만 정말 하나님이 그냥 해주신 게 훨씬 많아요. 제가 뭐 해가지고 쟁취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은 그때그때 아이디어도 주시고 기적도 보여주시고. 사실 태어날 때도 그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을 어려서부터 알게 해서, 제 힘으로 한 건 사실 하나도 없어요. 기타도 솔직히 제가 이건 제가 막 피터지게 연습했다 이런 것보다는 너무 재밌어가지고 이거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올라오게 된 거고, 제가 이 기타 가지고 이렇게 생계를 하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해줘서 지금 찬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고, 가정을 섬길  수 있는 수단이 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은혜 아니고는 설명이 안 돼요. 물론 중간에 힘든 것도 있었지만 저는 그 힘든 걸 통해서 뭘 알았냐면  하나님 마음을 진짜로 알게되었어요. 

저는 운전할 때마다 그 찬양을 해요. 지금도 이렇게 저장해놓고 유튜브에다 항상 그게 이렇게 나올 수 있게 해놔요 그래서 그걸 항상 틀어요. 저는 그 이분이 크리스찬인지 몰랐어요. 저는 이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치열하게 경험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노래를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너무 절절해서 한 500번은 넘게 들었을 거예요.  

권인하 “하나님의 은혜” https://www.youtube.com/watch?v=W3hsaxdnwRM 

[편집자 주 : 2022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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