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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삼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마주할 때-“글자를 넘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뉴스 0 2022.04.10 08:56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마주할 때-“글자를 넘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글 : 한삼현 목사 (뉴저지 빛과 소금교회)

 

근대 인쇄술의 발명 이후로 현대인들은 글자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이라는 것도 우리 사람에게 익숙한 말과 글로 기록되었으니 (만큼), 세상의 일반적인 문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다 를 바가 없다고) 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레 사람의 통상적인 방식(≡인 간의 읽기와 듣기와 연구와 이해)으로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마주하고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말과 글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되는지, 즉 사람의 통상적인 방식으로부터 그 자체를 넘어서(초월하여) 일하시는 성령의 직접적 개입에 이르기까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살 때의 경험도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지만(누가복음 2:47), 공생애를 시작한 30세 이후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셨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그 기이함과 경탄스러운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한복음 7:15)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감지한 그 기이한 지혜와 지식을 그저 글을 읽고 배워서 익히는 그런 정도의 지식으로 생각하였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들이 선생으로부터 성경이나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배울 때(≡‘랍비 교육’이라고 함), ‘글을 읽고 배워서 익힌 그런 수준의 지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쨌든 유대인들 자신들이 아는 지식과 본질에 있어서 예수님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지금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 글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즉 인간이 읽고 듣고 연구하고 깨닫고 발견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렇게 밝혔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한 복음 7:16)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글 차원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내 심을 받았으며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아들로서 알고 있는 그 지식(divine knowledge)을 전하는 독특한 가르침이라 밝혔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어 세상에게 전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려는 그 지식과 유대인들이 깨달은 글자 사이의 차이점은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와 전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인 것과 땅에서 인간들이 통상적인 방식(읽기와 듣기와 연구와 이해) 으로 터득한 이해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먼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를 글로 배워서 깨닫듯이 오랫동안 많이 배우고 익히며 연구하고 사색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유대인을 제일 먼저 손꼽아야 할 겁니다. 그중에서도 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을 으뜸으로 쳐주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처럼 진지한 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하나님의 말씀을 파고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개인이 평생 동안 배우고 습득한 지식 정도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생들의 경건과 묵상과 연구를 통해 얻은 것을 축적하고 후대 세대에 물려줌으로써 대단한 신앙적 전통과 학문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와 하나님의 뜻이란 글을 배우듯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깨닫고 알고 믿는 것은 오랜 기간 많은 수고와 노력이 결코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도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로마서 10 :2∼3). 더욱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도 상관이 없고 그 깨달음은 학문적인 확신이나 종교적 확신과도 별개의 것이라고 밝힙니다.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런 것들(인간의 지적 능력, 학문적인 확신, 종교적인 확신)을 넘어서 혹은 초월하여 어떤 다른 영역에서 작용하는 일에 관심을 두라는 말입니다(≡성령의 밝혀주심).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경험(고린도전서 10:11)과 예수 님 당시의 유대인의 실패(요한복음 7:15)를 오늘날 우리들이라고 해서 결코 되풀이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실패하였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우리들도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마주하는 우리의 시작은, 비록 사람의 통상적인 방식(≡한 인간의 읽기와 연구와 이해)이라고 할지라도, 결단코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먼저 이렇게 말한다(유대인들의 실패)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많은 시간과 노력과 수고를 들여서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부정한다든가 배척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읽고 듣고 묵상하고 깨닫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성경) 자체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를 가리켜 복이 있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 다(시편 1편). 당연히 밤낮으로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닫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읽고 듣고 배우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란다면, 상당히 잘못된 오류와 모순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고 멈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하는 통상적인 방식(읽기와 듣기와 연구와 이해) 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가 생겨나게 된 출발점과 기록과정(process of writing and transmitting of the Bible)이 매우 독특하다는 점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딤후 3:16),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깨달아 아는 일(il-lumination)에 있어서도 독특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14:26, 16:13, 요일 2:27).

 

3. 인간의 통상적인 방식(읽고 듣고 연구하 고 이해함)을 “넘어서≡초월하여” 일하고 계신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을 바라보십시오!

 

아주 쉽게 말하면 인간의 통상적인 방식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통상적인 방식을 “넘어서≡초월하여”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작용하시는 차원을 경건한 신앙인들이 바라보고 기대하라는 교훈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이해하면서 믿기 때문에 겉으로만 판단 한다면, 통상적으로 무엇을 배우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듣고 이해하여 믿는 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사용해서 학교에서 글을 배워서 아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통상적인 방식들을 넘어서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의 전인격에 변화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활동입니다. 넓게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곧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권능과 사랑에 대하여,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더 넓게는 한 인간의 마음의 죄와 어둠을 밝히시는 일에 이르기까지,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나도 몰랐던 인생의 쓴 뿌리와 무지함에 대하여 문득 문득 깨닫게 하는 역사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에 관한 유익한 말씀이라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 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말씀 - “ 글자와 성령의 차이점” - 에 대한 놀라운 가르 침을 한 번 더 되새겨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이 되도록 충분한 자격을 주셨습니다. 즉 기록된 글자들(율법 조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셨습니다(≡자격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조문(글자)은 죽이는 것(기능)이고 영은 살리는 것(기능)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6) 그 리고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대주의(Judaism)는 “ 하나님의 말씀은 글자다”라는 견해를 초지일관 고집하였던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한복음 1:14)는 놀라운 발견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비록 글자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소유 하고 있을지라도, 글의 차원(인간의 읽기와 듣기와 연구와 이해)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면서 더욱 성령의 밝혀주심을 통하여 더욱 놀랍고 풍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편집자 주 : 2021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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