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영적인 세계는 희생 없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므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그리하셨다. 초대교회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희생을 통하여 복음이 로마에 전해지고, 폴리갑과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의 순교를 통해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종교개혁시대에는 낙스나 쯔빙글리 같은 위대한 희생자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게 하시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당신의 일을 이룰 위대한 인물들을 세우시고 역사하셨다. 한국선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를 위해 피 흘린 이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세워지고, 복음은 강하게 증거 되었다.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였으며, 그리고 캐나다 선교사 맥켄지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또한 헤론 의료선교사 역시 한국에 온지 5년 만에 이질에 걸려 하나님 품으로 갔으니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부산에서 순교한 데이비스
한국선교를 위해 일찍이 호주에서 일꾼들이 파송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 호주 선교사들은 서울이 아닌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을 선교하였기에 생소한 분들이 많다. 호주 선교에 관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가는 아마도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는 이상규 박사 일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멜본에서 호주선교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병준 교수(서울장신 교회사 교수) 역시 호주 선교 역사의 전문가다. 나는 나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면서 호주선교사에 관련된 자료를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분들이 소장한 자료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다. 필자는 주로 이 두 분들이 발표한 자료에 의존하여 데이비스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호주 선교사로서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긴 여행을 통해 천연두에 감염되므로 일찍이 소천 하셨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헨리 데이비스의 가족은 일찍이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왔다. 그리고 왕가리(Whangarei)에 정착하였다. 헨리(Joseph Henry Davies, 1856-1890)는 그곳에서 1856년 8월 22일, 9남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4세에 호주 멜본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러므로 그의 머리 속에는 뉴질랜드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헨리는 그가 13세 되던 해, 1869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헨리는 육신의 아버지 대신 영적인 아버지를 얻었는데, 그는 코필드 성 메리성당의 복음주의 성공회 목사인 매카트니(Hussey B. Macartney)였다. 매카트니는 인도와 중국 선교에 관심이 많은지라 교회에서 <선교와 해외 선교사>라는 선교잡지를 발행하여 선교지 소식을 알리는 일을 하였다. 헨리는 그런 매카트니의 영향을 받아 선교의 꿈을 꾸면서 자라났다. 이와 관련된 그의 일기 내용을 옮기면,
“선교사는 자신이 받은 소명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주인의 영광, 나의 주님의 삶, 나의 구원자의 사랑을,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고, 청소년기의 목적이었으며, 나의 가장 소중한 소망이었다.”
이 일기는 그가 한국을 향해 선교사로 출발하기 2년 전, 자신의 일기에서 선교의 꿈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선교를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헨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의 꿈을 접어야했고 또한 멜본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하다가 1학년을 마친 후 인도에 선교인력이 필요하다는 누이동생 사라의 편지를 받고 1876년 9월 인도에 도착하여 사역하다가 열병에 걸려 19개월 후 1878년 5월에 멜본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헨리는 계속 공부에 착념하여 1881년 3월 고전어에 우등상을 받으면서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해 3월 26일, 25세에 코필드 문법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처럼 매우 활발하고 역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공부하여 1883년 멜본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인도선교사로 지원하여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885년 11월, 중국 남부 복주를 사역했던 CMS(영국교회선교회)는 두 명의 중국인 선교사들을 부산에 파송하여 부산상황을 살피고 그 결과를 선교회에 보고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호소력 있게 언급했는데, 그 내용이 매카트니가 발행하는 선교잡지에 실리게 되었고, 1888년 5월, 헨리는 이 기사를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국에 선교하러 가길 결정하였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존 이윙 목사의 권면으로 CMS소속도, 성공회 소속도 아닌 장로교선교사로 지원하면서 성공회와의 인연을 끊었다. 이윙은 헨리를 투락교회로 인도하여 선교사역을 위한 신학교육을 영국 에딘버러 뉴 칼리지에 가서 받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6개월 간의 공부를 마치고 1889년 5월 30일, 멜본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헨리는 중국 만주에서 성경번역사역을 했던 존 로스를 글라스고우에서 만나 간단한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멜본으로 돌아온 헨리는 1889년 8월 5일, 스코츠교회(Scot's Church)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그해 8월 21일, 그의 여동생 매리(Miss Mary T. Davies)와 함께 멜본을 떠나 10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잠시 쉬고, 4일 출항하여 5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헨리 일행은 약 40일간 항해를 하면서 일시 귀국했다가 한국으로 향하는 미국인 영어선생인 벙커(D. A. Buncker)를 만나 그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5개월간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선교전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의 언어학습은 매우 신속하게 습득하였다. 이는 아마도 그의 선교열정이 뜨거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는 1890년 2월 5일부터 3월 10일 어간에 동료선교사들과 서상륜 등 한국 매서인들과 함께 서울 외곽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는 실로 복음에 충일한 사람이었으며, 이 복음을 한시라도 속히 전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헨리는 이윙 목사의 말처럼, 그는 학문과 지성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결코 완고하고나 자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강한 집념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위해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원두우 부인 역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평하길,
“그는 원두우와 똑같은 열정의 사람, 열정적인 정신, 똑같은 힘, 똑같은 언어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기도에 강한 신앙인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사업과 그들이 구원하기를 갈망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함께 원두우의 서재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때에 쓰시기 위해 지난 세월 그런 사람으로 다듬고 빚고 해서 정금같이 만드신 게다. 이제 그의 때가 되어 자신의 사역지를 향해 서울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1890년 3월 14일, 헨리 데이비스는 어학선생과 한 명의 고용인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300마일을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왜 서울과 북쪽 지역이 아닌 남쪽 부산을 선교지로 선택했는가?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우리는 얻을 수 없지만, 아마도 몇 가지 추측할 수 있겠다. 첫째는 오래전 울프 주교에 의해 부산에 대한 정보를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헨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기도로 준비하며 서울과 기타 지역이 아닌 부산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번째는 서울지역은 이미 다른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기에 사역자가 필요한 곳, 다른 지역 가운데 부산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정병준 교수의 말대로 호주 선교사들은 기후조건에 맞는 따듯한 부산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부산은 한국의 관문이요, 한국의 대표적인 항구요, 일본과 인접한 곳으로서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했다. 헨리는 부산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그곳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은 서울에 남겨둔 채, 기나긴 여행을 하게 되는 데 코스는 서울을 떠나 경기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지역까지 약 300마일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비록 여행하는 것이 피곤하고 고통스런 일이었지만, 선교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직접 몸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한국의 지역정서를 파악할 수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에겐 매우 절망적인 일이 발생했다. 과로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 돼 이것이 폐렴이 되어 1890년 4월 5일에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그는 1889년 호주 멜본을 떠나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또한 한국에서 전도를 하며 한글을 배우면서 쉬지 않고 줄기차게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은 그의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육신의 몸을 위해서도 지혜로운 관리가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그의 죽음이후, 누이동생 매리 역시 폐렴에 감염되어 호주로 돌아가므로 한국에서의 호주선교가 더 이상 진행 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의 죽음으로 호주 교회들은 더욱 가열 차게 한국을 위해 선교사들을 발굴, 훈련, 파송하게 되었다. 1891년 호주 출신의 2대 선교사인 맥카이 목사 부부와 미혼 선교사인 멘지스와 페리, 퍼셋이 한국에 파송을 받아 온 것이다. 호주교회는 데이비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선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한국에 본격적인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우연한 일이란 없다. 한 젊은 사람, 데이비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결단과 헌신을 심어주어 더 넓게, 더 크게, 더욱 아름답게 주의 일을 감당하게 했다.
아쉬운 것은 그가 한국에 온지 183일, 약 3개월 정도만 머물다 주님 품에 안겼기에 그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오랜 세월 동안 사역을 했다는 원두우나 아펜젤러와 같이 부산과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최초의’ 수식어가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난 사역들을 감당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렇지만 원두우와 그의 부인 호톤이 그에 대해 회상한 것처럼, 그는 매우 뛰어난 의지와 신념의 사람으로서 영민하고 그러면서 겸손한 사람으로서 열정이 있는 사람이며, 데이비스를 한국에 갈 수 있도록 했던 본국의 이윙 목사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우리의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직 하늘의 하나님의 이름만을 남기고 간 이 땅에 지금도 살아있는 호남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구자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유해는 지금 창원 선교사 공원묘지에 안치되어 있으니 부산 및 영남지역을 위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게다.
당신이 그의 맘에 심어 놓은
꿈이 있었기에 인내했습니다.
그의 손, 발 붙잡아 주셨기에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섰습니다.
머리의 지혜를 주셨기에
선한 생각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주의 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당신으로부터
모두 온 것임을 인정하렵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도,
인내해야 하는 이유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순종해야 하는 이유도,
그를 통해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데이비스, 당신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물질도, 업적도, 아무것도 아닌
바로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제 그 이름만 찬양하길 원하며,
그 이름 앞에 굴복하길 원합니다.
그에게 주셨던 것을 우리에게도
제발 주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