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방법을 가르쳐 준 네비우스
한국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한 원두우와 아펜젤러 같은 젊은 선교사들은 선교의 경험이 없어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없었고, 단순하게 순회전도여행 정도만 했을 뿐이다. 더욱이 문화와 언어, 관습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했다. 때마침 오래 전에 중국 선교사로 약 40년간 사역했던 존 네비우스 선교사가 한국에 약 두 주간 머물면서 한국에서 사역 중인 젊은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선교 세미나를 갖게 되었는데, 이 때 가르친 내용이 바로 네비우스 선교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1893년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되어 선교의 기본정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방법이 한국에서는 커다란 효과를 얻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승동교회에서 오랜 세월동안 목회한 곽안련은 네비우스 선교방식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시카고대학교에 제출하므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에 있어 네비우스 방법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해외에 나가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이 방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는 1829년 3월 4일, 뉴욕주의 세네카 카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모두 오비드 장로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어릴 때부터 네비우스는 농사를 짓는 일을 경험하면서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였다. 그는 1848년 뉴욕의 유니온 대학을 졸업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조지아주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사명을 받은 후 1850년 뉴저지의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하고 1853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는 학업과정에서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여 그해 5월 뉴브런스윅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6월에 코언(Helen S. Coan)과 결혼하였으며, 9월에 중국을 향해 선교의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긴 항해 끝에 1854년 3월 14일 상해에 도착, 여장을 풀고 산포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1859년 항주에 선교센터를 설립하여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 후 1861년 5월 18일, 중국의 정치적 정세와 산포의 추운 날씨 때문에 선교지를 지푸(혹은 체푸, 오늘날의 연태)로 옮겨, 그곳에서 선교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네비우스는 현장 순회전도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지도자급에 있는 이들을 불러 일종의 신학교육을 하면서 실험적 사역을 계속하면서 전도책자를 만들고 선교방법에 대해 동료선교사들과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지푸에서는 약 22년 동안 거주하면서 사역을 하였으며, 1885년 드디어 그의 이론을 정리하여 Chinese Recorder 라는 중국선교 잡지에 기고하였는데, 이때 <선교의 방법>과 후에 <선교사 교회의 개척과 발전>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의 선교의 특징과 방법을 담고 있는데, 비서구 세계에 있어 토착교회를 설립하는 기본적 선교원리로서 -자전, 자치, 자급- 삼자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살려 농업기술을 중국인에게 가르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교회와 관련된 사건은 1890년 3월, 제2회 중국선교사 총회가 상해에서 개최되었을 때, 네비우스에게 선교방법론에 대해 강연해 줄 것을 주최측에서 요청해 왔고, 주의 영이 네비우스 부부를 사용하시길 원하셨다. 그들은 1890년 6월 안식년으로 한국을 향해 출발했을 때, 한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강의를 요청하여 그의 부인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두 주를 가르쳤다. 이때 선교 강의에 참석한 이들은 31세의 원두우 선교사를 비롯하여 알렌, 헤론, 기포드, 기일, 가드너, 마포삼열 등 이었다. 그리고 네비우스는 61세의 노장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제 막 선교사역을 시작하려는 신참이었고, 네비우스는 선교사역을 마감하는 백전노장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마포삼열은 선교 25년 기념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그가(네비우스) 1890년 방문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25년 간의 경험을 우리 젊은 선교사들과 함께 이야기했으며, 우리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고의 씨앗을 심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나눈 대화와 “선교사역의 방법”이란 책을 통해 한국선교는 측량할 수 없는 유익을 얻었습니다. 물론 이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지역적 조건으로 인해 그리고 이 원리를 상이한 환경에 적용시키는데 발생되는 문제로 많은 수정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네비우스 박사내외를 중국으로부터 초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원두우와 젊은 선교사들은 기도하면서 논의한 결과 1893년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방법론으로 채택하길 결의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새로이 입국하는 신임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사역의 방법론>을 공부하여 시험을 치루고 합격해야 했다. 이렇게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선교 사역을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를 지낸 방위량은 말하길, “그의 사상은 우리 선교사업 초창기에 있어 선교사업의 원칙과 방법을 채택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만일 선교사들이 그 방안을 충실하게 경건하게 합심하여 실천하면 그들의 사업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라고. 아무튼 네비우스가 한국선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아무도 네비우스의 공헌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곽안련은 1929년 시카고대학교에 Ph.D 학위논문으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방법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네비우스 정책의 골자는 세 가지이다. 즉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이다. 그러나 네비우스가 주장하는 것은 약 10가지인데, 1)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한다. 2)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된다. 3)자전은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4)자치는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5)자립은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6)모든 신자는 그룹영수와 순회 조사아래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7)성경적 형벌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한다. 8)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며 연합한다. 9)법정 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10)민중의 경제문제에서 가능할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네비우스 부부는 1891년부터 겨울부터 1892년 봄까지 미국을 여행하였다. 그 동안 만나지 못한 형제들, 친구들,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 필라, 뉴저지, 워싱턴 D.C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중국 지푸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가을 순회전도를 시작하기 전날인 10월 19일, 64세 되던 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장례식은 10월 20일, 오후에 중국교회에서 코벳 박사와 도우스웨이트 박사의 집례로 장례예배가 거행되었으며, 오후에는 스콧 감독과 그린우드 목사에 의해 무덤에서 집례되었다.
네비우스는 중국에서 보다는 한국에서 사역의 열매를 더욱 많이 나타났다. 사실 중국에서의 사역은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있는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립, 자치, 자전의 원칙은 매우 적합하였다. 게다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중심으로 가르친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은 더욱 가속시켰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는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교회를 위한 섬김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존 네비우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교회에 네비우스의 이름만큼 그의 사역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대해서 대부분 네비우스 선교정책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그가 중국선교사로 봉직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평생 선교정책을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다만 그는 이론 혹은 원리를 만들기 위해서 선교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또 이모든 것들을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비우스는 비록 중국선교사였지만, 중국에서 한국교회 선교를 위해 준비시킨 인물이라 평할 수 있겠다. 특별히 1890년 네비우스 부부의 한국 방문은 당시 선교의 초년생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을 정립시켜 준 사건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는 복음을 위해 행동하는 일꾼들뿐만 아니라 이론화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당신은 참으로 선교사들의
스승 이었소.
약 40년간 중국 선교지에서
임상 실험한 것을
한국의 젊은 선교사들의 가슴에
심어 주었으니
갈 길을 몰라 헤매던 이들
밝은 빛을 보고 성경 중심의
사역 묵묵히 실천한 결과,
삼천리 반도 곳곳에 거룩한
십자가 세워지고,
주의 말씀을 양육 받은 젊은이들
이제는 세계 열방에 복음 들고
나가 증거 하니
한국교회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소.
아마 앞으로 오랜 세월 그 빛
갚기 위해 더욱 더 정진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