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선구자들" 7 - 한국 장로교 개척자, 원두우

조경현 0 2017.03.23 07:51

3. 개선장군처럼 내한하여

 

사실 한국선교가 중국과 일본보다 늦은 이유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 미국 장로교, 감리교 해외 선교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정식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다양한 교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차지하였고, 다음으로는 감리교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성공회, 침례교, 구세군 등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장로교는 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에서 파송되어 왔으며, 감리교에서는 미북감리교와 미남감리교회에서 파송되어 왔다. 원두우는 미북장로교의 대표적인 선교사요, 아펜젤러는 미북감리교의 대표적인 선교사로 한국교회의 역사에 기록이 되었고, 이들은 한국선교에 있어 늘 최초의 사역, 즉 교회설립, 학교설립 등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한국교회의 개척자(開拓者)인 동시에 대부(代父)이며, 그리고 선구자(先驅者)들이다.

 

 

 

한국 장로교 개척자, 원두우

 

원두우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장로교회 선교사이다. 그에 대한 별칭은 너무도 많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하였고, 성경번역자로, 학교설립자로, 영어사전을 편찬한 학자로, 한국에 잘 알려진 선교사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별칭은 한국 장로교 개척자일 것이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모두 최초의라는 단어이다. 그는 장로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요,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를 개척한 선교사요, 한국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준 선교사요, 그러므로 그에 대해 나누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요, 가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부인 릴리아스 호톤(Lillias H. Underwood) 역시 의사 및 문필가로서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언더우드> 등 여러 권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여의사 선교사로 한국에 왔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과 남편사역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두우(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 1859 7 19, 영국 런던에서 여섯 명의 형제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인 와우(Alexander Waugh)박사는 에딘버러 대학 출신으로 저명인사이며 능력 있는 설교가이며, 해외선교에도 큰 관심을 지닌 분이셨다. 그는 개척자 정신이 투철하며 주님의 교회와 나라에 원대한 꿈을 가진 분이셨는데, 원두우는 그를 닮았음이 틀림없다. 원두우의 아버지는 발명가로서 당시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전세계에 판매 네트웍을 형성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1865년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노모를 잃는 슬픔에 빠졌고, 게다가 동업자의 사기로 인해 사업의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여 재혼을 한 뒤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는 원두우가 영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되는 중요한 이유였다. 이민 초기에는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훗날에 그의 형 존 언더우드가 타자기 사업에 성공하자 그는 원두우의 선교사역에 있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1874년 미국 이민을 온 원두우 가족은 뉴 더햄(New Durham)에 정착하면서 그로브교회에 온 가족이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로브교회 담임목사인 메이번 목사는 동시에 화란계혁신학교 조직신학과 학과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원두우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헬라어를 배우면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였다. 이는 그가 이미 어릴 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독실한 교회생활을 하면서 정규예배에 참석하고, 선교학교에도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한 번은 유니온 힐(Union Hill)이라는 암흑가에서 전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술집에 들어갔으나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고 하였다. 만약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른다고 협박했는데, 소년들은 침착하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라고 물러났지만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여 전도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얼마나 불굴의 의지력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원두우는 열정적인 용기의 사람이었다. 그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델타 웁사일런(Delta Upsilon)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원두우는 이 단체의 열렬한 회원이 되었고, 이 단체가 위태로울 때 그는 이 단체를 소개하고 최고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든든한 단체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훗날 선교사가 되어 미국에 돌아가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걷고 있을 때, 델타 웁살일런의 응원가를 야유 섞인 어조로 불러대는 일단의 무리들을 만났다. 그와 그의 친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신들의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부르니 이 소리에 놀라게 하였다. 그 젊은이들이 중년의 이들을 해칠 수가 있었지만, 원두우와 그의 동료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의 사역도 비슷하였다. 선교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일 등이 모두 열정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하였으리라. 

 

1881년 뉴욕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이어서 그해 가을 뉴브런스윅에 있는 화란개혁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884년 뉴브런스윅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에 곧 바로 입국하게 되었다. 원두우는 어릴 때부터(4살 어떤 인도선교사의 도전으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도가 아닌 한국에 첫 번째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그는 처음부터 선교사로 인도에 가기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기를 기다리면서 언어와 의학공부를 1년간 공부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관심에 없었다. 아니 한국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당시 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문호가 굳게 닫혔으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기 때문이며, 그리고 1966 6, 평양 대동강에서의 미상선 셔어먼호 사건으로 인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원두우 선교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선택한 이유를 아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후에 이 일에 대해 회상하길, 사실 1882년에서 83년 겨울에 뉴브룬스윅에서 선교지원자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학생이었던 알버트 올트만스(Albert Oltmans)가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고 개방을 준비하고 있는 은둔의 나라, 한국에 대한 글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원두우는 특별한 관심이 없이 여전히 인도로 갈 생각만 하고 있었지, 한국에는 다른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의학공부를 1년 간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만나는 사람가운데 선교사가 되길 원하면 한국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선듯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의 한 교회에 인도선교사로 지원하는 편지를 붙이려고 우체국에 갔을 때, 이상한 음성이 들렸다. 한국에 갈 사람이 없느냐? 한국은 어찌할 터이냐?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그는 서류를 버리고 곧바로 장로교선교부로 달려가 당시 총무였던 엘린우드에게 한국에 선교사로 가길 표명하였다. 이것이 그가 한국에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

 

원두우는 신학교 시절, 1883 10, 전국신학생들 선교대회인 <전국신학교연맹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는데, 그때 뉴저지의 드류신학교 대표로서 아펜젤러가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에 올 때도 아펜젤러와 함께 승선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에 잠시 머문 후, 한국 제물포에 1885 4 5, 부활절 주일, 오후 3시에 도착했으니 이때 그가 지은 기도문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때 아펜젤러는 결혼하여 그의 아내와 함께 내한하였지만 원두우는 아직 독신이었다.

 

원두우가 한국에 입국한지 3년째 되던 해, 장래 그의 부인이 될 호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녀는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일할 재원이었다. 사실 원두우는 미국에서 약혼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선교에 대한 관심도, 약혼자에 대한 존경심도 없었고, 주님의 사역비전에 대한 이상도 없어 결국은 파혼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호톤은 원두우를 존경하였으며, 남편을 위해, 아니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할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1889 3월 이들은 결혼에 골인하였으며, 두 사람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한국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여 일궈 놓은 업적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러나 몇 가지로 나눈다면 먼저, 교회사역이다. 특별히 그가 1887 9 27, 설립한 새문안교회(초창기에는 정동교회였음)를 중심으로 서울 및 경기 일대, 파주, 김포, 시흥 둥지에 여러 개척교회를 설립하고, 순회목회를 하였다. 새문안 교회의 원래 명칭은 정동교회였다. 정동교회 설립의 역사는 1887 9 27() 저녁에 원두우 주재 하에 최초의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전에 영어예배 집회는 있었지만, 이때 한국인을 위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특히 그를 통해 한국에 첫 번째 세례교인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노춘경이다. 그는 1885년 어느 날 알렌 집에 왔다가 우연히 책상 위의 쪽복음(마가, 누가복음)을 발견, 그것을 가져다가 집에서 읽다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튼 날 그는 원두우를 찾아와 구도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받았고, 세례문답을 통해 원두우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6년 가을, 기억에 남을 만한 선교여행을 북쪽으로 떠났다. 목적지는 황해도와 평안도였다. 당시 여행에 관한 글은 별로 없지만 서상륜이 자기의 고향 소래로 돌아와 전도를 하여 세례를 받을 7명이 있어, 원두우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만찬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보고 매우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1890년 다시 소래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도여행 후에 그곳의 믿음의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원두우를 찾아와 전도상황을 설명하고 예배당을 필요로 하니 도움을 청했을 때,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그는 이런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당은 여러분들이 짓도록 하세요.라며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이때 교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하자, 원두우는 다시 말하길 여러분들이 쓰고자 한다면 기와, 벽돌의 재료로서 나무와 돌과 짚이 얼마든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예배당을 지을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 주면 나는 기꺼이 그곳에 가서 나무를 자르거나 건물을 세우는데 도울 것입니다.

 

그의 중요한 사역가운데 하나는 교육사역 이었다. 원두우는 먼저 1886년 고아원을 설립 하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고아원의 책임자는 1889 1월부터 기포드에게 넘어갔고, 그해 7월 한국 정부에 정식 학교 인가를 신청하였지만, 거절을 당하고 1890 1월 마포삼열이 맡게 되었다. 이때 이름은 예수교 학당 혹은 구세학당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마포삼열이 평양으로 전임해 가고 밀러가 책임을 맡아 운영하다가 고아원의 성격에서 학교로 변모되어 오늘날 경신학교가 되었다.

 

원두우는 대학건립에도 관심을 갖고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을 위하여 원두우는 에비슨과 함께 미국에서 홍보 및 모금운동을 시행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본국 선교부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 이유는 한국에 한 개의 연합대학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평양에 숭실전문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두우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본국에 돌아가 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교단소속의 대학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초교파적인 대학 설립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고, 독지가들이 이 제안을 받아 들여 추진하였다. 결국 1915 3 5, 조선기독교대학(연세대학의 전신)이 세워지고, 그 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문서사역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어 문법, 1889>을 비롯한 <한영자전, 1890> <찬양가, 1893> <성경문답, 1893> <요한공부, 1899> <속죄지도, 1889> 등 수많은 저서와 역서 등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1889년에는 한국 예수교 성서공회 총무 및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1897년에는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5, 1910-11, 1913-14,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신학과 심리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원두우는 여러 공직에도 선임되어 한국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는데, 191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임시총회가 열렸는데, 그리고 다음 해 정식총회에 그는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1915 9월 그는 한국에서의 열성적인 사역으로 신병을 얻어 본국으로 요양차 돌아갔으나 1916 10 12, 충격적인 비보가 미국에서 날아왔다. 이날 오후 3 30, 뉴저지주의 아틀란타의 저택에서 향년 57세로 소천 하였다. 

 

우리는 원두우의 신앙의 삶을 살펴보면서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미혼으로 한국에 내한하여, 결혼하고 가정을 일구며, 교회와 학교, 문서 등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면에 있었던 부인 릴리아스의 내조의 힘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원두우의 편지 내용에 아내에 대한 내용이 있어 옮기면,

 

제 아내는 힘닿은 대로 그 지방에서 여성사역을 지도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내년에는 전도부인들과 가족 권서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 일하고 싶어 합니다. 건강과 기력이 잘 회복되어 내년에는 지난날들보다 훨씬 더 큰 성과가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원두우 부부는 사역하는 내내 서로 힘을 모다 함께 교회와 학교를 섬겼다. 이는 부부의 협력의 아름다움이요, 혼자가 아닌 함께 할 때,   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원두우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3대에 걸쳐 충성스런 섬기를 다 하였다.

 

원두우는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그에게는 늘 최초의 혹은 첫 번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는 실로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난관이 분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주의 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므로 첫째로 그는 개척자였다.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연희전문대학(연대세 전신)을 창설하는 등 다양한 사역을 개척하였다. 그에겐 개척자 정신이 있었으니 마치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둘째로 전도의 사람이었다. 대학시절 그는 매주 토요일이 되면 뉴욕 중심가에 나가 전도를 하면서 선교를 준비하였고, 한국에 와서도 전도여행을 비롯한 전도에 집중하였다. 알렌과의 마찰에서도 그는 전도가 가장 중요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순종의 사람이었다. 선교지를 인도에서 한국으로 옮길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다. 순종의 사람은 거칠지 않으며, 대립하지 않는다. 아펜젤러와도 그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동역하였다. 그는 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순종의 삶을 살다가 주님나라로 옮겨간 것이다.

 

당신은 한국의 첫 번째 선교사지요, 

당신은 한국장로교회 초석을 놓은

최초의 선교사지요,

당신은 남한에 최초 대학을 설립한

장본인이지요,

그래서 당신 별명을 최초의선교사라

우리는 붙였소.

당신이 최초로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심정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오.

최초의 교회를 서울 정동에 설립했을

때도 궁금하오.

호톤과 결혼한 후 달콤한 신혼여행

중에도 사역을 했으니 당신은 참으로

바쁘게 한국사역을 감당했다지요.

당신을 빼곤 한국교회를 설명할 수

없으니 대단합니다.

그것도 대를 이어 한국서 사역했으니

당신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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