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성경을 선물한 로스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성경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잘 알려진 대로 네비우스 선교정책 역시 성경공부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자립적, 자치적, 자전적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요정책이었다. 사실 성경이 없었다면 어찌 교회가 설립될 수 있겠는가? 만주에서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를 통해 복음을 전해들은 서경륜는 존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원두우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은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 송천(소래)에다 한국의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도와 성경 번역하는 사역을 하였는데, 이 성경은 1887년에 <예수셩교젼서>라는 신약전권이 번역 간행되었다. 이를 로스번역이라 흔히 말하는 것이다. 이 성경을 통해 한국에 공식적인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이는 로스번역본이 한국교회의 기원이라 말하기도 한다.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1842년 7월 6일, 스코틀랜드 닉(Nigg)이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양복업자였으며, 5남 3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그는 갈릭어를 사용하는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갈릭어는 물론 영어도 할 줄 알았다. 로스의 교육적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글라스고우에서 고등교육을 마친듯하며, 1865년 그의 나이 23세에 에딘버러에 위치한 연합장로교회 신학원에 입학하여 신학교육을 마쳤다. 특히 그에게 영향을 준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이다. 로스의 가족은 기존 스코틀랜드 교인이 아니었고, 소규모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교인이었는데, 이 교회는 선교의 열심히 있는 교회로 유명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 한 것은 1868년 9월, 신학원 학생들에게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책임자인 맥길(Hamilton MacGill)의 강연을 통해서이다. 이때 성령의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맥길은 강연을 통해 학생들에게 중국이나 인도에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도전하였다. 로스는 이에 자신을 선교사로 헌신 할 것을 결심했으며, 처음에는 외국이 아닌 갈릭어 사용 지역을 생각했었다.
그렇게 헌신한 로스는 1870년 신학원 최초 졸업생 33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공부하는 동안 리스모어(Lismore), 포오트리(Portree), 글라스고우(Glasgow) 등 여러 도시에 있는 연합장로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국내선교위원회는 갈릭어 선교부를 타지역에 확산하기로 결정하고 존 로스를 스톤워리, 이슬스에 견습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 지역은 갈릭어를 사용하는 지역이기에 로스가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 만주에 가기까지 갈릭어 사용하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로스의 꿈을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어 1871년 그는 해외선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872년 2월 27일, 중국선교사로 지망하여 3월 20일 자신의 고향인 채플힐(Chapelhill)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3월 25일 자신의 첫 번째 배우자인 스튜어트(M. A. Stewart)와 결혼한 후, 4월에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멀고먼 동양의 거대한 나라,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마도 맥길의 중국 도전이 그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가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신 게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듣는지가 매우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입술의 말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에 도착한 때는 1972년 8월 23일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먼저 중국에 선교사로 부임한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목사의 영접으로 지푸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윌리암슨과 의논한 결과 아일랜드 장로교의 의료선교사 1명 이외는 아무도 없는 만주로 가길 결정하였다. 아마도 윌리암슨을 통해 1866년 한국 대동강에서 참변을 당한 토마스 선교사 사건을 들었을 것이다. 로스는 그해 10월 임신한 아내와 함께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만주선교를 준비하였다. 항상 선하고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악한 것들이 틈타는가? 임신한 아내 스튜어트는 3월 31일, 첫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로스에게 있어 아내를 잃은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주의 은혜로 복음을 증거 하겠다는 사명으로 이를 극복하고 5월 13일부터 순회전도여행을 개시하였다. 그는 심령의 부흥이 사명을 감당케 하였고, 그의 사역은 교육과 학자로서 성경 번역하는 사역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38년 동안 헌신하였다.
로스의 선교여행은 1872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1874년 이른 봄, 로스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만주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한국인 어학선생을 물색하였다. 그의 의도는 일시적인 선교가 아닌 영구적으로 한국어를 배워 선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비 된 귀한 한국인 학자를 만났는데, 그가 의주청년 이응찬이었다. 그는 신문화를 배우려는 큰 뜻을 가지고 고려문으로 가는 중 압록강에서 파선을 당하여 겨우 고려문까지 온 것이다. 로스는 이응찬에게 자신의 어학선생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응찬은 기꺼이 승낙하여 함께 우장으로 가서 한국의 말과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응찬은 자신의 친구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선교사들에게 소개하였고, 이들은 로스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와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이는 마치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파렐과 칼빈의 만남같이 장차 한국교회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는 놀라운 섭리적 만남이었다. 이들은 1876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어 선교사들을 돕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붙여야 한다. 1878년 의주청년 서상륜은 책임감 있었는데, 그는 우장에 가서 선교사 일행을 만나 복음을 들은 후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사업에 협력하였다. 성경번역은 속도를 내어 1879년 로스 선교사가 안식년 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재수정하여 1880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 성서공회가 번역비, 인쇄비를 전담하여 1882년 간행되었다. 이 쪽복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성경이다. 계속해서 1883년에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이 합본으로 출간되었고, 재교정된 <요한복음>이 재간되었다. 1884년에는 <마가복음><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고린도전후서><갈리디아서><에베소서>가, 1887년에는 신약성경 전권이 간행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로스번역본(Ross Verson) 이라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도 이수정이 개정하여 세례를 받고 1884년 <마가복음>이 번역되긴 하였지만, 단지 한 권 뿐 이었으니 로스번역은 실로 대단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권서인들은 출판된 성경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배포하였다. 식자공이었던 김청송은 즙안현 한인촌에 들어가 수 천 권의 성경을 팔았으며, 서상륜은 모국 전도에 헌신하기로 하고 전도사 임무를 받아 서울로 파송 받았으며, 백홍준과 이성하는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서경륜의 아우 서경조는 형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소래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1883년 3월, 한국 최초의 교인인 소래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조용히 시작한 성경번역사역은 한국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성경을 읽은 이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 받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실로 한국에서는 최초의 공식선교사인 원두우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배포되고, 복음이 증거되어 신자들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원두우는 입국하여 한국을 가리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부족함을 본국에 편지하였던 것이다.
간행된 성경을 한국으로 반입 할 때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한국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로스는 한국 자국인들이 본국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883년 이성하는 번역된 쪽복음서를 가지고 입국하기 위해 봉천을 떠났다. 하지만 압록강 대안 부근에서 주막 주인에게 발각되어 성경책 일부는 불로 태우고 나머지는 압록강 물에 내던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로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며, 불에 탄 성경은 한국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어서 백홍준이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중국 주막에 여장을 풀고 사정을 살피니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계교를 짜서 성경책 낱장을 말아 노끈을 말았고, 일부는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고지(古紙)를 사오는 것처럼 속여 입국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반입된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로스의 사역은 성경번역 뿐만 아니라 선교여행을 비롯하여 교육에 있어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순회전도여행은 전 중국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믿었으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는 1883년 심양에 신학원을 세우고, 1890년에는 정규신학교로 발전되었는데, 이 학교가 심양의 동북신학교의 전신이며, 이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대단히 많다. 심지어는 한국인 가운데도 이 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또한 그는 집필에서도 탁월하였다. <중국어 교본><한국어 교본>를 비롯해서 1882년 <한국어 문법 및 단어집>, 1879년에는 <한국어 역사>, 1880년에는 <만주의 역사>, 이외에도 <중국선교방법론><중국의 전통종교><중국인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