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선구자들" 17 - 이 땅의 영적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

조경현 0 2017.11.24 18:00

이 땅의 영적 어머니 스크랜톤 대부인

 

우리는 의료선교사이며 미북감리교 소속 목사인 스크랜톤에 대해선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1856 5 29, 미국 코네티켓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조업을 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미감리교회의 목사 벤톤의 딸, 메리였다.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분은 바로 메리 스크랜톤 여사, 혹은 대부인이다. 우리가 스크랜톤 대부인에 대해 나누고자 하는 것은 그가 한국 최초로 여학교, 이화학당을 세운 장본인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선교사들이 한국사회, 특히 교육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우리는 한국의 대부분의 학교가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과 수고로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없다면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이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리라.

 

사실 매리 스크랜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최근 이화여대출판사에서 최근에 한국 근대여성 교육의 등불을 밝히다 라는 수식어를 붙인 <스크랜톤>이라는 책을 출간하므로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매리(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1832 12 9일 매사추세츠주 벨처타운에서 감리교 벤튼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빠, 조카 등 3대가 목사인 가문이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메리는 당연히 12세부터 교회일에 관여했으며 전도에 열심을 내었다. 그는 1855년 제조업자인 스크랜톤과 결혼을 하고 그의 아들 윌리암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는 1872년 그녀의 나이 40세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클리브랜드에서 개업한 아들 내외와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 남편과 사별한 메리는 교회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 일을 보았고, 미북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서기 등 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아들 스크랜톤은 1878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공부를 한 후에 1882년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그는 클리브랜드에서 개업을 하고 루리 암즈(Loulie W. Arms)와 결혼을 하여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집에 매클레이 박사가 찾아와 한국 선교사로 갈 생각이 없느냐고 타진하였다. 그는 선교사에 대한 비전도 꿈도 없었는데, 당시 이상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스크랜톤 부인의 말을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초여름, 스크랜톤 박사가 심한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그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묻히겠다고 했습니다.  

 

스크랜톤은 투병생활 중에 선교사로 헌신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스크랜톤은 매클레이가 동기부여를 하였으며, 하나님은 그가 결심하도록 잠시 질병을 통해 다루신 것이다. 이때 스크랜톤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임명을 받았는데, 이때 메리도 함께 동행했던 것이다. 스크랜톤은 1884 12 4일 선교부 책임자인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메리는 1885 2 3, 아들내외와 어린 손녀, 그리고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라빅호를 타고 미지의 땅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녀는 아버지 목사에게 선교에 대한 영향을 받아 아들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셈이 되었다.

 

우리는 스크랜톤 의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메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메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해는 1885 6 20일 이었다. 그녀가 본 한국은 참으로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었다. 이것은 한국에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이렇게 고통 받는 한국인들, 특히 여인들을 개화하여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메리는 믿음으로 모든 피선교지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 처음 몇 달 동안의 경험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음에도 불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암담하기도 했으나 한국에 오게 된 것이 기뻤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한국인들의 마음에 들었건 들지 않았건 한국인들이 우리 마음에 든 것 사실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점점 켜져 갔다.

 

선교사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마음이다. 피선교지에서 실망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리는 긍정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며 그 분이 이 일을 실패하게 내버려 두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사역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들 스크랜톤은 의료사역에 전념하도록 하고 자신은 벽안의 여성들을 개화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서당이 있어 학교 교육을 대싡하고 있었는데, 우선 필요한 것은 학교를 위한 부지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1885 10 23, 6천 평의 대지를 구입하였고 그 다음 해 1886 2월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의 블랙스톤 부인이 3,000불을 보내주었고, WFMS(여성해외선교회) 뉴욕지회에서 700불을 기부해 줘 11월 낙성식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학교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 이었다 외국인들의 잘못된 선입관으로 학생들은 오지 않았다. 1886년 메리에 의해 학교건물이 완성되기 전에 김 부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영어를 배워 성공하고자 하였으나 그만 병이 들어 3개월 만에 도중하차 하였다. 이어 두 번째 학생은 10세의 꽃님이었다. 그녀의 가난한 어미가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메리에게 맡기려고 데리고 온 아이였다. 이 학생이 사실은 최초의 영구학생으로 이화학당 역사에 기록되었다. 다음은 별단이다. 4세 정도 된 아이인데, 886년 서울에 콜레라가 만연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성 밖에 버려졌다. 이때 메리가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 치료해 주어 살렸는데, 이 아이가 별단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김점동으로서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메리 여사를 만났다. 이때 스크랜톤 대부인에 대한 첫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톤 선생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집어넣어 태워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였다. 그 당시 학당에는 나 말고 3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밥 먹는 일 외에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는 1886 11월에 4명이었는데, 1887년에는 11명을 증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화학당이 출발하였으며, 이화(梨花)라는 이름은 1887, 명성황후가 하사한 것으로서,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이때 메리의 기록을 보자.

 

한국에 온지 겨우 2 3개월이 된 지금 뒤를 돌아다보면 컴컴한 어둠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들이었다...(중략)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집과 11명의 여학생들이 있다. 그들의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성과 밝은 얼굴들을 볼 때 한국은 성공적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메리는 교육과 동시에 의료사업에도 개입하였다. 전통적인 내외법에 의해 남자 의사들을 기피하는 환경가운데서 발병해도 치료받지 못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아들 스크랜톤과 함께 의료사업을 1886년 봄에 시작하였다. 이 병원이 시병원이었다. 이때 가장 처음으로 혜택을 입은 아이가 별단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화학당의 학생이 된 것이다. 병원 일을 스크랜톤 혼자 보기에는 벅찼다. 그리하여 메리의 요청에 따라 여선교본부에서 1887 10, 여의사 메타 하워드를 파견하였다. 메타는 시카고의학교를 졸업하였는데,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스크랜톤의 병원 방 하나를 얻어 진료를 하였으나 1888 11, 이화학당 구내 한옥 한 채를 개조하여 병원을 만들었는데, 이병원이 바로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여관(후에 이화여대병원이 됨)이었다. 이는 후에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다.

 

메리는 교육과 의료사업도 중요했지만, 그녀가 한국에 온 것은 자선사업이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그녀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1888 1월 우리는 주일학교를 조직했다. 물론 구성원들 사이에 다소 종교적인 가르침은 있었지만, 이것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집회와 교육이 실시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2명의 여학생과 3명의 한국인 여성, 3명의 선교사 및 선교본부 여성 중 1명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집회는 메리의 신병으로 계속 모일 수 없었다. 잠시 쉬다가 그해 9월 다시 시작하였다. 이 주일학교는 점점 발전하여 다른 교회로도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사역을 서울 정동 중심에서 서울 근교 수원, 인천과 내륙지방, 양평, 공주까지 확대하여 나갔다. 그리고 1894년에는 여성선교사 최초의 지방 순회전도를 나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최선을 다해 복음 증거 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1901년 신병으로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갔다가 회복한 후에 다시 돌아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주의 일을 감당하였다. 아마 주님이 주신 영적 힘일 게다. 그녀의 때가 왔다. 1909 10 8, 이른 아침,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77세로 모든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니 지금도 그곳에 종종 방문하는데 그녀의 비석 앞에 서면 여사의 숨결을 느끼는 듯하여 반갑다.

 

그녀의 나이 52세에 아들내외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 신분으로 온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나름대로 안정적 위치에서 교회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아들은 안정된 의사직에서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굳이 선교사로 지원치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어느 날 한국 선교사로 결단하였을 때, 그녀는 주저함이 없이 허락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함께 헌신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결단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 스크랜톤은 그런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기에 한국에서의 사역도 훌륭히 감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그녀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역을 하였다. 학교사역만 감당하는 것도 벅찰 텐데 그녀는 주일학교, 순회전도, 여전도회 조직 등 엄청난 일들을 수행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런 에너지를 그녀에게 주신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에너지가 반드시 임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사람의 힘이 성령의 힘으로만 되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남편과 헤어지는 순간 주님과

결혼했다지요.

보통 여인들은 현실적 생활에

안주할 텐데...

당신은 참으로 하늘이 보낸 이

땅의 어머니였네요.

가난과 헐벗음, 그리고 소외된

이 땅 여인네들을 마음에 품고

가르치고, 치료해 주었던

영적어미,

당신 통해 얼마나 많은 여인들

위로를 받고 새 삶을 살았을까

당신을 보내 드릴 때 이 땅의

모든 여인들은 울고 또 울어서

옷깃을 적시며 양화진 갔다지요.

당신의 희생, 수고로 지금은

이 땅의 여인들이 활짝 웃으며

살고 있답니다.

당신을 닮은 여인들이 이 땅에

더 많이 세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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