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상의 등불을 비추고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선교사들은 교회설립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선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다. 하지만 복음이 가는 곳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빵인데, 이는 섬김과 봉사이다. 특별히 한국선교에 있어 교육과 의료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화를 이룩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평양의 숭실전문대학이나 서울의 연세전문대학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효시가 된다. 또한 세울 세브란스 병원이나 전주 예수병원은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기도 하였다. 물론 예수를 믿으라는 조건으로 치료 해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당시 병원은 빈민들을 교회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의 빛을 비추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크랜톤 대부인이나 세브란스 장로, 헐버트 선교사는 주님의 선한 이웃의 책임을 다한 분들이었다.
한국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
혹자는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에 대해 매우 혹평하기도 했다. 그를 가리켜 성급한 기질과 독설의 사람, 남의 잘못을 용서치 못하는 준엄한 성격의 사람으로 말이다.특히 그의 후임으로 내한한 헤론과의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은 당시 선교부 내에서도 심각한 염려와 우려 가운데 긴장의 시간들을 보낸 것을 감안한다면 기질과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한다. 하지만 민경배 교수의 평대로 선교와 이권의 외교, 양자의 관계 속에서 일했던 알렌에 대한 공로를 인정한다면 너무 냉정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선교 최초의 의료선교사로서 당시 광혜원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미국과의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알렌의 삶과 사역을 나눌 때, 그의 존엄한 삶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엄격하면서도 신앙적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초,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여 1881년 신학부를 졸업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업에 뛰어나 우등으로 졸업을 한 후에 그의 동급생이었던 메센저(Frances Ann Messenger)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메센저는 아주 조용하고 온화하며 남편을 잘 내조하는 스타일이었다. 메센저 역시 알렌과 결혼하기 전에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883년 5월 17일에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사로서 의사부부가 된 것이다. 알렌 부부는 당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최고 학부를 나온 엘리트 부부인 셈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그런 알렌부부가 어떻게 선교사로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알렌이 본국에서 학업을 하는 시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전환기 부흥의 시대였다. 교회와 학교 모두 대부흥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때 그 주독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D. L. 무디 임을 상기해야 한다. 각 대학에서는 기독학생회가 조직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로 나가는 때였다. 이때 이 역할을 담당한 기관이 SVM(학생자원단체)이다. 그렇기에 알렌은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다니면서 선교의 도전을 받았고, 그의 부인과 함께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파송 지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1883년 여름, 그는 25세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한국이 아닌 중국 상해로 파송을 받았다. 부부가 상해에 도착한 날은 그해 10월 11일이었다. 그들이 사역할 장소는 북경이었는데, 남경에서 중국인들과 충돌이 있었다. 알렌은 처음부터 중국이 잘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북경으로 가려고 남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이유 없이 중국인들의 공격을 받아 벽돌에 맞아 옆구리를 다친 일이 있었다. 또한 상해에서도 중국인들로부터 반미 혹은 반서양 감정으로 인해 양귀라고 돌벼락에 맞아 위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들은 중국선교에 대한 철저한 준비 부족과 중국적 상황과 잘 맞지 않아 처음부터 사역이 순탄치 못했음은 우리 주님께서 그를 한국에서 사용하시려는 싸인(Sign)인지 모른다. 또한 남경에 있을 때, 알렌은 다 죽어가는 군인을 치료해 주었지만, 때가 너무 늦어 죽은 적이 있었다. 알렌은 늘 이런 식으로 사역에 대한 진척은 없고 늘 불안과 염려 가운데 지내고 있을 때, 여러 동료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는 중, 헨더슨 박사가 한국에서 병조참판 등 다양한 직임을 맡은 독일인 뭘렌도르프를 만나 알렌을 소개하였고, 알렌에게는 한국에 가서 의술로 보다 의미 있는 사역 할 것을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한국에 의사가 필요한가를 타진하고, 본국 선교부에 자신의 형편을 알려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나 20일에 한국 제물포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 배 갑판 위해서 본 한국의 첫 인상을 옮겨보면,
“배의 갑판 위에서 볼 때, 조선의 해안은 황량하고 메마르며 대체적으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조선인들이 외부에 비쳐지길 바라는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선은‘은자의 나라’라는 이름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상으로 두 곳에만 그것도 매우 엄격한 제약 아래서 외부 세계와의 교섭을 허용했을 뿐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외부 세계와의 교섭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한국은 선교사가 활동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물론 1882년 미국과의 조약에 체결되었지만,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므로 알렌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한국에 입국하여 미국 영사관 공의, 영국, 일본, 청국의 공의, 세관 의사로 일하면서 보수도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알렌을 도운 이가 미국공사 푸트였다. 그는 알렌에게 신분보장에 대한 직책을 주었고, 거처 할 집까지 구입하여 주었다. 알렌에게 있어 푸트 공사는 참 귀한 은인이었다. 그런데 한 중요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한국 정부안에 진보파와 보수파로 양분되어 대치된 가운데 일본의 개화를 보면서 한국의 개화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가 민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혹은 수구파)의 세력을 우정국 피로연 자리에서 살해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다. 이때 그 살해 대상이 바로 민영익이었다.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었는지 당시 알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그날 밤은 그렇지 않았다. 그 고요함의 저변에는 무시무시한 폭풍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국공사(푸트)가 보낸 심부름꾼이 뛰어들어 왔다.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열리고 있는 곳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나더러 급히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조선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시내를 가로질러 급히 가본 결과 외국대표단들과 조선 정부의 고관들은 피가 몸에 튀어 매우 어수선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날 저녁 연회의 주인인 민씨 왕자(민영익)는 동맥이 잘리고 칼로 머리와 몸 등 일곱 군데를 찔린 채 숨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민영익은 개화파의 칼에 맞고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알렌은 3개월의 치료를 통해 살려냈다. 그리고 10만량의 사례금과 함께 왕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알렌은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순식간에 유명한 인사가 되었으며, 고종의 신임을 얻어 1885년 4월 10일, 오늘날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개명)을 설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제중원은 처음에는 알렌 혼자 진료를 하였지만, 후에 스크랜톤, 헤론 의사가 합류하여 장티프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 나병 등을 치료하니 개원 당해 약 1만 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였다. 하지만 알렌은 1887년 의료사업에서 은퇴하고, 그해 10월, 워싱턴 주재 공사관 서기로 귀국하였다가 1890년 7월 9일, 주한미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 정3품 당상관직)으로 임명을 받았고, 1895년 8월에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 관리가 되어 외교문제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1901년 그는 특명전권대신으로 격상되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일본의 불의를 규탄하는 보고서를 올려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1905년 6월 2일 해임되었다. 이때 알렌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5년 11월, 일본이 조선 정부로부터 종주권에 해당되는 승인을 얻었다는 발표를 한지 며칠 이내에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보다도 먼저 미국은 조선측에 알리지도 않고 조선에서 공사관을 철수했다. 사실상 미국은 이 문제에 있어서 영국이 일본과 공보 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미국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을 병탄하는데 매우 유리한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조선 병탄을 내버려둠으로써 다른 나라들도 미국과 비슷한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20년 6개월 한국에 있으면서 4년 정도만 의료선교사로 있었고, 나머지 기간은 외교관으로 일하였다. 초야로 돌아온 알렌은 한국에 26세의 나이로 제물포에 당도하였지만, 이제 약 21년 세월을 보내고 47세의 초로의 나이가 되어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에 정착하여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한국을 회상하면서 책 한 권을 집필했는데, Things Korean(알렌의 조선체류기, 예영, 1996)이었다. 물론 그 외에 몇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1907년 의료업에서 은퇴하여 1930년 건강이 악화되어 자신의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1932년 12월 11일, 톨레도에서 74세의 일기로 주님나라로 옮기어 갔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다. 사명은 각자 다르다. 만일 혹자와 같이 알렌을 평가절하 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리라. 알렌은 비록 처음에 의료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지만, 한국선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게 하시려고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하신 게다. 중국에서 적응치 못하고 한국으로 오게 하신 것도,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하사 살리게 하신 것도, 고종의 특혜로 제중원을 설립하여 직 간접적으로 주의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심도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뿌려 놓은 씨앗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를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리라. 아무리 그가 인간관계에 있어 큰 오점을 남겼다 할지라도 긍정의 측면까지 무시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평가가 아니다. 그는 또한, 외교관으로서도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소신 있는 자세로 본국에 보고함으로 그 직임을 박탈당할 정도로 그는 한국의 식민지화 반대를 미국에 대변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재능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재능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도록 하셨다. 그것이 바로 소명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의 일만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땅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대한 선교지이다. 각자 받은 소명대로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야 한다. 알렌은 하나님이 주신 의술로, 그리고 외교관적 자질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함과 나의 주장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양보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이라 확신한다. 알렌은 많은 장점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는 외교술에 능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신앙심이 있었다. 우리가 그를 통해 한 가지 배우는 것은 혹 우리가 어떤 문제 가운데 처한다면 인내함으로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해결하고자 하는 하늘의 지혜를 얻어야 하겠다.
1884년 초임 선교사 시절
얼마나 방황했을까
이것인가 저것인가 라는
양자택일 가운데 중국을
떠나 한국 제물포로 오던 날,
하나님의 뜻을 알았겠지요.
1887년 의료사역 놓았을 때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면서
당신, 주님 뜻을 알았겠지요.
1905년 을사늑약 보고할 때
얼마나 복잡했을까요.
그러나 모든 것 내려놓고
미국 고향으로 돌아갈 때
주님 뜻 알고 순종하셨지요.
이제 당신이 뿌린 씨앗,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세상
열방을 섬기고 있으니
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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