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명의 묘목, 한국 땅에 심고
중국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는 1807년 9월 7일에 입국한 모리슨이다. 모리슨이 중국 광동에 입국했을 때는 영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모리슨은 이 상황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국 본토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마카오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는 동인도회사 통역자리를 얻어 안전하게 미국인 행세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하였다. 미국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813년 밀네가 중국에 입국하였으며, 1817년에는 메드할스트가 입국하였다. 그러다가 1826년 귀출라프 선교사가 중국을 찾았다. 특히 그는 또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선교사로 한국교회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그리고 토마스, 로스, 네비우스는 그 이후에 각각 입국하여 한국선교에 의미 있는 일들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한국선교는 좀 더디게 진척되지 않았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한편, 한국선교는 중국보다 훨씬 늦었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중국의 빚을 지고 있다 하겠다. 첫째는 이미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경험한 선교의 지식을 가지고 한국 선교를 지원할 수 있었다. 존 네비우스는 그 대표적인 선교사라 할 수 있다. 그는 약 40년간 중국에서 체득한 동양적 사상과 습관, 역사를 바탕으로 동양인, 특히 한국인에게 맞는 선교방법을 창안했던 선교사였다. 또한, 귀출라프는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하므로 한국선교 가능성을 타진하였고, 그가 경험한 것을 책으로 기록하여 서양에 배포함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일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는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 배포하는 사역을 통하여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로스를 통한 <로스번역>본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토마스의 순교이다. 그가 순교함으로 한국교회는 그 순교의 피로 인해 건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