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루터와 독일 농민 운동

편집인 0 2017.01.28 11:19
당시 독일농민들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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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와 농민들 ©뉴스파워 김현배

 
1523년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칼슈타트의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은 훗날 독일 전역을 유혈 사태로 몰아넣은 서곡이었다. 1524년 6월,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16세기는 빈곤의 시대였다. 

당시 중세 봉건제도 밑에서 농민들은 오랫동안 세속적인 권세자들에 의해 노예로서 착취를 당한 삶을 살아왔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신음했던 농민들은 큰 보상도 없이 죽도록 일을 했다. 주일에도 혹독하게 일을 해야 했다. 농민들은 노동하는 짐승과 같았고 점점 더 자유를 상실하였다. 

또한 부과되는 조세 부담의 증가와 점차 증가하는 도시 빈민, 물가 상승 등에 등골이 휘었다. 농민들은 원한과 불만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혁명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접한 농민들의 항거 이러한 때에 농민들은 루터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별히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잘 드러나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작은 팜플릿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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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어판-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뉴스파워 김현배

이 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워 준 사상은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이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는 교황이나 사제, 왕, 귀족, 농부 등 모든 그리스도인은 차별적인 모든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사제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였고, 성직과 세상에서 직업의 구분도 부정했다. 

이러한 루터의 설교를 들으면서 농민들의 의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루터로 인해 농민들은 새로운 사회개혁 의지로 가득했다. 

그들은 올바르고 근원적인 12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과중한 세금제도 폐지, 농노제도 폐지, 사냥권과 어업권 허용, 산림과 목초지에 대한 공동소유권 허용, 강제 노동 제한, 과중한 부역 피함, 노동에 정당한 대가 지불, 사형제도 폐지, 불법 토지 반환, 사망세 폐지 등이다. 또한 그들은 교회개혁도 원했다. 

즉 교회에서 직접 자신들이 성직자를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였다. 이상 12개 조항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군주들이나 영주들은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부하였다. 농민들도 자신들의 입장만 고수했다. 결국 그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과 군주들 사이의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사실 독일에 있어서 갑자기 일어난 운동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농민들의 항거는 있어왔다. 하지만 1524-1525년 사이에 일어난 생존투쟁의 농민운동은 가담했던 농민들이 점점 많아져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농민들과 군주들 사이에 유혈 투쟁이 벌어졌다. 사실 농민들이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과 종교개혁의 사상을 잘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만인 제사장 교리’를 오해하여 농민 봉기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농민봉기를 부추긴 토마스 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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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뮌처 ©뉴스파워 김현배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따랐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나선 인물은 루터가 아니고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였다. 놀랍게도 뮌처가 지도자로 등장한다. 

뮌처는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닐 때 루터의 글을 접하게 되면서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비주의와 급진주의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었다. 뮌처는 광신적 신비주의를 혁명을 위한 신학적 기초로 사용한 것이다. 

그가 꿈꾸는 천년왕국은 성직자나 귀족, 평민, 농부 등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그런 사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격한 신비주의에 빠진 뮌처는 농민들에게 권력자들을 동정하지 말고 칼로 진멸하라고 하면서 농민봉기를 부추겼다. 이와같은 뮌처의 사상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슈바벤, 튀빙겐, 뮐하우젠 등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과격한 뮌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뮌처가 이끄는 농민운동은 필연적으로 피를 흘리며 폭력화할 수밖에 없었다. 1524년 중반부터 시작된 농민봉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지고 폭력화 되어갔다.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민란은 점차 독일 남서부와 중부 등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폭도들은 귀족들의 성과 주교들의 궁전을 파괴하고, 수많은 수도원들과 도서관들에 불을 질렀다. 또한 귀족들과 지주들과 성직자들을 고문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제후들과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굴복하면서 민란이 성공을 거두었다. 

뮌처는 독일 종교개혁 신학자요 농민전쟁을 이끈 사회혁명가다. 그는 계급에 기초한 사회 질서에 반대하여 혁명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고, 농민들이 권력자들과 맞서 싸운 농민반란을 성경에 비추어 정당한 행동으로 보았다. 

뮌처는 사회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급진적인 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폭동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 구조에 맞선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 개혁은 폭력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이처럼 과격한 뮌처를 향해 루터는 이단과 분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농민폭동에 반대하는 루터- “손에 있는 무기를 버리고 농토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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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 ©뉴스파워 김현배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농민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농민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했고 그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할 것을 옹호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자 루터는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루터는 갈수록 농민운동이 폭도로 변하고 폭력화가 심해지자 농민봉기에 대해 시종일관 강도 높게 반대했다. 농민폭도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단호했다. 루터는 농민들을 향해서 혁명이 그릇된 방법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루터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에게 주신 권위를 강조하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말씀처럼 루터는 농민들에게 통치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국가가 소유한 공권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국가의 합법적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정자는 세상에 꼭 필요한 직위다. 백성은 통치자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터가 원한 것은 분노에 가득 찬 폭동과 유혈혁명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과 신학적 진리였다. 루터는 폭력과 폭동은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제는 손에서 무기를 버리고 농토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광란하는 폭동 속에 있는 농민들의 귀에 루터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이 벼랑 끝으로 떨어질 때, 루터는 농민반란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농민군에 반대하며”라는 글을 통해서 독일의 제후와 귀족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외쳤다.

“먼저 귀족들과 주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농민들의 요구 가운데 일부 내용을 들어줄 것을 권면했다. 또한 농민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타협안을 농민들이 거부할 경우에만 무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거친 혁명을 진압하도록 호소했다.”

그러나 통치자들과 영주들은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진압의 고삐를 더욱 거세게 죄어갔다. 계속하여 피를 흘리는 농민전쟁은 독일을 어두움으로 덮어 버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종교개혁의 순수한 빛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루터는 농민들이 복음을 구실로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터는 강경 어조로 폭도들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고 다만 무기와 칼만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을 미친개로 여긴 루터는 위정자들에게 할 수 있거든 찌르고, 치고, 목을 비틀라고 당부했다. 

통치자들에 의한 농민들의 진압은 무자비하게 끔직했다. 그들을 대량으로 학살함으로써 폭동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농민봉기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졌다. 1525년 5월 농민들은 통치자들에 의해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완전히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의 농민들이 들판과 거리에서 쓰러져 목숨을 읽었다. 수백 명이 참수를 당했다. 이때 폭동 주동자인 토마스 뮌처도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약 10만에서 15만 여명의 농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수 천 개의 수도원과 성채가 파괴되었고, 수 백 개의 마을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전 지역이 황무지로 변했다. 농민봉기는 진압되었지만 결국 엄청난 피를 흘렸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너무나 비참했다. 루터는 농민들의 고통을 초래한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개혁은 폭력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독일 농민운동이 끝나면서 종교개혁의 파괴적 경향이 끝났다. 

농민전쟁이 종교개혁에 깊은 충격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낡은 교회의 잔해 위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시민 질서뿐 만 아니라 교회 질서도 새롭게 확립되어갔다. 농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루터 농민봉기는 루터에게 많은 오해와 손실을 안겨 주었다. 

루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농민들의 실망 또한 컸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지지해 주지 않는 루터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루터를 무자비한 농민반란 진압의 동조자요 배신자로 매도했다. 세속적인 국가 권위를 의존하는 개혁자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루터의 국가관인 ‘두 왕국설’은 농민들이 흘린 피와 무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루터는 농민들의 지지를 많이 잃었다. 가톨릭과 일부 영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들의 반란을 선동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루터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농민 봉기 사건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장애를 주었다. 하지만 루터는 폭력으로 도를 넘어버린 농민들보다는 제후들과 협력하면서 종교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농민운동이 루터에게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미 고난의 길을 사도들이 걸어갔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사도들의 뒤를 따라갔다. 또한 종교개혁의 새벽별인 체코의 존 후스,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16세기 많은 종교개혁가들도 비난과 잔인한 핍박 가운데서도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갔다. 루터 역시 농민과 귀족들 모두에게 미움과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주어진 종교개혁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루터의 신앙은 오늘 세상과 쉽게 타협해 버리고 반대파들의 끈질김에 쉽게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 버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GMS 독일 선교사,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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