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침례교를 개척한 펜윅
앞에서 우리는 캐나다 출신 선교사였던 맥켄지에 대해서 나누었다. 이번에는 두 번째 독립선교사였던 펜윅(Malcolm C. Fenwick)에 관해 나누어야 할 차례다. 그는 선교사로 오기 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비즈니스에 종사하였다. 그는 종교적 열심히 있었으며, 1887년 토론토 외국선교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당시 미국의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인 와일더(R. P. Wilder)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펜윅은 정규 대학교육이나 신학교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었다. 그저 와일더의 영향과 그리고 1889년 헤론 의사의 부인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는 헛소문을 듣고 한국에 가고자 하는 열정이 생겼다. 그가 한국에 내한하여 기존의 선교사들과는 좀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다. 예컨대, 농사짓는 방법, 과수원을 일구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다. 서구 선교사의 눈이 아닌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는 사역방법이라 할 수 있다.
186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펜윅은 그의 가정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계 목사 맥킨토쉬(Donald M. MacIntosh)의 영향가운데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건하고 강직한 신앙심을 소유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당시 사회적 죄악가운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교회를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학교를 섬기기도 하였으며, 성가대 봉사, 위원회 참석 등 열심히 교회활동을 하였다. 이는 그의 부모님과 맥킨토쉬 목사의 지도 덕분이었다. 이 대목이 그는 장로교인 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때 세상을 떠났고, 11형제 중 10번째이고, 18살 때 그는 가족들을 떠나 생활하였다. 아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일찍이 독립한 듯하다. 그는 농사와 원예 일, 장사에 종사하기도 하고, 법률사무소, 철물회사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후에는 한국선교에 필요적절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886년 어느 날 펜윅이 토론토 거리를 걷다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길가 한 모퉁이에서 주님께 이렇게 고백을 한다. “나의 주님이시여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 주셨고 내가 주님의 화목에 넘치는 얼굴빛을 응시했을 때, ‘너는 보잘 것 없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죽었단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알았다.” 그는 토론토의 한 철물점에서 도매업을 하고 있었을 때, 그는 수 년 동안 캐나다 나이아가라에서 매년 개최되는 성경사경회(Bible Conference)에서 은혜를 받고, 와일더의 강연을 통해 “나는 적어도 생명수를 길러다 주는 찌그러지고 녹슨 깡통”이라도 되겠다는 신념으로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었지만 토론토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들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아 1889년 말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 미혼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몇 개월 동안 거주하다가 게일과 같이 소래로 가서 정착했다. 그는 땅을 구입하고 1891년 그곳에 집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정원(과수원)을 만들어 채소나 과일을 키우면서 언어를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언어를 배워야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펜윅에게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당시 선배 선교사였던 원두우를 비난하는 편지를 미국에 보낸 사건이었다. 그의 편지의 내용은 “언더우드가 모금을 확보위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너무 지나치게 과대보고 하고, 또한 아직 성례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세례를 베풀어 실적만 높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미국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발행되는 ‘진리’지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선교 평론지인 ‘세계선교평론’지에도 게재되어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의 부인인 호톤 여사가 이에 대한 반박문도 쓰는 일이 있었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그는 소래를 떠나 원산을 개척하였다. 그러다가 1893년에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침례교의 유명한 사역자 피어선과 고든에 의해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3년간 받았다. 이는 그가 처음에는 장로교인 이었지만, 원두우와의 갈등문제로 인해 침례교로 이적하지 않았나 하는 대목이다. 그는 여러 개인과 단체의 후원을 받아 ‘한국순회선교회’라는 선교단체를 창립하고, 1896년 그 선교회 대표가 되어 한국에 재입국하였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했던 사역은 원산에 선교회 본부를 두고, 한국인을 훈련하여 그들과 함께 순회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선교방법과 교회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특히 장로교를 비난하면서 침례교의 조직을 강조하였다. 이런 태도가 다른 선교사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펜윅은 고집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기질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소신이었다. 그는 언제나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원산에는 크고 아름다운 집이 많았다. 그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초가삼간에서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을 즐거워했다. 동료선교사가 어느 날 찾아와 다른 선교사들처럼 벽돌로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이 어떻느냐 물으니 그는 대답하길, “그게 무슨 소리요.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방 한 칸도 없으셨소.”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생활을 하면서 전도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본국으로부터 선교비 지원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는 바울처럼 자비량으로 직접 과수원과 농장을 운영하면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이것 또한 그의 선교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다. 하나는 그의 관심은 육신적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계발을 시켜 주려고 노력을 하였다. 예를 들면, 땅을 일구는 방법, 그리고 그곳에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재배하게 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는 한국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동시에 성경공부를 통하여 자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외국인 선교사들 보다는 자국인 선교사가 더 효과적이다는 사실을 간파하였고, 자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사역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주로 상주하고 있었던 함경도를 중심으로 간도, 시베리아, 몽고 등 그 사역의 범위를 북쪽으로 넓혀갔다. 이것은 교단 후원이 아닌 독립선교사로서 활동했던 침례교 선교사역이 훗날 한국에 침례교가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지역적 한계라고 평가하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그의 사역의 열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순회선교회’의 설립이다. 말콤 펜윅이 1894년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할 당시 한 선교전문지에 펜윅의 “한국순회선교회”의 원리 및 표어의 선포”가 실렸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초기 선교 방법과 목표를 확인할 수 있다. 표어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정복하라.”였고, 그 목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한국에는 수백만의 영혼이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간다. 그들은 지금까지 십자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현재의 선교 방법이나 선교기관들의 능력으로는 이 요구를 채우기에 부적절하다.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한국에는 다른 선교협회나 현지 선교사들과의 충돌이나 간섭 없이 일할 터와 문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 이 일은 특히 복음의 직접전파로 수행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순회선교회의 커다란 목표이다."
이 목표에서 말해 주듯 ‘한국순회선교회’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교육, 의료, 복지사업을 간접적으로 접근하기도 하겠지만, 펜윅은 한국인들을 직접 만나 복음 전도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사역하기보다는 자국인(한국인)들로 하여금 간증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 하였다. 그 예를 펜윅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의 간증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였지만 김씨의 간증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다. 마치 서부지역의 구령 전도집회에서 구속받은 부랑자와 술주정뱅이의 간증이 도시의 유식한 전도사의 메시지가 사로잡지 못하는 절망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김씨 역시 그들과 같은 죄인이기에 이 한국의 죄인들도 김씨에게 감동했다. 하나님께서는 김씨를 구원하셨고, 위로하셨으며, 그를 행복하게 하셨다."
펜윅은 한국인에 대한 전도는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펜윅은 한국인 일꾼을 발굴하면 그를 효과적으로 전도케 하기 위해 훈련하였다. 그 결과 1906년에는 원산, 강경, 공주, 영동 등의 구역을 설정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나갔다. 그 밖에 밀양, 울진, 통천, 포항지방과 충북 예천, 울릉도, 함경도, 만주까지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도, 혹은 연변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도 이때(1906년)의 일이다. 후에는 1918년에 러시아 등 시베리아, 몽고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렇게 하여 250여 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전국에서 일하는 교역자가 70여 명이나 되었다. 그는 1925년, 62세의 노년에도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와 중국에 선교여행을 떠났다. 원산에서 배를 타고 경흥, 고읍, 증산 등 각 교회를 순회하였고, 간도로 해서 러시아까지 순회하였다. 그는 그 후 그의 영향으로 1940년대까지 국내외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실적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실로 <교회개척의 대가 혹은 달인>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는 타 교단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교세를 늘리지는 못했을지라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이 땅에 침례교를 개척한 초기 선교 지도자임은 분명하다. 그는 1935년 12월 6일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원산에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우리 교회는 세속된 교회와 연합하지 마시오. 또 한 가지 내 무덤에는 봉분을 하지 말고 평장을 하시오.”라고 했다. 그는 평소에 말하길, 무덤이 높으면 교만하게 보인다는 말을 자주했는데,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유언을 한 게다. 그의 삶은 외골수였지만, 성공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이는 그의 부인의 공이 컸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무디신학교 출신으로 한국에서 보이지 않게 여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개성 호수돈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전도인들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손이 닳도록 편물을 짜기도 하였다. 그는 펜윅보다 4년 앞서 1933년 하나님의 품에 안겼었다. 펜윅의 한국에서의 46년간 사역의 열매는 지금도 이 나라에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좀 고집스럽지만, 자기주장이 뚜렷한 펜윅을 통해 나름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그는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는 사역을 구상하였고, 실천하였다. 일반적으로 여타 선교사들과는 좀 다르게 토착화 선교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따른 선교방법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갔다. 예배, 전도방법, 주일학교 등. 미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들이었다. 하지만 펜윅은 한국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과수원 일구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들과 접촉하였고, 기회가 되었을 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그는 소신 있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선교의 대선배인 원두우가 한국에서의 사역을 지나치게 과장되어 미국에서 선전할 때, 그는 그것은 과장임을 폭로하였을 정도로 그는 강한 소신을 보였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 독자적인 노선의 선교를 하였지만, 그런 그의 기질은 침례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경 원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결코 세속적인 교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그의 교인들을 가르치고 마지막에도 유언을 하였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날개 하나가
부러졌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의 날개
되어 주시어
미지의 땅, 한국 오게 하셨네
가진 것 아무것도 없었지만
위로부터 받은 재능 은사
가지고 주의 일 하게 하셨네
비록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했지만, 개척자 맘 주시어
한국인에게 맞는 방법으로
주의 복음 올곧게 전하게
하시어 침례교 기초 세우게
하셨으니 하나님 하시는 일
놀랍고 정말 놀랍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