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부흥의 촉발자, 하디
하디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 의대 출신 의사로서 한국에 내한하였다. 하지만, 사역 도중 재정적인 어려움을 만나 감리교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다시 내한 하여 원산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지만, 사역에 대한 특별한 성과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을 때,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한국으로 도피했던 두 명의 무명 여자 선교사였던 화이트와 맥컬리의 간증을 듣고 그는 회개하였다. 우리가 당시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의 역사로 하디와 동료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원산을 중심으로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불은 1907년 1월,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까지 연결되었으며, 계속해서 한국 전역과 일본, 중국, 몽골,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친것이다. 그러므로 하디는 원산 부흥의 촉발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의사 출신, 하디(R. A. Hardie)는 독립선교사였다. 먼저 하디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게다. 하디는 스코틀랜드 혈통으로서 1865년 6월 11일 온타리오 할디만에서 태어났다. 21세 때인 1886년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1890년에 졸업하였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중요한 이유는 게일의 선교요청 때문이었다. 게일은 이미 1885년 6월에 한국에 입국한 바 있었다. 그는 한국의 의료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 YMCA에 선교요청을 한 것이다. 당시 YMCA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가장 왕성하고 공격적인 학생운동 그룹가운데 하나였다. YMCA 단체는 게일의 요청에 즉시 반응하였다. 이때 하디가 한국에 갈 의료선교사로 지명되게 된 동기는 장차 한국에 입국할 에비슨(O. R. Avison) 선생에 의해 설득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의 영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에 1890년 9월 30일 그의 아내와 함께 입국하였다
1890년 하디는 당시 토론토 의과대학에 재직 중이었던 에비슨의 집에서 며칠을 함께 보냈고, 에비슨은 토론토 유니온 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에비슨이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했을 때도 이 두 가정은 늘 함께 협력하는 사역을 하였다. 하디 내외가 한국 서울에 도착해서 해야 할 사역의 목적은 부산에 의료사역을 여는 것이었다. 하디는 아내와 가족을 일시적으로 서울에 남겨두고 어학학선생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때가 1891년 4월 14일. 그는 부산에서 언어를 배우고, 자신의 집을 진료소로 열어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가족들은 그 해 8월에 부산으로 내려와 가족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에 있었던 게일이 사역지를 함경도 원산으로 옮기게 되었다(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선교부가 연합하여 부산선교 착수함에 따라). 후에 하디는 게일을 따라 원산으로 옮긴 후 의료활동을 하게 되었다.
하디는 후원문제로 1898년 5월부터 남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왜 하디가 남감리교로 이적했을까? 이적 전까지만 해도 하디는 독립선교사였다. 그런데 1896년 휴가기간에 모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더 이상 YMCA의 후원을 받지 않고 더욱 안전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남감리교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즉 단순한 재정적인 문제이었다. 그리해서 하디는 남감리교 소속의 의료선교사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송도와 서울에서 잠깐 의료사역을 하였으나 1900년에 원산으로 옮겨 이때부터 그는 펜윅의 집을 빌려 의료소를 오픈하여 의료사역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908년까지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산에서 그는 사역의 열매가 별로 없었음을 한탄하였다. 1904년 선교보고서의 내용을 여기에 옮겨본다. 그러니까 원산으로 옮긴 후 3-4년의 기간이었다.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강원도)지경대 지역에서 어떤 다른 지역에서보다 애써 일하였으나, 그곳에서의 선교사역의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 주었고, 사역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감을 가져다주었다.”
처음에 그는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더 영적인 능력의 결핍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고,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나 오직 나의 능력으로 되느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디는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열린 기도회 기간 중 처음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후에는 주일 오전예배 때 한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교만, 심령의 강팍함, 그리고 믿음의 부족” 등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고하면서 눈물로 회개했던 것이다. 하디 선교사는 자신이 선교 사업에 실패한 원인이 믿음이 약하고 아직 성령 체험이 없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의 이런 고백이후에 그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면서 ‘평강과 기쁨’이 찾아왔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주변의 선교사들이 크게 감명을 받고, 한국에 새로운 부흥의 조짐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후에는 이것이 평양 대부흥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좀 더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사실 사경회는 1890년 중국의 선교사였던 네비우스에 의해 교회성장을 위한 대안으로서 당시 선교사들에게 제안되었다. 이런 집회는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시행되어 온 제도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장로교는 일 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에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감리교 역시 집회를 시행하였다. 이 사경회가 1903년 이전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개최되었다. 펜윅은 1896년 소래교회에서 회개집회를 열기도 하였고, 하디 역시 여러 곳에서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3년 8월 24일에서 30일까지 원산 창천교회에서 성경연구 모임은 좀 다른 차원에서 열렸다. 선교사들만의 모임이었고, 또한 중국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피난 온 무명의 선교사 화이트(Miss. M. C. White)와 맥컬리가 참석하여 그들의 간증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임에는 장, 감, 침례교 선교사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폭발한 성령의 역사는 1906년까지 이어지고,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은 1899년 즈음, 산동지역에서 시발점으로 1900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서양 운동으로서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교회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처음에는 보청멸양(청나라를 보호하고 서양을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후에는 반청복명(청나라를 반대하고 명나라를 재건하자)로 바뀌었다. 이 운동으로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서양의 제국주의, 기독교 세력을 배척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서양 선교사들과 교회가 타켓이 되었다. 당시 의화단은 교회를 불태우고, 특히 산서성 지역에서는 서양 선교사 159명이 살해되었고, 북경으로 올라와 수도를 포위, 외국공관을 파괴하여 엄청난 타격을 가하였다. 중국인 개신교인 5천 명 정도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3/4의 교회가 훼파되었다. 1900년 4월 6일, 영, 미, 독, 프 등 4개국은 청나라에 진압요구를 하여 8월 4일, 8개국 연합군 2만 명이 전면 공격하여 11월, 진압하기에 성공하였다. 결국 1901년 9월 7일, 신축조약을 체결하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
비록 중국에서는 의화단 사건으로 수많은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의화단 사건이 종결된 이후, 무명의 두 선교사들은 원산 기도집회에 참석하여서 우리의 하디 선교사와 동료선교사들에게 깊은 은혜를 끼치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심령의 성령의 불을 점화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역설적인 면이 있다. 당시 한국은 일제에 의해 인권과 자유를 유린하고, 한국을 속국화 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결국 1905년 일본은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켜다. 이때 고종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알렌과 헐버트 같은 선교사들이 이 조약의 불법과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미국으로 헤이그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 우리 하나님은 비록 나라는 잃었어도 영적으로 교회를 강건하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디게 하시었다. 부흥은 앞으로 닥칠 고난을 능히 극복케 하기 위해 일어날 수 있음을 원산 기도집회와 이후에 진행되는 부흥을 통해 경험하기 되었다.
의사인 하디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독립선교사가 모든 재정을 담당할 수 없어 도중에 미남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이적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사역과 함께 의료사역으로 이중적인 사역을 감당하였다. 물론 주의 사역을 감당할 때, 모든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담당해 주시지만, 선교사는 하나님의 지혜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디의 경우, 의사요, 목사로서 교만과 자기 의를 회개하게 함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러하기에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는 1935년 은퇴할 때까지 서울에 남아 있었고, 신학훈련과 문서사업에 크게 헌신하였다. 그는 연합감리교신학교 학장으로 9년간 섬겼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사역자들을 위한 ‘신학세계’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감리교 문서선교 협회를 섬기었다. 그의 사역의 족적은 한국 장로교보다도 감리교에 더욱 많이 남아있다.
한국선교 당시에 한국과 한국인은 매우 수준 낮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문명과 문화에 있어 매우 발전되었으니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함은 쉽지 않았을 것이 당연하였다. 하디는 특히 의사출신으로서 위생과 건강에 매우 관심이 많았을 게다. 그는 백인우월의식이 그 안에 있었으며,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하디로 하여금 겸손하도록 하셨으며, 원산 기도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면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그 모임가운데 임하였다. 그리고 주의 손에 귀히 쓰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회개의 사람이었으며, 성결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회개와 성결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선 사람들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말년의 사역에 대해선 별로 유익치 못할 것이니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주의 거룩한 동산에 있어도
심령이 냉랭할 때가 있다.
기도를 하지만 주의 임재 없이
중언부언만 한다.
말씀 증거 하지만 사람의 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때는 부흥이 필요할 때요,
하나님의 영이 그의 심령에
찾아가야 할 때다.
심령이 얼음같이 차가울 때,
주의 영이 강하게 부어졌으니
입술은 떨리며, 심령은 뜨겁고
드디어 속의 죄악 쏟아지고
모든 죄악 떨어져 나가니
성결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사
믿음 사랑 소망 주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