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의전 최초 한국인 교장, 오긍선
세브란스 장로의 기부로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민족의 발전과 맥을 같이 했다. 특히 전근대적 사회속에서 질병과 가난을 낙으로 살았던 백성들을 치료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그런 까닭에 교회설립과 함께 병원을 세워 민중 속에서 미래의 등불을 비추었다. 세브란스 병원은 알렌의 의한 광혜원(후에는 제중원으로 바뀜)을 그 뿌리로 두고 있으며, 이어서 헤론과 에비슨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이영준이 한국인 최초의 병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영준은 1934년 한국인 최초의 세브란스의전 교장인 오긍선의 제자였다. 따라서 해관 오긍선을 알면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의전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초기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가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한국인의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관 오긍선(1878-1963)은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에서 부친 오인묵과 모친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남 3녀 중 장남이었다. 그의 가문 역시 대대로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 인조대의 덕망 있는 영의정 오윤겸의 9세손이었다. 그리고 엄한 가훈에 따라 금욕을 절제하며 사회봉사 중심의 가문이었다. 해관의 부모님은 자선심이 강한 분들이셨다. 부친은 대원군 시절 감찰벼슬을 지냈는데, 전라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공주에서 금강으로 쌀을 싣고 내려가 궁핍한 백성들을 먹였다. 모친 역시 가난한 이들을 보면 구제하기에 즐거워했으며 빈자가 아기를 낳으면 집에 있는 쌀과 미역을 보내주시곤 하였다. 해관은 아마도 그런 부모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리하여 해관은 일평생 바로 자신이 아닌 이웃과 민족, 그리고 고아와 병든 자들을 위한 삶으로 채색되었던 것이다. 해관의 장손, 중근의 말을 빌리면,
“할아버지 대부터 제 아들 대까지 4대 의사집이라 하여 가끔 매스컴에 소개됩니다마는 끼니를 굶지 않으면 됐지 의사가 금욕을 바라면 이미 의사가 아니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이 나이까지 그분 뜻대로 개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관은 9세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고, 15세에 박현진과 결혼한 후에도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지만, 후에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에 해관은 스승의 추천을 받아 서울에서 내부 주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개화기에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해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이승만보다 1년 후배)하여 공부하면서 학생 자치기관인 협성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8년 말, 독립협회와 관련되어 협성회 회원들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그는 미국 침례교 선교사인 스테드만(F. W. Steadman)의 집에 머물면서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사역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공주에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금강나루터에서 침례를 받고 침례교 신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일단 배재학당으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관의 삶은 고향에서 서울로 신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올라와 배재에서의 공부와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큰 도전을 받고 인생관과 인생철학이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배재학당에서의 해관의 행적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졸업 후에 고향에 내려와 침례를 받게 되었는데, 1900년 그는 독실한 신자가 되길 결심하였다. 사실 그의 가문은 유교에 심취되어 있었기에 침례를 받는 것은 상상을 넘어선 일이었다. 그는 침례를 주의 은혜가운데 받으면서 장차 주의 일에 헌신하길 결심하였을 것이다. 해관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은 1899년 독립협회가 완전히 해산되었고, 스테드만과 함께 선교일에 종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1901년 스테드만은 일본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군산 야소교병원장으로 온 미국남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렉산더(A. J. Alexander)를 소개받았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관은 알렉산더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때, 알렉산더는 해관의 영특함과 성실함을 보고 미국 유학을 권유하였다.
해관은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영어실력이 탁월하였고,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남장로교측에서 입학금, 생활비 일부를 보조해 주어 1902년 3월, 켄터키주 덴빌에 위치한 센트럴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고학을 하면서 의학 기초학문을 공부하여 1904년 동 대학 교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한 후,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 편입학 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라는 권유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았지만, 서재필, 알렉산더 선교사의 조언으로 계속 의학을 공부하고 1907년 3월, 루이빌의대를 무사히 졸업,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만일 그가 심지가 약했다면 자신의 삶의 목표가 흔들리고 어정쩡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졸업 후, 루이빌시립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근부하고, 그해 10월, 미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선교사로 파송받아 오게 되었다. 이때 해관은 다니엘 박사가 설립한 군산야소교병원에 책임자로 오게 되었다.
입국한 해관은 배재학당 3대 교장인 벙커에 의해 순종에게 소개되었을 때, 순종은 전의로 입궁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해관은 본래 계획대로 군산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는 1901년까지 3년간 병원장으로 봉직하며 교육사업에도 관여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자신을 후원해준 알렉산더를 기념하여 안락학교를, 1909년 중학교 과정의 영명학교를 각각 설립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이 때는 일제에 의해 한일합장이 되던 해였는데,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광주 예수병원장으로 부임하였는데, 뜻있는 지식인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망명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병든 자들과 빈민들을 의술로 섬기는 것이 주의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병원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나가 1911년 9월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중학과정인 정명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매우 분주하며, 바쁘게 지나갔다.
그런 가운데 당시 미북장로교에서 설립한 서울의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가 있었는데, 1912년 미북장로교와 미남장로교와 연합함으로 운영하게 되었을 때, 해관은 1913년 5월 12일 미남장로교를 대표하여 세브란스의학교에 조교수로 취임을 하였다. 이때 그는 세브란스의학교에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서 의학사에 기록이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학계에 피부과 대부로서 연구 및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선진의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피부과 및 성병교실에서 1년간 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은 일본 총독부가 사립학교령을 개정하여 전문학교 교수에게 일본 학위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겸사해서 유학을 갔다 온 것이다. 그는 유학 후 1917년 5월, 귀국하여 세브란스전문학교 피부비뇨기과학교실 주님교수 겸 과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930에도 그는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빈대학에서 피부과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브란스의전에 재직하면서 큰 병원을 건립할 것을 Korean Mission Field(1927년 2월호)에 게재한 바 있는데, 그의 생각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한국에는 25개의 병원이 있고 그 안에 30명의 외국 의사가 있다. 세브란스 병원을 제외하면 각 병원 중에는 세 곳에만 의사가 1인 이상 있다. ... 나는 각 선교단이 각 지방마다 작은 병원을 하나씩 두기 보다는 병원을 몇 개 합 해서 큰 병원 설립하기를 제안한다."
해관은 의료계뿐만 아니라 세브란스의전에 재직하면서 사회구제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1월, 윤치호와 김병찬 등과 함께 경성고아구제회를 설립하여 경성고아원을 운영하였다. 1922년에는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을 설립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재단법인 경성양로원을 설립하였다. 경성고아원은 서대문 밖 옥천동에 있는 원두우 선교사의 소유지 3천 평을 매수하여 재단법인 경성고아원을 설립하였는데, 거의 모든 기금을 해관이 부담하였다. 해관은 한국인으로는 고아사업을 최초로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관을 고아들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의 자서전격인 <해관 오긍선>에 나오는 글의 한 대목을 옮기면,
“부모 없이 자라서 사랑이 그리운 이들에게 부모형제의 사랑과 우애가 샘솟게 하는 가족단위의 생활과 배우면서 일하는 보람 있는 일상생활이 다른 고아원에서는 볼 수 없는 고아의 낙원을 이루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고아 양육사업을 처음 시작하고 남다른 정성과 사랑을 쏟아 수 천 명의 고아를 길러내 입신출세시킨 해관은 정녕 고아들의 구세주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해관은 68세로서 각계각층에서 미국통인 그에게 많은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일선에서 사역하기 보다는 고문, 이사 등 후원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해방 전부터 애정을 쏟았던 고아구제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특별한 점은 1948년 정부수립 후에 이승만 정부가 보건부가 세워지면서 그에게 장관 수락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도 70세 노구이지만 고아들과 함께 남해안 거제도 근방 가덕도로 피난했던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고아들을 애정으로 돌봤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세브란스의전의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전을 설립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에비슨은 1934년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이사회는 병원장으로 적합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해관 오긍선을 만장일치로 피택하여 그해 4월 17일 에비슨에 이어 세브란스의전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해관이 피택된 중요한 이유는 평소에 해관의 독실한 신앙심과 평범하고 유순하게 보이지만, 말없이 실천하는 그의 인품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총독부 역시 그가 교장으로 취임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어떤 부정한 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들 사이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윤치호는 1939년 오긍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 학교는 매년 20만 원 정도 적자를 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와 병원의 책임을 맡기가 무섭게 수지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그에게 결점이 있다면 교수로 있는 선교사들을 너무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외국인 그룹 전체가 그의 적이 되고 말았다.”
해관은 세브란스의전 교장직에 있으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치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날 수많은 의사들이 의학공부를 하고 사회에 배출되어 활동하지만, 수준에 미달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즉 돈을 벌기 위한 밥벌이로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해관은 학생들에게 의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늘 강조하곤 하였는데, 해관은 늘 돈 버는 의사가 아니라 병 고치는 의사가 되라고 훈계하였다. 그의 의료관이 1937년 1월 2일자 <조광>지에 게재된 바 있다.
“성공은 그러한 것(양실병원을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공은 먼저 돈을 모았다고 하는 것 보다 얼마나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인술을 베풀었나가 중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42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1942년 자신이 정한 정년제에 걸려 65세에 교장직을 사임하고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오점은 친일행각이 들어난다는 것이다. 1941년 8월, 친일단체인 흥아복국단 설립위원회에 참여하였고,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 발표되었을 때, 그는 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자에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는 글을 통해 군 입대 지원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그의 친일행각에 대해선 여러 평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정성보다는 긍정적 삶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해관은 노후에도 언제나 부지런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의 외손녀 최숙경(이화여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팔순이 넘었을 때도 일의 분주함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피곤하다는 말 한 번 없이 묵묵히 ‘타이핑’하던 모습이 두고두고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해관은 1963년 5월 18일, 오전 10시 86세의 일기로 서대문구 대조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주 조용하게 잠자는 듯 눈을 감았다. 그의 영결식은 5월 22일 연세의고대학장으로 서대문 신문교회에서 거행되어 유족들과 유지들,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이 모인자리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망우리 가족묘원에 안치되었으니 우리나라 의학계의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그는 1934년 세브란스의전 교장 취임식 때, 자신의 모교인 미국 센추랄대학에서 명예이학박사학위를, 루이빌의대에서는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또한 국내에서도 무수한 표창을 받았는데, 1949년 정부로부터 사회사업공로표창을, 1955년 보건사회부장관의 사회사업공로표창을, 대한의사협회에서 의학교육공로상을,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정부로부터 공익표창을, 새싹회에서 소파상을 각각 수여받았다. 1963년에는 정부로부터 최고공로상인 대한민국장과 훈장이 추서되었다. 1968년에는 기독교문화출판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기독교서회 명예이사로 추대되었다. 해관은 수많은 수상과 표창을 받았지만, 그는 자만치 않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렸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온다는 전도자의 말씀은 우리가 늘 마음에 담아야 한다. 해관은 한 세대를 풍미하고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굴곡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 초기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주의 은혜로 미국 루이빌의대를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와 병원을 중심으로 한 사역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사회사업에도 열심을 내었다. 그가 의학계에 공헌한 것은 참 의미가 깊다. 나병 및 전염성 질환을 포함한 피부질환 치료와 연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사업을 시작한 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직도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은 우리 주변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도 역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은 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하는 것은 모두 허사로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시골뜨기 소년, 해관 오긍선
그는 청운의 부푼 꿈을 품고
배재학당에 들어섰으니
대를 잇는 양반사상이 조금씩
퇴색되고 세상을 위한 삶,
희생적인 인생관을 세웠더라
알렉산더 의사의 도움으로
거대한 미국 향하여 떠난지
수 년, 의학박사학위 얻었으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생각나 귀국해 군산 광주 목포
다니며 의술이 인술이라
주님께서 때가 되니 세브란스
의전으로 옮기시고,
한국인 최초의 교장직을 맡겨
이 땅의 의사들 길렀더라.
말년까지 고아들의 아버지로
빈자와 고아들 위해 살았으니
참 고마운 의사 천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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