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그토록 묻히길 원했던 헐버트
1886년 선교사가 아닌 육영공원 영어 교사로 내한 한 헐버트는 한국에서 만 8년간 재직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이 그립고 잊을 수 없어 다시 감리교 선교사로 입국하여 문서선교를 위시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사역을 하기까지 우리나라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분이시다. 물론 육영공원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국사역의 추억은 아마도 1905년 을사늑약을 미국을 위시한 세계회의에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상설, 이준, 이휘종과 함께 헤이그에 갔던 사건일 게다. 물론 특별한 소득은 없었지만, 그는 미국에 가서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상황을 알리고 다시금 한국에 내한 하여 독립을 위해 무던히 힘쓰다가 본국에 강제송환 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다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의 한 부분을 함께 나누므로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1863년 1월 26일 미국의 버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며 미들버리대학의 학장이셨던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매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는 부모의 영향으로 당연히 교육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게다. 또한 그의 외가는 다트머스대학을 설립했는데, 1884년 이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는 복음 선교사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영어교사로 오게 되었는데,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1882년 미국과의 조약체결로 인해 영어를 잘 구사 할 수 있는 외교관이 필요했다. 따라서 고종은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하도록 했는데, 문제는 가르칠 영어교사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때 한국주재 공사인 푸트의 주선으로 미국 국무성 교육국장 이튼은 헐버트와 벙커 부부, 그리고 길모어 부부를 한국에 파송한 것이다.
하지만, 길모어는 1889년 3년 만에 귀국하였고, 벙커는 육영공원이 폐지되어 1894년 8년 만 근무하다 감리교 선교부에 종사하였고, 길버트는 육영공원에서 5년만 근무하면서 최선을 다해 학교와 학생들을 섬겼다. 이때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기숙하였으며, 공부를 위한 교재, 학용품, 식사 등 일체 비용을 미국 육군사관학교처럼 정부가 지급하도록 하였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공부하도록 동기부여를 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오대양 육대주를 설명하면서 서방세계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켜 큰 꿈을 품도록 지도하였다. 학생들은 공부에 진척이 있었으며, 고종과 정부가 이 학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지만, 고용기간만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길 결정하였다. 육영공원은 조선정부가 개화초기 조선의 발전을 위한 지도자들을 양육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였기에 헐버트는 더욱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1891년 11월, 유럽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1888년 9월, 유니온신학교 시절 친구였던 메리(May Belle Hanna)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오하이오주 푸트남 육군사관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아마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길버트에게 주신 게다. 그러다가 1892년 7월, 일시적으로 미국에 귀국했던 아펜젤러 선교사 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것을 제안 받고 그 다음해인 1893년 9월, 가족과 함께 다시 입국하였다. 하나님은 아펜젤러를 통해 길버트를 부르신 것이다. 이때는 교사가 아닌 선교사 신분이었다. 그는 주로 문서사역에 사역하였다. 당시 감리교계 출판사인 삼문출판사에서 올링거가 싱가포르로 전근 간 자리를 채워 주었고, 월간지인 <코리아 리뷰>를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문잡지인 <The Korea Repository>도 편집하였다. 이 잡지에 그는 한국에 관한 것들, 풍수장이, 이두, 미술, 속담, 문학, 한국민족의 기원 등을 기고하였다.
헐버트의 한국사역에 있어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 사건은 한국독립을 위한 사역이었다. 당시는 일본의 강점기였는데, 특히 1905년 일본정부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조약을 체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고종은 길버트에게 밀서를 주어 그는 미국 워싱턴으로가 미국의 주요 정부요인을 만남으로서 이 사실을 알렸지만, 친일본 정책노선을 걷던 미국은 그의 주장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공사관으로 있었던 알렌의 직을 파면까지 하였다. 1906년 7월, 헐버트는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한국적 상황 속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을 해결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1907년 7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 황제의 밀령을 가지고 한국인 3인과 함께 스위스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하여 그 회의에서 한국 상황을 보고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미국으로 가서 이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기도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1909년에 돌아와 잠시 체류하다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참으로 한국을 한국인 이상으로 사랑한 선교사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인을 계몽하는 글을 많이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청년을 계몽하는 글이든지, 한국에서의 교육의 필요성이라든지, 한국의 실정을 외국에 소개하는 글이라든지 대단히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인들을 계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그가 젊은이들에게 넓은 세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글을 옮기면,
“고상의 회포를 풀어 구미 각국에 유학하여 내 마음대로 내 목적대로 정치 법률과 농공상업의 각종 학업을 연구 종사하여 몇 해의 성상을 경과하면 물론 학식은 유여 하려니와 사회형편과 인생고락을 대개 짐작하여 그 업을 왕성하고 고국산천으로 돌아올 제 청춘소년의 기개가 이에서 더 좋은 일과 더 상쾌한 일이 또 있는가. 실로 오늘날 청춘소년의 한 번 행하여 볼 일이라 어찌 구구히 조국 고루한 사회에 거쳐야 이에서 더 좋은 세상이 없는 줄 생각하리오.”
또한, 일본의 강점기로 인한 독립에 대해서도 강연을 하였는데,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세계에 강하다하나 금일에 일본 문명을 비유로 말하면 뿌리 없는 꽃과 같으니 꽃이 당시에는 보기가 찬란하다 할지나 어찌 장구하리요 결단코 오래지 아니하여 한국에서 행하는 일인의 세력이 패망할 줄을 아나이다. 나는 한국에 있은 지 수 십 년에 물정을 자세히 알고 일인의 학정을 눈으로 보았으니 금일에 귀국을 하여 여러 가지로 힘을 다하여 미국 각처에 공론을 일으키려고 방금 각처로 다니는 중이요.”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독립운동을 돕기도 하였다.
1945년 한국이 해방이 되니 한국의 지인들을 통해 미국에 있는 그를 초청하였다. 그는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배편으로 인천을 통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86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오랜 시간 항해하면서 피곤이 누적되었고, 몸이 쇠약해져 청량리 위생병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한국에 온지 1주일 만에 8월 5일, 오후1시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의 비석에는 그가 과거에 언급한 것처럼,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는 한국의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구라 할 수 있다.
헐버트는 한국을 지극히 사랑했던 선교사다. 그런 증거가 김동진 선생의 수고로 발견되었는데, 헐버트가 다트머스대학 졸업 50주기인 1934년 그의 나이 70세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를 보면, 이런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한국을 세상에 알리고,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그가 한국에 체류한 때는 젊은 24세부터 43세까지였다.) 바쳤다. 미국에 가서 정부요인을 만난 것, 헤이그에 밀령을 가지고 간 것과 미국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한 것 등. 이 모든 것은 주의 복음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민족의 독립은 곧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이 일에 전력투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역을 한 것은 그가 한국에 대한 관점 때문이었다는 이광린의 주장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을 선교라 여겼다. 러시아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사는 것이 곧 선교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선교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사명을 선교지에서 감당하는 것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이와 같이 독특한 선교관을 가졌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 그러하기에 생각이 중요한데, 그는 당시 한국이 일제의 강점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선교사의 사명임을 알았다. 그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과 헤이그에 간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한국인보다도 더욱 사랑한 분이셨다. 그가 미국에 강제로 송환되어 갔어도 늘 한국을 생각하며 독립을 위해 일하고, 기도했으며, 해방이 되어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왔을 때 그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리고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유명한 말은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가슴 뭉클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셔서 미국인이지만, 한국을 위해 보내신 하늘의 전권대사임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한 번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
조국의 소중함을 잊었었는데,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 유럽을 발로 뛰면서
한국을 변호했던 그 이유는
뭘까요?
부끄러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나의 조국 문제를 당신에게
맡겼다니 너무 황송했습니다.
힘드셨지요?
당신이 외쳤기 때문에,
그 기도에 응답하셨던 게지요.
조국을 이제야 알았답니다.
조국이 있어야 함도 배웠답니다.
조국교회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함을 당신이 가르쳐 준 게지요.
이제 조국교회를 위해 더욱
기도할 것을, 그것을 당신은
내게 가르쳐 주셨답니다.
이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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