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군산 개척자, 전위렴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전라도 군산땅을 자주 찾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 몇 번 가 본 기억은 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 특별한 애정을 갖진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단지 일제시대 잔재인 건물들과 강제로 징수해 가기 위해 군량미를 실었던 항구만이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미남장로교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을 공부하면서 군산은 어느덧 나의 고향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우리의 전위렴 선교사가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남긴 추억과 흔적들은 어느덧 군산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이후로 10차례 이상 방문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 군산을 생각하면, 비록 작은 항구도시지만 지금이라도 그곳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바로 전위렴 선교사가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위렴(William M. Junckin, 1865-1908) 선교사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만일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향인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천벅으로 가야 할 것이다. 전위렴은 1865년 12월 10일에 바로 그곳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웅변과 남을 설득하는데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부모와 교회로부터 물려받았다. 그가 워싱턴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중요한 동기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입학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기회만 되면 전도와 선교여행을 통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사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릴 때의 신앙이 곧 성장하면서 자신의 장래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된다.
전위렴은 주일학교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어 주일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기회가 되면 지방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 이때부터 이미 중국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였고,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1891년 전국신학동맹 해외선교연합집회(내쉬빌)에서 원두우와 윤치호의 강의를 듣다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한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선교의 미남장로교 소속 7인의 선구자들과 함께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에 입국하여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어 공부와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훈련이었다. 이후에 그는 선교부의 전략에 따라 1893년 9월에 최의덕과 함께 전라도 지역, 전주를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하지만 그의 본격적인 사역은 1895년 5월부터 시작했다. 이때 방문을 니스벳은 이렇게 설명한다.
“1893년 9월 전킨(전위렴)과 테이트(최의덕)는 전북도청 소재지인 전주를 방문하였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그들은 조랑말을 타고 여행하였다. 동양의 풍습에서는 침구류와 짐 꾸러미를 한데 묶어 포대기에 싸서 조랑말에 올리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조랑말을 타고 여행하는 것은 배로 여행하는 것과 같이 매력이 있는데 이는 말이 움직임에 따라 말 위에 탄 사람의 몸이 전후좌우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 전킨과 테이트는 후에 우리 선교사업의 큰 거점 중에 하나가 될 전주를 아름다운 성곽도시로 생각하였다. 이곳은 예전에 왕족의 일가가 살던 고을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매우 보수적인 곳으로 역사가 오랜 귀족적 생활규범을 가지고 있다.”
전위렴의 사역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눌서와 드루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식적으로 선교지인 군산을 방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894년 3월 27일,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하여 3월 30일, 새벽 군산에 도착했다. 약 4일이 걸린 셈이다. 당시 군산은 하나의 어촌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었다. 군산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곳이기에 숙박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주막에서 잠시 머물고, 그곳을 출발하여 3월 31일, 오후5시에 전주에 도착. 다음은 금구, 태인과 정읍, 흥덕, 줄포, 곰소, 영광, 함평, 무안, 목포 , 고흥, 녹동, 벌교 등을 거쳐 순천을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 이때가 5월 이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여행을 하고 5월 7일 부산을 떠나 5월 9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것이 미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순회여행이었다.
전위렴이 전라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게 된 것은 드루와의 동행이었다. 이눌서와 드루가 전라도 땅을 방문한 후에 선교사회의에서 군산선교에 임무는 전위렴과 드루에게 넘어갔다. 전위렴은 순수 복음선교사요, 드루는 의료선교사였기에 호흡을 같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1895년 3월, 두 사람은 배로 제물포를 출발. 풍랑과 안개로 인해 4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1일 만에 군산에 도착했다. 군산에 도착한 전위렴은 그동안 한국어를 익히고, 타고난 웅변실력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복음을 믿게 하였다. 이때 접촉한 이들 가운데 두 사람, 김봉래와 송영도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가 1896년 7월 20일(월)이었다. 이것이 전라도 지방의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한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군산에 살고 있다고 하니 그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봉래의 손자가 현재 군산 개복동교회 장로로 섬긴다.
전위렴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교회설립이요, 다른 하나는 교육사역이다. 1895년 3월에 군산에 전위렴이 도착하여 처음으로 얻은 신자는 김봉래와 송영도였다. 이때 차일선도 있었지만,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세례를 받지 못했다. 이때 농민들이 주동이 된 동학혁명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1896년 봄부터 전위렴과 드루는 다시 전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때 전위렴의 집에서 처음으로 드린 주일예배에 송영도, 김봉래, 차일선 등이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 날이 4월 6일이다. 이것이 바로 군산교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얼마는 군산선교부가 궁말로 옮기면서 세워진 궁말교회로 이적 하게 되었다. 궁말교회는 군산선교부가 궁말로 이전하면서 세워진 교회였다. 전위렴은 1899년 12월 21일, 그의 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궁말교회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구암교회라 한다.
교육사역은 전위렴의 부인 공헌이 크다. 군산의 영명학교는 전라도에서 최초의 서양식학교라 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적어도 1901년 이전에 전위렴의 서재에서 시작하여 1904년 보통과와 중등과로 분리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에 이 학교는 한국인 교사들을 등용하여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1911년에는 영명중학교가 웅장하게 건립되었다. 이 학교 교사출신 가운데는 우수한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박연세, 김인전, 문용기, 문정관,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 학교 출신들과 함께 1919년 3.1운동을 선도하였다. 지금도 군산에 가면 그 현장을 견학할 수 있다. 또 군산에 멜볼딘여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버지니아 렉싱턴장로교회 여성들의 모금으로 군산에 세워진 학교였다. 이 학교 역시 전위렴의 부인의 수고로 세워졌는데, 이 학교 역시 전위렴의 후원과 지지로 군산에서 크게 성장한 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군산에서 사역을 하던 전위렴은 군산을 중심으로 옥구, 익산, 남전리, 김제 등 많은 지역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전도에 힘쓰고, 학교사업으로 인해 심신이 지쳐 더 이상 사역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미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전위렴이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의 임지를 전주로 옮기라 명령하였고, 그의 거주지역에서 20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였다. 전주로 옮겨온 그는 <서문밖교회>를 담임하면서 예배당을 신축하고, 다른 교회 6개를 세웠고, 포사이드와 협력하여 고아원도 세웠다. 그렇게 그는 끝없는 열정을 가지고 사역을 하다가 결국 1907년 12월 폐렴에 걸렸고, 다음해 1월 2일에 43세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비록 그는 한국에서 15년 동안의 사역을 마감하였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다 간 분이다. 당시 동료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전紀全(전킨을 기념함)여학교를 전주에 세웠다.
그의 사역은 비록 짧았다 할지라도 니스벳이 언급한 것처럼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역을 몸소 그는 우리에게 보여 준 분이시다. 전위렴은 우선, 주일학교에 지극히 큰 관심을 가졌다. 물론 한국사역에서는 교회사역 및 전도사역 때문에 그의 부인을 통해 학교교육, 교회교육을 위임하였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는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적극 지원하였을 것이다. 무디 역시 주일학교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의 사역 중심에는 언제나 노스필드의 학교와 시카고의 학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두 번째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군산에서 너무 지나친 열심과 열정으로 사역을 하다 보니 건강을 해치게 되어 선교부에서는 반강제적으로 전주에 이임 가도록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사역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쓰러지게 되었고 주의 나라로 옮기게 되었으니 그는 어쩔 수 없는 열정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한국에서, 특히 군산에서의 그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옛날 군산은 작한 항구도시,
소박한 시골풍경의 한 마을에
예쁜 교회 세워 복음 전했으니
수많은 백성들 그 교회 통해
예수 믿고 천국 백성 되었어라.
전킨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언제나 자랄까 걱정했는데,
주님께서 자라게 하시더니
지금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더라.
아, 군산은 그의 숨결 느낄 수
있어 언제나 정겨운 곳이라.
그러나 아쉽다.
좀 더 사람들과 함께 했더라면
당신에 대해 더 많은 것 알 텐데,
천국가면 당신 행적 알 것을
기다리면 훗날 만나겠지.
천국에서 당신 손잡고 기뻐하며
춤 출 것 생각하니 기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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