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코비드19는 21세기 역대급 바이러스 사태이다. 2019년 11월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할 당시 지금과 같은 펜데믹(pandemic)이 올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유럽과 미국을 집어 삼키고 있는 중이다. 전세계적으로 확진자가 38만명, 사망자는 16만명을 넘어섰다(3. 24 기준). 앞으로 강력한 치료제와 백신이 계발되는 않는한 세계는 경제적 대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각국에서는 경제적 대공황을 예측하고 있으며, 사재기 등으로 인해 혼란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대구와 경북에서 크게 확산된 후, 지금은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비롯한 유흥업소에서 집단적 확산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양병원을 비롯한 병원에서도 집단적으로 감염되고 있다. 정부는 더 이상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행정명령을 내려 출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양자간에 갈등은 더해만 간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어떤 목회적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교회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논제이다. 필자가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한국의 어떤 교단에서도 이에 대한 목회대응에 대한 지침서를 구체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하지만 미국 교단에서는 이미 제공하고 있음. Cf. https://www.pcusa.org/covid19/). 물론 성명서나 단편적인 사설은 내 놓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정부의 명령에 대항해서 예배에 관해서만 논조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에 있어 예배는 매우 중요한 의례(ritual)이다. 그러나 시국이 이럴 때 순교를 각오하고 모인다는 것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사안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교회는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목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한국만이 겪는 재해가 아니라 전세계가 경험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미 16세기를 전, 후해서 유럽에 흑사병(https://crossmap.christiandaily.co.kr/web/news/news_view/11551) 있었고, 1918년 즈음에 전염병(콜레라)이 있었다 한다. 우린 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하며, 교회는 목회적 대응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이에 대한 대책이 거의 없어 보인다. 다만 예배에 대해서만 강조하며, 현장예배를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On-line)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70.5%가 된다(연합뉴스, 20. 3. 7). 이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것은 차재에 더욱 심도 깊은 논의를 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의 상황에서 어떤 목회적 대응 혹은 대책이 필요한가를 논의하기로 하자. 필자는 편의상 5 가지(상담적, 위로적, 예방적, 화해적, 실천적 대응) 범주로 나누어 논하고자 한다.
첫째, 상담적 접근이다. 예배(Worship service)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적 행위이며 집단적 상담적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공적예배와 심방(Home visitation)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담은 영적인 측면이 강하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요즘같이 분주한 세대에는 거북스럽다. 한국교회는 원래 심방목회였는데, 세상이 변하므로 주일 혹은 주중 예배로 대치하는 목회적 환경이 되었다. 공적예배만으로 교인들의 영적인 면을 충족하기엔 부족하다. 세상은 매우 사악하고 사단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텔레그램 박사방’을 보라. 얼마나 끔직한 세상인가. 그것도 25세 젊은 청년이 주범이라는데 더욱 충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목회자들은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영적 돌봄(spiritual care)을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교회는 예배 한 번 드린다고 교회적 역할을 다한다고 하면 안된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 한 번 들려주고 그들을 방치하면 안된다. 목회자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양들을 목양 하듯,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교인들)을 주시하며 도와 주어야 할 사명이 있어야 한다. 이는 매우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의 초심이어야 한다.
둘째, 위로적 접근이다. 교인들의 심리적, 환경적, 그리고 영적인 상태가 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요즘 한국적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계층은 노인들이다. 이들은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늘 집에서 격리되어 있어야만 한다. 물론 자녀들이 있는 경우는 전화나 방문 등을 통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가운데 있는 이들이 문제다. 이들을 위해 목회자는 전화나 개별적 방문을 통해 위로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런가 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가정도 점차로 늘고 있다. 자영업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 그리고 소규모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갈수록 재정적 부담과 위기가운데 내 몰리고 있다. 정부에서 대책을 강구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줄 순 없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선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목회자의 권면과 위로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가운데는 이번 사태로 부모를 잃은 가정도 있을 수 있다. 이들만큼 큰 위로가 필요한 가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적 혜안을 가지고 상담이 필요한 교인들을 찾아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셋째, 예방적 접근으로서 교회는 푸른초장을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은 가정과 교회여야 한다는 것은 신학교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세상은 우리가 믿어야 할 곳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곳이다. 정치인도 경제인도...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가. 4월 총선을 앞두고 그들은 역시 사탕발림으로 국민들을 유혹할 것이다. 오직 자신들의 정권을 획득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경제인들 역시 돈 버는 목적을 위해서 소비자들을 현혹시킬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런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로 와서 위로받고 치유받길 원하는 교인들을 위해서 순수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바울처럼(행20;17-27) 눈물로 교인들을 보듬어 주어야 하고,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와 헌신, 소망, 그리고 사랑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영적 헌신이 식었다면 목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현재 당신의 헌신도는 어떤가? 한 번 성찰 할 수 있길 바란다.
넷째, 화해적 접근이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중보적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예수님만이 참된 중보자이시며, 목회자는 그의 대리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언제나 어디서나 중보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중보적 역할이 필요한 곳은 예배이며, 그리고 다양한 목회적 활동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중보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도가 그 대표적인 것이며, 또한 교인들이 전쟁, 폭력, 불의 등이 만연한 세상에서 승리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바로 중보적 역할이다.
필자에 생각으론 코로나19 환경에서 목회자가 정치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정부와 대립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지금은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적 사회이다.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위험한 사회에 우리는 처해 있다. 따라서 교인들을 선동하여 정부와 싸우는 것은 미련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현장예배는 잠시 중지하는 것도 괜찮다. 아니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이 사태가 지난 후 다시 예배가 회복되면 된다. 여기에 목회자가 지나치게 발언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해치는 것이라 사료된다.
다섯 번째, 실천적인 접근으로 어쩌면 가장 실제적인 것일 것이다. 여기서 실천(practices)이라 함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아무리 이론적 혹은 학문적으로 미사려구를 섞어 주장하거나 발언했다고 해도 목회 현장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가장 무능한 목회자가 될 것이다. 우리의 옛 믿음의 조상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기키고 희생하였다. 일제시대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순교자들과 한경직과 옥한흠 목사가 그 대표적인 분들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걸고 있는 처소에서 행함의 목회자가 되길 촉구한다. 요사이 SNS를 보면, 너무 가볍게 글을 올리는 목회자들을 볼 수 있다. 목회자들의 그런 가벼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변화될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교인들에게 빈축을 살 뿐이리라.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장 은혜로운 목회적 행위를 실천할 것을 다시 한 번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가지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함께 생각해 보자. 우선, 상담적 접근으로서는 직접적으로 교인들을 만날 수 없다면, 전화나 SNS등을 통해서 만나면 좋겠다. 따라서 목회자는 직접 대면치 못하는 교인들을 위해서 비대변적 상담을 하루 하루 계획을 세워 실천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줌(Zoom) 등의 어풀을 통해 다인(several peoples)과 상담을 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인 상담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요즘, 재택 근무나 휴직, 휴무로 인해 집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목회자는 이런 틈을 이용하여 영적 돌봄의 기회로 삼고 교인들을 돌보면 좋을 것이다.
위로적 접근의 방법으로는 가능하면 직접 만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늘 홀로 있는 노인들과 재정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 한 마디도 중요하지만, 밥을 함께 먹는 다든가, 차(혹은 커피)를 한 잔 마시든가, 산책을 함께 한다든가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게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부담이 되는 방법이겠지만, 하늘이 채워 주실 줄 믿고 대접하면 천사의 위로가 반드시 있을 줄 믿는다. 함께 먹고 마실 때 마음이 열림을 잊지 말라. 그러나 가장 위로가 필요한 가정은 많지는 않겠지만, 부모를 잃은 가정일 게다. 이런 가정을 위해선 마음을 다한 교회적 위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대해선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예방적 차원의 대책으로는 목회자가 기도하는 것이 우선일 게다. 기도하다 보면, 성령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길 원하실 것이다. 바울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환상을 보았다. 기도하다 보면, 만나야 할 교인들을 생각나게 하고, 찾아가게 할 것이다. 목회자는 이럴 때, 직접 대면하거나 전화 등을 통해 그들과 대화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치유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고 선재적 차원에서 교인들의 상처와 위기를 위로하고 예방했으면 좋겠다.
화해적 방법으로는 교회안에서는 앞에 언급한 방법을 사용하면 될 것이고, 교회 밖에서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면 좋겠다. 오늘날은 길거리 전도는 막혔다. 이미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이단들이 오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삶으로서 제자도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 조건없이 세상 사람들을 위한 헌신된 삶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말이지 세상 정부에 하나님 나라에 이득이 없는 소모적인 도전과 싸움은 이제 중지되길 바란다. 솔직히 지금 한국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주장은 본질적인 주장이 아니다.
마지막은 실천적 대안으로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역교회는 주기적으로 지역사회를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목회적 프락시스(praxis)는 늘 변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도방법으로 지금은 안 통한다. 이전의 교회 모습으로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이는 상황(context)가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 혼자 할 수 없다면, 목회연구기관을 통해 지역사회를 조사하고, 그들의 필요와 선호도를 조사하여 그에 맞는 목회적 돌봄 혹은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오늘날 목회적 대응에 대한 나름대로의 목회적 아이디어를 개진하였다. 물론 목회자들 각자에 따라 그 관점과 주장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환경속에서 적극적인 목회적 대응이 거의 없음을 판단한 후, 이 글을 여기에 내놓게 되었다. 정리하면, 목회자는 위기의 시대에 지역교회를 위한 목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이에 상담적, 위로적, 예방적, 화해적, 그리고 실천적 목회 대응이 있어야 한다. 바라기는 비상적 시국에 교회가 승리할 수 있는 사랑의 수고의 목회가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