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대
성경을 굳이 대지 않아도 지금은 혼돈의 세대이다(마24;4-5). 21세기 들어서면서 성경해석과 신학방법론이 크게 발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포스트포던 시대의 특징이 상대주의인것처럼, 신학자들은 진리를 상대화 시킨다. 예를 들면, 어떤 질문에 대해 A도 옳고, B도 옳고, C도 옳다는 것이다. 해서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없다는 것과 신학이 형성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밀가루 음식이라 해서 짜장면과 쫄면, 국수가 다 같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대는 참 위험하다. 절대적 진리를 찾을 수 없는 사조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흑과 백은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보는 페이스북에는 주로 신앙인, 목사, 그리고 약간의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포스트모던니즘의 특징을 한 눈에 감지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만을 주장할 뿐, 대화를 통해 어떤 논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단편적인 지식으로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은 엄청나다. 헌데 그 모든 지식을 무시한 채 자신의 얄팍한 지식으로 남을 비판,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특히 성경, 신학,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는 더 하다.
요즘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이 페북에 종종 올라온다. 주로 그의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의 내용들이다. 그의 칭의론, 부흥론, 그리고 그에 관한 다양한 신학적 내용들이다. 여기서 그들의 신학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혹자는 그(에드워즈)의 단편적인 글을 읽은 후, 그를 반성경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을 보면, 그가 말한 단편적인 문장 몇 개를 들어 그렇게 취급하였다. 그 글을 두어 번 읽은 후 내 속에선 화가 치밀었다. 물론 혹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잘 안다. 그러나 대화의 여지도 없이 자신의 신학적 도그마를 가지고 칼로 무 베듯이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이 못내 아쉽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그를 따르고, 읽고, 배우고 있는 이들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는 이 세대의 특징을 잘 알고 있기에 상대주의적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처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통주의를 한꺼번에 버린다면 이 세대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성경에 관해 연구한(하는) 이들 가운데 완벽한 자들이 어디 있는가?
지금은 혼돈의 세대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상대주의화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도 그렇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잠시라도 한눈을 판다면, 이 세대에서 표류하기 쉽다. 어쩌면 가나안 교인들이 그런 부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혹자와 같은 주장을 하는지도 모르나 그/그녀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순 없다. 왜냐하면 남들을 납득 시킬만한 논리가 빠졌기 때문이니까.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필자가 상대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니다. 나의 생각은 대화를 하자는 것. 어차피 어떤 도그마적 교리에 갇혀 있으면 자신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물론 대화의 공통분모가 없으면 대화 가체가 될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옥한흠의 경우, 그도 그런 교리에 빠져있을 때, 그를 변화시킨 것은 체험이었다. 그때 그는 신유의 은사(이 부분이 신학적으로 은사중지론과 상충되는 부분)를 인정했다. 단지 성령의 역사로 치료를 받았을 뿐이다.
성경과 신학이 중요한 것은 맞다. 이것을 무시하면 이단 구별이 없고, 신앙의 길잡이가 없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어떤 도그마를 가지고 자신의 잣대로 정통까지 쳐 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좀 더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공부가 필요하고,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과 신학의 논의를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과 신학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리라. 기독교는 오메가를 향해 전진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9. 1. 26(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