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온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회심사건이 그랬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던 성 어거스틴의 회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4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육신의 쾌락에 빠져 향락을 즐기고 있는 동안 16세의 나이에 이미 사생아 아들을 낳았고, 한동안 마니교에 심취해서 우상숭배를 열심히 했고, 점성술에 심취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권고로 완전히 세상에 빠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한 신앙생활도 하지 못한 채 간간히 육체적인 쾌락에 온몸을 불사르곤 했던 어거스틴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중에 그는 옆집 아이들이 장난하며 떠드는 소음 가운데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무시하고 계속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번 또 같은 음성을 들은 후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서재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은 후 육신의 죄악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철저한 회개를 거쳐 심령의 변화가 경험한 후 당대에 가장 영성이 뛰어난, 그리고 1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 한순간에 일어 난다. 심령의 변화는 어거스틴에게도 그렇게 역사했고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 그래서 악한 영에 눌려서 물질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힌 채 황량하게 메말라 가고 있던 나의 심령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영혼을 위한 지속적인 중보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을 향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장모님의 지속적인 기도가 가장 큰 힘의 근원이었다. 올해 96세가 되신 장모님은 기도의 사람이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 지난 18년 동안 장모님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부족하지만 주의 종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기도해 주셨다. 어거스틴에게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면 내게는 장모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장모님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내린 적이 없다. 전화통화를 할 때도 늘 존댓말을 사용하셨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모님이 나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장모님은 자신의 친딸인 내 아내에게도 주의 종의 아내가 된 이후, 즉 사모가 된 이후에는 반말을 하지 않으신다. 주의 종에 대한 철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영적 섬김의 원리를 확실하게 일상 생활 가운데 실천하시는 분이 었다. 그래서 피닉스 사막은 내게 은혜의 땅이다. 우리 가족이 피닉스로 떠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덥고 건조한 사막 땅에 뭐 하러 이사 가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하 나님이 왜 우리 가족을 피닉스로 보내셨는지 그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막은 생명이 살지 못하는 황량한 땅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사막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활력을 얻고 소생하는 기적의 땅, 은혜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덩달아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내 마음을 괴롭히고 사로잡았던 걱정과 근심, 조바심과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내 몸 안에 있던 더러운 요소들이 장맛비에 쓰레기 쓸려 내려가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지속적인 두통도 그쳤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불면의 고통도 사라졌다. 대인 기피증으로 여겨질 정도로 주변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웃집에서 그만 좀 찾아오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게 되었다. 기도할 때 방언도 다시 회복되었다. 방언 기도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우선 기도 시간이 늘었고 기도의 질이 달라졌다. 나를 위한, 나의 가족을 중심으로 했던 이기적인 기도의 방향이 이제는 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이타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전도의 열정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였다. 미국에 와서 이민 초창기에 전도하다가 뺨을 맞을 정도로 집요하게 전도했던 그 전도의 영이 다시 회복되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왔다. 그렇지만 주변에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영어 실력은 단어 몇 마디 뱉어놓고 나면 모든 밑천이 다 드러나는 상황이라 내심 망설임도 있었지만 일단 전도의 발을 내딛었다. 아내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 옆에 큰 마켓이 있는데 매일 아침 그곳에 찾아가서 우선 종업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Are you happy, today? Believe in Jesus. He will give you a real happiness. I will pray for you"
처음에는 조금 맛이 간 이상한 동양 사람으로 생각했던 종업원들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켓을 찾아와서 예수를 증거하며 자신들을 축복해 주는 것을 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두 호의적으로 태도가 변했다. 지금은 내가 마켓 안으로 들어가면 몇몇 종업원들은 먼저 내게 말한다.
"Pastor Kim, I'm happy today, and you?"
자신은 오늘 참 행복한데 김 목사는 어떠냐고 먼저 응수를 하는 것이다. 마켓 매니저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