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엡4:7-12
제 목: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웠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1-12) And he gave the apostles, the prophets, the evangelists, the pastors and teachers, to equip the saints for the work of ministry, for building up the body of Christ.(Eph 4::11-12)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마지막 달입니다.
교회 절기로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되면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가 생각납니다.(눅2:25-38)
역사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역사는 거울과 같습니다.
과거역사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백성,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입니다.
자기 역사를 부정하는 민족은 신뢰가 없고 발전이 없습니다.
역사는 디딤돌과 같습니다.
역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대로 기록돼 있습니다.
마1:6에 다윗왕의 가문이 나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가정 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실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진리인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처럼 살아야 됩니다.
사람이 짐승같이 산다든지 짐승이 사람처럼 산다면 뉴스가 됩니다.
우리 저속한 표현 중에, ‘개 같은 놈’... 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犬) 같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 ‘답게’ 사는 것이 은혜요, 질서요, 축복입니다.
이것이 질서와 조화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평안을 얻고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뭐든지 기본 상식을 벗어 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답게 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답게 사는 것일까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우리의 분량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분량을 따라’ 주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7절)
그래서 그는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거저 주신 너무도 놀라운 ‘은혜’ 임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이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죄에 사로잡힌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좀 더 깊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
원문에는 7절 앞에 ‘그러나’ 가 있습니다.
‘그러나’ 는 앞의 내용 엡4:6절까지의 흐름을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에베소서 2장 이후부터 말씀하는 요지는 ‘교회의 하나 됨’ 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됨’ 에 대해 계속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7절에서는 말씀의 방향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하나 됨을 강조할 때, 마치 개인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체로만 보시지 않고 개인을 각자로 보십니다.
7절에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로 시작하는 말씀은 말씀의 방향이 전체의 하나 됨으로부터 각 개인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체로도 보시지만, 또한 개인으로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는 서로 다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교회로서 하나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 너무도 다릅니다.
서로는 같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특징을 뚜렷하게 구분지어 줍니다.
이번 주 뉴욕실버미션 26명의 단기 선교사님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경험이 없는 선교사들은 대부분 마음속으로 ‘그곳에 가서 내가 뭘 하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서 사역을 하면, 그렇게 할 일이 많고 바쁘고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 달랐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대개 인간관계를 경쟁구도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면 비교하려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고, 그렇게 하심으로 전체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늘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로 주셨...(11절)
7절의 ‘그러나’ 는 그런 의미입니다.
성도 개개인을 서로 다르게 만드시고, 서로 다른 이들의 모임을 통해 전체의 하나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님은 교회에 사역자를 세우셨습니다.
본문에는 네 종류의 사역자를 언급합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를 주셨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이 아직 기록되기 전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아 초대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가보와 같은 사람(행11장, 21장)이 대표적인 사람이었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예언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 선지자 직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복음 전하는 자는 지금의 전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을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거나, 사도들이 세워놓은 교회를 목양하고 가르치던 사역자들을 지칭합니다.
디모데와 디도, 혹은 빌립과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 세 직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사역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어오던 사람들이 바로 목사와 교사들입니다.
목사와 교사는 별도의 다른 두 직분이 아닙니다.
이 두 단어는 한 관사로 연결되어 있고, 실제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한 사람에 의해 동시에 시행되던 직분입니다.
목사란 양을 치는 목자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성도를 보살피고 격려하며 세워가는 직책을 의미합니다.
또한 교사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른 진리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제사장적 직분에 가깝고, 교사는 선지자적 직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사역자를 세운 목적 무엇입니까?
주께서 이들을 교회에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2절)
이것이 주께서 교회에 목양하고 가르치는 사역자를 세우신 목적이라 했습니다.
그들에게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맡겼습니다.’
본 절은 조금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라고 시작하는데, 옛날 성경(개역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여’ 와 ‘하며’ 는 성경해석에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옛날 성경대로 ‘하며’ 라고 해석하면, 12절에 나오는 세 가지 사역, 즉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거나 순서에 큰 문제를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하여’ 라고 번역하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순서의 중요성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즉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라는 말은 봉사의 일을 하는 것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 반드시 먼저 와야 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온전하게 성장하지 않은 성도에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성경을 통해 교회에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먼저 말씀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여 성장하고 온전해지는 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교회는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현대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현실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봉사 앞에 더 심각한 온전해 지는 과정이 있는 자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목숨을 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앙훈련은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선포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봉사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2.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도 사역자를 주신 목적과 동일함을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절)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일차적인 사명은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온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생각하는 것은 목회를 속도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교회의 성장에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모이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제일 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교회에 적응하고 여러 곳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그런 일들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각자가 말씀으로 온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뉴욕영안교회는 교회 개척 6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5년의 세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정국에서도 교회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직들께도 감사합니다.
지난해에도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난 5년 동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과정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몰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시간 동안도 일하셨고,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교회를 세우시고, 성경을 주신 목적이었고, 교회에 사역자를 세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온전하게 함을 기억하세요.
그러기 위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앙이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상식적인 선에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기대이면서 교회에 사역자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예정을 배웠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부정합니다.
순복음 교회에서 자란 저도 그런 영향을 조금 받아서 그런지 표면적으로 의심 없이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다고 했지만, 조금씩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하나님의 예정을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다시 깨닫고 확신하는 순간,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저에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먼저 저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장래의 두려움, 질병과 재정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전히 자유해지는 경험을 누렸습니다. 조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유와 감사의 마음을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다시 깨닫는 순간 저의 삶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격적 성숙함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온전함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전함은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자신과 여러 사람들을 교회의 사역자로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이 교회를 온전하게 함을 선포합니다.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1절)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시련속에서도 성도답게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당하는 고통이나 괴로움위해 기도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베소교인들이 성도답게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부르신 목적 따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입니다.
모든 핵심가치는 제자리를 지키는데 있습니다.
1) 제 자리를 지킬 때, 질서가 있고 가치가 있고 아름답습니다.
목사가 있어야 할 자리 있고. 성도는 성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의 자리가 있습니다.
육중한 기차가 선로위에 있어야 잘 달릴 수 있지, 선로를 탈선하면 기차의 기능이 상실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킬 때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라도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날 때 루시퍼라는 타락된 천사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유1:6)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기에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2)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후3:3)
편지는 보낸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부르심의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답게 사는 것일까요?
2.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
2절에 소개한 다섯 가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품이나 열매는 본질적으로 DNA 같은데서 나타납니다.
자식은 잘 낳든 못 낳든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의 DNA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영혼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닮습니다.
외모만이 아닙니다. 기질과 성품까지 닮습니다.
DNA 같기에 본능적인 것입니다.
속에 있는 DNA가 그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DNA가 있습니다.
DNA가 주님의 피요, 예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표를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2절)
1) 겸손과 온유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겸손과 온유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채워지듯이 은혜도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성경에 왜 많은 사람들이 버림받았는지 아세요?
겸손함을 버리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러했고, 웃시야, 헤롯 왕이 그러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다,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했다. 이게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버리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가 겸손과 온유라고 했습니다.
2) 또한, 오래 참는 것이 삶의 지표라 했습니다.
........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
오래 참는다는 뜻은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고난과 풍랑과 시련 중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잘되고, 좋은 일이 있고, 건강할 때도 신앙생활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약5:11에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욥은 집이 무너지고, 자식들이 죽고, 아내가 도망가고,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신앙을 지키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동방에 의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다가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하세요.
즉시 안 이뤄진다고 포기 하지마세요.
한 달, 몇 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끝이 라고 아니하면 의사가 끝이 라고 해도 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이 있습니다.
3) 또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2절)
서로 용납한다는 말은 상대가 있음을 말합니다.
무조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용납이 아닙니다. ‘서로’ 라고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회개할 때,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라고 할 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 하라고 했습니다.
끝이 없는 용서입니다.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 진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지켜 주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뉘우침이 없고, 속이고, 외식하며, 거짓된 바리세인들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주님이 무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심으로 죄의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서로 용납하라는 권면입니다.
사람이 평안하게 사는 방법은 적을 만들지 않는 일입니다.
적을 만들면 자신도 언젠가는 올무에 빠집니다.
그리고 고통과 불안이 오고 항상 방어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적이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집안에 있다고 했다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 가까운 사람,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배신하는 게 80% 랍니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은전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를 병들게 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치유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가 되기를 힘쓰세요. (3-5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4절)
연합된 공동체가 하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라는 개념은 어느 개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럿이 모여진 연합된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라. 주도 한분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라.(4-5절)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이시십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역동적 은혜가 가능한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집중할수록 우리 개인과 교회가 더욱 건강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