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마태복음 28장 1-10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복음뉴스 0 2022.04.23 06:26

 

제목 : 절망에서 희망으로 

본문 : 마태복음 28:1-10

 

사람들 중에는 무슨 말을 하면 의심부터 먼저 합니다. 참 희안하죠..“그거 진짜야 ..가짜 아냐,, 거짓말 아냐..속어로 구라치지마..거짓말하지마” 사실을 사실로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때론 말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넌 어떻게 맨날 속아만 살았냐, 허구헌날 의심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라구” 한방 얻어 맞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말해도 쉽게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 잘 믿지 못할까요? 왜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대꾸를 할까요? 우리 안에 지금 내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지쳐 있는 상태거나, 사는 게 피곤하고 답답해 합니다. 얼키고 설킨 일들로 인해 지금 너무 불안해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진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마음밭이 받아 들이기를 어려워 합니다. 그 외에 생각이 딴데 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 보면 이런 현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몇 번에 걸쳐서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하지만 어느 누구도 확신있게 받아 들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의심했습니다. 죽으면 끝이지..무슨 살아난다는 것인가.. 속으로 중얼 거렸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믿어야 할 사람들은 안 믿고 평상시 안 믿는 사람들이 기대감을 갖고 기다립니다.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할 제자들은 의심하는데, 엉뚱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마 27:63 에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부활에 대한 기대와 은근히 쓸데 없는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군병들을 지키게 하라 고 제안을 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부활 사실을 숨기고 감추기 위해 온 갖 방법을 다 동원 합니다 .

마 28:12-13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부활을 감추기 위해 군병 들에게 돈을 주고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의심이나 불신이라는 지뢰를 밟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의심이 가져다 주는 최고의 병은 통찰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통찰력이란 꿰뚫어 보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시면 생각을 깊게 합니다. 내가 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결단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은 엉뚱한 데 시간과 물질 낭비를 하게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여인들은 예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사다 두었습니다. 우선 두 가지 필요없는 시간 낭비와 무의미한 향품 낭비 입니다. 시체에 바르기 위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일입니다 .

자기 딴에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부활하는 사람에게 향료가 필요한 걸까요?

우리도 이런 일을 종종 합니다. 엉뚱한 시간 낭비 입니다. 거룩한 낭비가 되어야 하는데 불필요한 낭비를 할 때도 많습니다. 

 

의심은 옳은 길에서 이탈하게 합니다. 정작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갈릴리로 간 사람은 없습니다. 

의심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오히려 방황하거나 헤매게 할 뿐입니다.

 

의심이 심각한 것은 미리 쓸데 없는 염려나 걱정을 하게 합니다. 

의심은 굳이 걱정 안해도 될 일도 사서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던 여인들은 무덤으로 갑니다. 가면서 무슨 걱정을 하나요? 막 16;3에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의심은 불필요한 걱정을 사서 합니다. 벌써 돌이 열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걱정만 할 뿐입니다. 우리 삶에도 쓸데없는 염려와 근심이 삶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자신의 삶을 계속적으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기대감을 갖고 갈릴리로 가시지만, 제자들은 절망 속에서 방황하며 각 기 제길로 갈 뿐입니다. 

마 28:6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고 말씀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마 20:17-19 .고난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들과 제자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으로 올 게 아니라 갈릴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삼일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이 그들의 머릿속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 다니긴 하는 데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죽음이 끝이라 생각하고 처신 합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사서 무덤으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가신 상태 입니다. 의심은 늘 타이밍을 놓치게 합니다. 삶에서 타이밍이 정말 중요 합니다. 종종 타이밍을 놓쳐 후회 하거나 손해 보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열심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열심인가 입니다. 믿음없는 열심은 무의미 합니다. 

 

열심도 좋습니다. 그러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뢰, 믿음입니다. 열심만 있다고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열심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믿음위에 열심을 더하면 엄청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여인들은 향해 말을 합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가 이 말을 여인에게 하는 이유는 분명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합니다. 천사는 여인들로 하여금 누우셨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합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도 믿음이 없냐는 식의 꾸중이나 야단을 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사랑의 음성으로 일어나 제자들에게 알리어 갈릴리로 가도록 격려 하십니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의심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갈릴리는 안중에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느낌과 감정은 무감각했습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갇혀 있는 이들에게 그가 말씀하신 대로 라는 그 말에 다시금 내면에서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뛰기 시작 합니다.

 

둘째, 메신저로서 기쁨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8절에 시체를 점검하러 갔던 여인들이 천사를 통해서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부활은 죄 사함의 증거 입니다. 

부활은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셨다는 증표 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죽으신 곳을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메신저로서 사명을 주십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라고 임무을 줍니다. 여인들은 준비해 온 향품을 내버려 둔채 무덤 밖을 나갑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 올때는 슬픔과 막막함속에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무덤 밖으로 나가는 여인들의 마음은 다릅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덤에 갔던 여인들은 기쁨반 두려움 반으로 제자들을 향해 힘찬 경주를 시작 합니다 . 물론 여인들만 의심했던 게 아닙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 베드로 , 시골로 가는 두 사람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 조차도 믿지 못하고 절망과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주님은 메신져들인 여인들에게 나타나시어 평안하뇨 라고 인사를 합니다. 

우리가 주로 인사 할 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인사말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삶과 깊이 연관된을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밥 먹었냐” 라는 인사말은 너무 가난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시절에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잠 잘잤냐” 라는 인사말도 하루 하루 사는 데 전쟁입니다. 잠 잘잤냐는 말은 어젯밤에 아무 일 없었냐 라는 의미로 인사말을 합니다. 

 

평안하뇨 라는 예수님의 인사는 너의 지금 심령 상태가 어떠한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부활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니.. 확신이 드니 라는 의미 입니다. 조금 전까지는 반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확신을 갖습니다  더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사람의 발을 붙잡으려면 굽혀야 합니다. 낮춰야 합니다. 엎드려야 합니다. 여인들은 낮춰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 합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주님은 메신져들인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 합니다.내 형제들에게… 말하라

주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없다고  “못된 놈들,, 그렇게도 말했건만.. 믿지 못하는 나쁜 놈들에게” 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 28;10에 보면 ..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 내 형제 라고 말씀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끝까지 신뢰하고 있습니다.이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보여주시는 복음입니다.

 

메신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뭐라고 말을 하나요?

요 20:18에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여기 내가 주를 보았다는 말은 부활를  최초로 본 증인인입니다.. 

 

보았다는 말은 무덤이 열린 것을 봅니다. 자리에 누웠던 수건 옷들을 봅니다. 이제 주님을 보았다는 말은 완벽한 인식 입니다 .보면 볼수록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인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절망한 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배신과 부인으로 실망하여 우울에 빠져있는 베드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평안하뇨..희망을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희망없던 이들이 다시금 눈을 뜹니다.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마지막, 절망은 끝을 생각하지만, 희망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합니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영적 장소, 갈릴리

10절을 보라. 예수님은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이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사실 대로 이뤄졌습니 갈릴리로 가라.

 

왜 갈릴리 인가? 갈릴리는 제자들이 소명, 부르심을 받은 곳입니다 .

죽음 이후에 부활로 시작되는 새로운 영적 센터 입니다. 

 

침울했던 삼일..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은 거기가 끝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광스러운 죽음, 위대한 죽음은 죽음 이후에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알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수치와 천대 받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죽음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꿔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제대로된 부활을 보도록 끊임없이 노크하십니다 .

 

왜 우리는 눈을 들어 다시 예수의 부활을 바라 보아야 할까요?거기에 진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팬데믹, 불의, 사회 붕괴로 두려움이 일상이 된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왜 눈을 들어 다시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부활을 믿고 사는 길 만이 불안하고 답답한 세상에 오늘을 견디게 할 ‘진짜 희망’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전혀 다르게 살도록 하는 힘입니다. 전에는 가질 수 없던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힘의 위력” 이 이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답게 부활의 권능을 입고 담대하게 다시 사는 것입니다 .

 

예수의 무덤은 부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 합니다. 

예수의 무덤을 생각해 보면서 영적으로 무덤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무덤은 영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무덤은 죽은 곳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죽으러 오는 게 아니라, 자랑하러 오고 , 사람 만나러 오고,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서 오려고 합니다. 

 

요한이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마치 회칠한 무덤 같다고 했습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썩어 있는 교회를 질타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위해 교회가 무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죽으러 와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서 나를 고치고 회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부활되어 나가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정상적인 질서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상적으로 잘 작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입고 부활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나를 죽이면 홀가분 합니다. 여전히 내 안에 내가 가득차 있으면 무거워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 무겁다 보면 따지지 좋아 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합니다. 불안과 염려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나를 무덤에 죽게 하라. 그러면 홀가분해 질 것입니다. 무덤안에서 하나님의 위력이 나를 고칠 것입니다 .나를 새롭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부활을 옷을 입고 사는 성도

부활을 경험하고 난 후에 달라진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의 권능을 힘입고 사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나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납니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아주 훌륭한 모습들을 봅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가 아닙니다.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입니다. 

 

서로 믿고 그 안에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이전에는 불신하고 이기적이고, 내 가족을 우선하는 생각들,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사랑을 깨닫습니다. 나같이 이기적인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나를 위해 가장 깊은 어둠으로 뛰어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모두가 무덤은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덤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의 위력이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짝을 이루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불안의 시대에 확실한 희망이 바로 부활 입니다.부활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삶은 고난입니다. 예측치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부활이 내 삶을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 삼는 겁니다. 겁나고 두려움이 몰려 올 수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부여하신 힘의 위력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 아프신 분들, 삶에 지쳐 낙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피 묻은 주님의 손으로 기도하며 부활을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들에게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힘의 위력을 맛보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슬픔과 고난이 부활로 대역전의날을 소망하라. 

절망에서 희망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힘의 위력이 이제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 힘으로 부활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식도 달라져야 할 때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 안에서 인식하며 사는 겁니다.  

 

무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덤은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한 영적 광야의 시간입니다. 

무덤은 끝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과정입니다. 부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팬더믹, 언제 또 다른 팬더믹이 우리를 두렵게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다시 사신 예수” 안에서 인식하며 사는 겁니다. 

 

부활을 입고 사는 자는 삶의 어떤 자리라 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두렵게 하는 현실 한 복판에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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