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왜 멀찍이 따라가나요
본문 : 누가복음 22:54-62
나의 믿음이 평상시 모습과 비상시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대답이 나오나요.. 많은 경우에 평상시때에 믿음이 비상시에 잘 연결되지 못합니다. 조금만 두렵게 하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믿음의 자리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약하지.. 내가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는거지 하면서 시험해 빠지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거울이 되었으면 합니다.베드로의 평상시의 모습을 보라.
베드로의 평상시 삶은 불안케 할 정도로 남을 무시하는 돌출 발언과 행동을 일삼았다.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면서 모두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 말씀 하시자마자 대뜸 베드로가 뭐라고 치고 나오나요..막 14:31에는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힘주어 대꾸 합니다 .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아주 놀라운 답변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고 말씀 하시지만 베드로의 귀에 들어 올리가 만무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
이런 대화가 오고 가다가 마침내 예수는 무리들에 의해 붙잡혀 갑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잡혀 끌려 가시면서 곤욕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나요.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예수와 함께 죽겠다고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에 지금 있나요?
첫째,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 속에서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를 보라
눅 22:54에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여기 보니까 .. 멀찍이 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숨어서 광경을 지켜 봅니다. 왜 가까이 가지 못할까요? 언제든지 주를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가 아닌가!!
여기 멀찍이 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나요? 여차하면 달아나겠다는 의도다. 상당히 계산적이다.
현재 베드로가 멀찍이 어디에 있나요?
55절을 보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베드로의 생각이 아 저 무리들과 함께 태연하게 앉아 있으면 내 자신이 노출되지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여기 함께 라는 단어 입니다. 성도는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할까요? 성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세상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소문나지 않고..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소릴 지르면서 말을 합니다 .
56절에 한 소녀가 불빛에 비쳐진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더라” 고 외침이다. 그러자 당황한 베드로는 곧바로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라고 거짓말로 부인을 합니다.
그렇게도 큰소리 치던 베드로가 한 연약한 소녀 앞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까? 이런 믿음 없는 자가 수제자라니.. 라고 마구 비난하고 싶지만 그럴수가 없다. 나는 베드로가 겁에 질려 마구 부인하는 베드로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도 그럴거니까..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언했지만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보았지만 별 다른 반응이 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베드로는 아마 휴유 하고 한숨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당이라 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별 사람을 다 잡네.. 라고 둘러되면서 변명을 합니다.
베드로가 계속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를 자백함으로 두들겨 맞으시고 온갖 모멸감속에도 끄떡하지 않고 견뎌내십니다.
안에서는 진리를 위해 시인하고 있는 데, 밖에서는 자기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것도 아주 구차한 거짓말로 신경질적으로 변명합니다.
베드로는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평상시에 그렇게 호언장담 하던 베드로는 두번 씩이나 이미 거짓말과 부인으로 둘러 됐지만 전혀 반성이나 깨달음이 없다. 그저 자신이 노출되긴 했지만 무사히 넘긴 것에 만족할 뿐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 놀라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예언 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위선과 가증스런 모습을 보시면서도 죽을 만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또 한사람이 장담하며 이는 갈릴리 사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이 저 죄인과 함께 있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라고 외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라고 아주 뻔뻔하고 씩씩거리면서 거짓말로 부인합니다.
연거푸 한번, 두 번, 세번째 부인하는 순간에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 옵니다. 바로 수탉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립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 보십니다. 두 사람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챙피했을까?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 하였다고 합니다. 통곡하였다는 표현은 그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베드로의 통곡이 오늘 우리의 통곡이 되면 어떨까
62절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런 행동으로 이어졌을까? 주님의 사랑스런 눈빛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울었을까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은혜로 치유됩니다. 그렇게도 뻔뻔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신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눈빛앞에 무너졌습니다.
당신은 너무 마음이 상해서 베드로처럼 통곡한 적이 있나요?
통곡을 했다면 무엇이 자신을 통곡하게 했나요? 부인했던 많은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주님을 부인했던 경우일 것입니다. 괜스레 고집을 피워 가면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경험 일 것입니다 .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눈길에 깊은 영적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못했음에도 대한 깨달음입니다. 항상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
지금 온유한 예수님이 당신을 바라보실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단지 바라보실뿐이다. 그럴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마지막, 주님은 늘 앞서 우리에게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수탉의 날카로운 소리는 베드로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합니다 .베드로에게 수탉의 울음소리는 영적으로 게을러 질때마다 각성케 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수탉 소리를 말씀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사인 입니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던 질주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
오늘 나를 향하신 수탉의 울음소리
우리는 현실을 살면서 이기적인 계산 앞에 브레이크 없이 살 때가 많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고민만 하지 말고 나에게 들려 주시는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들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탉의 울음 소리를 들려주시고자 하는 의도가 뭘까요? 혼돈과 자기 밖에 모르는 자신에게 들려 주시는 영적 막대기 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슴하셨습니다 .마 5:4에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축복하시리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엉망진창의 삶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처럼 우리의 헝클어진 삶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고 말씀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자꾸 멀찍이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살아가면서 자기 욕심에 이끌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잊고 살거나 성도가 아닌 척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마치 닭 울음처럼 우리를 일깨우는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과 마주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때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주님의 눈빛을 외면하지 맙시다.
기억합시다. 주님의 눈빛은 다그치는 눈빛이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는 깨닫게 하시는 눈빛임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봅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나요? 혹시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왜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가요?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싶은 건가요..
오늘날 교회는 수평 이동을 합니다 .
한 교회에서 너무 상처 받고 지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용히 큰 교회 뒷자리에 가서 예배만 드리고 오겠다는 생각이 지배 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멀찍이 신앙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죽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런 눈길이 자신을 향해 바라보고 계십니다.
멀찍이 뒷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을 향해 주님의 눈길과 마주 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 하였던 것처럼, 예수께서 나를 향해 돌아 보시며 미소짓는 눈빛에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자신이 어떤 문제로 인해서 멀찍이 떨어져 있나요?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 보라.
주최할 수 없는 통곡으로 주님과 더 가까워집시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축원 합니다 .